1946년 3월 11일
1월 6일에 '김계조 사건' 이야기를 했다. 막노동 하러 일본에 갔다가 일본 정계의 굵직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조선에 돌아와 총독부 고관들을 배경으로 광산업을 벌이던 청년 사업가 김계조가 해방 직후 총독부 쪽에서 현금 250만 원 등 1000만 원 상당의 자본을 받아 댄스홀 등 호화 유흥업소를 차리고 있다가 체포, 기소되었다.
그의 혐의는 횡령, 배임 등 경제 범죄에 그치지 않고 (1) 조선 정부에 친일파를 잠재시켜 친일적 시정을 하도록 하며 (2) 배일 친미파를 암살하며 (3) 조선 정부 비밀 정책을 탐지하며 (4) 조선과 미국과의 이간을 책동하고 (5) 조선 국내 치안 교란 등 '간첩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판 막바지에 와서 재판장 오승근이 느닷없이 민사부로 발령이 났다. 얼마 전 박흥식이 체포될 때 장택상이 하지의 명령을 빙자하여 무단히 풀어주었다가 여론이 비등하자 황급히 도로 구속한 일도 있었던 만큼(3월 2일자 일기), 이번에도 김계조를 비호하는 세력에서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널리 일어났다. 3월 19일 언도된 징역 5년 추징금 310만 원의 판결이 내린 후에도 이 의혹이 걷히지 않자 법원 당국은 이례적으로 진상을 밝힌다고 나섰다.
金桂祚 사건의 담당 판사인 吳承根 판사 전임 문제에 대하여 일반은 의아를 느끼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서울재판소 당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진상을 천명하였다.
"金桂祚 사건 심리 중에 吳承根 판사가 민사로 전임케 된 것은 김계조 사건에 악영향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판사가 사건 취조 중에 직무 부담을 변경하는 것은 소속 장관의 직권에 속하는 것으로 항상 있는 일이며 오 판사를 민사로 전임시킨 후도 김계조 사건과 이에 관련된 사건을 전부 취급시켜온 것을 보더라도 공명정대한 당국의 조처에 일반은 오해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또 전일 발표된 오승근 판사 담화에 김계조 사건 취조에 있어 내부의 간섭이 있은 듯이 말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오 판사 스스로 이러한 말을 한 일이 없다고 함으로 전일 기사는 사실의 오보이니 이 문제에 관하여 일반은 추호도 오해함이 없이 우리 사법부를 절대 신뢰하고 협력하기를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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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승근 본인은 같은 날 이와 다른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사법부에서도 암흑면이 있다면 솔직히 지적 시정해야만 일반의 신뢰도 더할 것이며 명랑한 사법부가 될 것으로 믿는다. 나는 개인적 입장에서 말하면 민사가 전문이었던 만큼 민사 전임을 희망한다. 따라서 전임에 대하여 일반이 의아스럽게 생각함을 심히 유감으로 여긴다. 나는 일반의 의아를 일소하기 위하여 전임의 원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대법원장 金用茂 씨는 판사에 대한 훈령 제1호를 법적 근거로 하여 지방법원판사 직무 분담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 하여(실은 이 훈령에는 간섭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다) 나의 전임을 지방법원장에게 지시 간섭한 바 지난 2월 20일경에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임을 발표하였다.
김용무 씨는 金桂祚가 음모의 소굴로 이용하고자 한 국제문화사의 중역으로 참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건 수사 중에 金正睦과 검사국 3장관을 회합시킨 후 사건 내용을 말하여 모 장관은 들을 수 없다고 퇴장까지 한 사실이 있는 김계조 사건을 나는 심리하고 있었다. 이 미묘하고 명랑치 못한 관계에 있는 김용무 씨가 나의 전임을 지시하였다는 것이 대법원장의 부당한 소위라고 다수의 판검사는 이를 지적하여 대법원장 불신임의 많은 이유 중 보조적 한 가지 이유로 했다. 그리고 불신임의 많은 이유는 차차 발표되리라고 믿고 우선 나에 대한 일반의 의아를 일소하기 위하여 이상의 정도로 발표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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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근은 5월 18일자로 장흥지원으로 발령되었고 바로 사직했다. 그 직후에는 '정판사 위폐 사건'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그는 1937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해방 때까지 식민지 사법 기구에서 복무한 경력으로 <친일 인명 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명백한 '친일' 행위자라도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역할을 위해 나설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생각된다. 한편 대법원장 김용무는 식민지 시대에 변호사로 활동했고 <친일 인명 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인물이다. 경력 중 동아일보사 취체역과 보성전문 교장이 눈에 띈다.
