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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미친X'로 만드는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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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미친X'로 만드는 그들은 누구인가?

[프레시안 books]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좋은 책을 만나면 좋은 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기쁘다.

좋은 친구는 고민이 있는 나에게 깊이가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건넨다. 좋은 친구는 삶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인생관을 리뷰하게 하지만 그 내용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물론 좋은 친구가 건네는 이야기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에는 비약도 있고, 억측도 있고, 근거가 부족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힘을 가지는 것은 나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책은 지식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식이 가진 권력에 도전하기도 한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의 권력에 도전함으로써 좋은 책이란 우리가 어떤 지식-권력에 포섭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만약 이 책이 지식-권력에 포섭되어 행동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모습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면 그 책은 정말 좋은 책일 것이다.

▲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단 와터스 지음, 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가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서구의 지식-권력에 포섭되어 있는지에 대해 통렬한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지식-권력에 포섭되어 자신이나 이웃을 설명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아직 미확인의 '전문적인 언어'에서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출산 후 우울증', '과잉 행동 장애' 등을 거쳐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조차도 서구가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그 개념들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설명할 때 우리는 이미 서구의 고유한 인간관, 마음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문화방송(MBC) 뉴스에서 게임이 인간의 폭력성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답시고 한 소동이나 그 소동에 '전문가 코멘트'로 나온 심리학자의 말은 개그가 아니라 실제 우리가 우리 마음과 행동을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다큐멘터리'이다.

대학에서 만난 한 여자 선배는 요즘 정신분석학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러니까 정신 분석을 받아봐야 한다니깐'을 연발한다. 몇 년 전 만났을 때 근심에 차 어두웠던, 그래서 말끝마다 한숨을 내쉬던 모습과는 180도로 달라졌다. 그녀는 정신분석학을 만나기 전까지는 삶의 의미도 없었고,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단다. 그것이 다 자기의 업보이고 팔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남편은 활달하고 호탕한 사람이었고, 자식들도 말썽을 피우거나 엇나가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관계가 문제였다. 자기가 바라던 이상적인 남편은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친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문제였다. 늘 친구들을 만나 늦게 들어오고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 부부싸움은 잦아졌고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옭맨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겉돌기 시작했다.

자식을 보면서도 두려움이 커져갔다. 말썽은 피우지 않았지만 자식이 공부를 조금만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늘 조급해하고 신경질적인 자신의 성격이 자식에게 대물림된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불안이 커질수록 억울함도 커졌다. '이게 다 내 탓이다'와 '이게 왜 다 내 탓인가?' 사이에서 마음은 요동쳤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소개로 정신 분석을 하는 공동체를 만났다. 그 공동체를 통해서 그녀는 자기 문제의 핵심을 만났다고 말했다. 문제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었다.

분석을 통해서 그녀는 자기가 가진 열등감과 패배의식의 근원을 만났다. 과거에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두려운 기억들을 언어로 옮김으로써 눈물이 흘러나왔다. 해방감을 느꼈다. 속으로 꽁꽁 싸매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현재의 나를 만든 과거의 근원을 봄으로써 그녀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녀는 유쾌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뒷문으로 찾아왔다. 정신분석학은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 모임에서도 누군가의 낯빛이 흐리거나 우울해 보여 다른 친구들이 걱정을 하면 '당연한 거야. 자기를 표현하지 않는데 어떻게 문제를 극복하겠어'라고 너무나 명쾌하게 말하였다.

그녀의 당차고 명확한 말에 주변의 친구들이 외려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그녀에게는 주변 친구들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했다. 회피한 문제는 언젠가 더 강렬한 해일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덮쳐온다. 해일이 되기 전 작은 파도일 때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 좋다. 표현하라. 마음의 문제는 언어로 풀어놓음으로써,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그녀에게 신앙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주변의 친구들도, 가족들도 그녀를 불편해하지만 그녀는 이제 혼자서'만' 행복하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쓰나미(지진 해일)가 닥친 이후 스리랑카에 문자 그대로 '쓰나미'처럼 몰아닥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소동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과 대처법은 전형적으로 고통을 개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로 환원하는 서구의 인간관에 기초하여 만들어져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가공할 고통을 직면했을 때 인간은 그 고통을 회피하고 부인하려고 하지만 그 부인의 결과는 이후에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보다 일찍, 자신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가져온 고통을 직면하고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해결법은 고통은 개인적 고통이기도 하지만 집단이 같이 겪고 헤쳐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서양인들이 보기에)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부인이나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가 배려있게 그 고통을 기억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다른 방식이다. 그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마을이 다시 폭격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 소년에게 엄마가 했다는 말이다. 다음에 공격이 있고 만약 죽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죽을 것이라고. 이 말이 위로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에 정확하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서구라면 당연히 '같이 죽자'가 아니라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라고 말을 했을 터였다.

사실 '같이 죽자'가 훨씬 더 강한 위로와 삶의 희망이 된다는 것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많이 확인한다. 일찍이 어머니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집안에서 배려 받고 있는 한 동성애자 친구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날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어머니는 너무나 놀라 한 동안 말을 못하더니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는 병원으로 직행했단다. 다짜고짜 아들에게 에이즈 검사를 받게 하고는 그 결과를 초초하게 아들과 함께 기다렸다. 음성이라고 결과가 나온 후 아들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자기가 에이즈 양성 판정이 나오면 엄마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냐고. 엄마는 대단히 간단하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하긴. 다 같이 죽어야지. 한 학생은 지난번 연평도에 북한군이 폭격을 했을 때 엄마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엄마는 학교에 있는 딸에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며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인간 감정의 변화,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유쾌하고 주눅 들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생의학이 스캔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호르몬과 생화학적인 반응일 것이다. 출산 후에 여성들이 겪는 우울증은 개인을 고립된 세계로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으로만 보면 호르몬이 교란되어 생기는 결과이다. 이처럼 그녀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 작용이라면 따뜻한 위로 한 마디보다는 차라리 호르몬의 작용을 교정해주는 알약 하나가 더 도움이 된다. 과학의 대상으로 인간의 마음은 시대와 장소의 차이를 뛰어넘는다. 인간은 보편적 신체 구조를 가지고 보편적 생화학적 반응을 보이는 보편적 존재이다. 이것이 생의학이 이해하는 인간의 보편성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한 개인에게 갇힌 독립된, 무엇보다 고립된 세계라고 전제한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인간에 대한 이런 관점에 반기를 드는 책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인간에 대한 다양한 서사, 서사의 다양성이 파괴된다는 것을 우려한다. 무엇보다 서구를 제외한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자기 완결적인 고립된 폐쇄물이 아니다. 그녀의 출산 후 우울증은 호르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될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겠지만 설혹 호르몬이 전적이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우울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으로 이해하며 어떻게 다루는가에 의해서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과 주변에게 일어난 사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대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야기로서 자신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서사화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문학적 주체이기도 하다. 단 이 문학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그 징후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붙이는 그가 속한 공동체이다. 주변의 사람들 역시 그 사람을 이 이야기에 맞추어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그 이야기에 따라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내쳐지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타이의 한 게이는 자신이 게이인 것은 전생의 업보라고 말했다. 전생에 자신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남자지만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그 업보를 잘 풀어야 다음 생에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업보를 중심으로 해서 성 정체성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는 서구의 '동성애'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성애자'들은 거의 억압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나 '여자'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 역시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신의 '뇌'나 '호르몬'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생'과 연결시켰기에 보다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서구의 '동성애'라는 관념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서구식의 동성애자 이미지에 갇혔다. 동성애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 정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비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배제는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대한 서구의 이해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의 3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진자바르의 정신 분열증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이다.

요컨대 세계화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문학, 그 문학의 다양성과 역동성이다. 과격하게 보면 이 책의 저자가 과학을 부정하고 고통의 서사적 성격과 대처법, 즉 문학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의사들이 말하는 약의 효능이나 인간 신체의 생화학적 반응을 보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은 효능이 있으며 잘 쓰면 참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일본의 우울증 사례에서 초국적 제약 회사의 핵심 인물들이 보여주듯이 서구의 '과학'에 대한 믿음을 과하게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방식으로서의 문학을 완전히 미신으로 무시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홍콩의 '거식증' 사례와 일본의 '우울증' 사례를 본다면 도리어 과학이 어떻게 문학이 되어 새로운 증후를 유행처럼 유포시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해석 체계를 발견한다면 순식간에 그것으로 자신을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나는 아프다. 이름을 얻기 전에는 나는 아프다는 것을 아프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이 더욱 큰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아픔을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으로 나는 나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이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자신을 사회에 드러낼 수가 있다.

나는 아프다. 이 사회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곧 사회의 질병이 되고, 사회는 이 질병에 대처하려고 한다. 이 유행의 뒤에서 누가 만세를 부르는가. 아픈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새로운 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돈을 버는 초국적 제약 회사이다. '마음의 감기'라. 이 얼마나 문학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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