김계조는 10월 15일 상고심에서 대부분의 죄목에 무죄 판결을 받고 징역 10개월의 가벼운 언도를 받게 된다.
세인의 이목을 끌고 있는 세칭 국제문화사 金桂祚 사건의 그 진상과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는 상고 언도 공판은 15일 오후 서울 공소원 법정에서 개정되었는데 金又說 재판장은 지난번 검사로부터 징역 5년을 구형한 데 대하여 1심에서 넘어온 죄명은 횡령·사기·장물 수수·간첩 예비 등 여러 죄명이나 하나도 그러한 혐의가 없을 뿐더러 그 죄가 성립이 되지 않고 다만 배임죄만 구성된다는 확연한 견지 아래 징역 10개월(3월 18일부터 미결통산) 언도 판결이 드디어 내리었다. 이로써 해방 직후 가장 세상의 충동을 주고 1심에서 여러 가지 죄명 아래 징역 5년 추징금 310만 원이라는 언도를 받아 불복 상고한 김계조는 결국 단순한 배임죄로써 이 사건의 종막을 고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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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조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사실 '간첩죄'는 좀 오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이 든다. 김계조는 댄스홀 등 유흥사업이 주둔군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성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이라고 변명했다. 해방 전에도 일본군사령부 연회를 자기 집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등 '접대업'의 달인이던 김계조가 '부녀자 보호'를 핑계로 수익성 높고 권력에 줄 대기 좋은 사업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파렴치범 체질이지, 정치범 체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점령군으로부터 부녀자를 보호하기 위해 유흥사업을 벌인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를 보면 일본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 요원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니는 성적 함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쟁 중에 수많은 비일본인 여성들이 강제로 '이안후(위안부)'가 되어 제국 군인의 노리개 역할을 했다는 것과 자국 군대가 해외에서 강간 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들에게 이 공포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에는 "일단 상륙이 시작되면 적군은 여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차례로 겁탈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내무성 정보과의 분석관들은 이러한 소문의 확산과 일본군이 해외에서 자행한 만행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내사과의 한 경찰관이 지적했듯이 "약탈이니 강간이니 떠들어 대며 불안을 부추기는 자들 중 대다수는 전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 결국 문제는 한마디로 이것이었다. 누가 봉사할 것인가?
정부는 발 빠르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8월 18일 내무성은 일본 전국의 경찰에 비밀 무전을 보내 각지에 점령군 전용의 특수 '위안 시설'을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준비는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대체로 지방 장관이나 경찰이 이 시설들을 건설할 책임을 졌으며, 이들은 각 지역에서 이미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업자들이나 개인을 동원했다. 같은 날 도쿄의 고위 경찰관들은 도쿄-요코하마 지역에서 활동하는 '업자들'과 만나 5000만 엔의 재정 지원을 할 테니 그들도 그에 맞먹는 금액을 기부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148~149쪽)
일본군이 침략 지역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대략이라도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패전국으로서 같은 만행을 당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조선인들에게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외국 군대 주둔에 따른 우발적 사고는 있을 수 있지만, 온 국민이 몸 바쳐 책임질 일은 없는 입장이니까. 사고를 줄이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어도, '봉사'를 위해 조직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8월 18일 일본 전국 경찰에 보낸 비밀 무전 수준의 정보는 조선총독부에도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총독부 관리들은 조선인 부녀자보다 일본인 부녀자 보호를 위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북 지역에서 약탈, 강간 등 소련군의 횡포도 실제로 일본인에게 집중되었다. 소련군은 일본을 적국으로 여기고 조선을 해방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 김계조에게 재정 지원을 한 것은 일본 정부가 성매매 업자들을 지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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