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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만 보면 현기증? '숫자울렁증'을 위한 괴물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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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만 보면 현기증? '숫자울렁증'을 위한 괴물 같은 책!

[이명현의 '사이홀릭']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

몇 년 전, 과학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어느 출판사의 편집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제일 먼저 꺼낸 이야기는 흔히 '레퍼런스 북'이라고 부르는 참고 자료가 될 만한 책들을 제발 좀 번역하라는 주문이었다.

그 편집장에게 건넨 천문·우주 분야의 긴 레퍼런스 북 목록에 속한 책들 중 실제로 번역된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영리를 우선 생각해야하는 출판사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성스럽게 긴 목록을 작성했던 사람으로서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감추기도 힘들다.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박병철 옮김, 승산 펴냄)은 이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래주는 반가운 책이다. 그는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교양 과학서이므로 복소함수 미적분학의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다"면서 이 책이 교양 과학서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수학은 물리적 세계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므로, 물리학 법칙을 깊이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수학을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 책의 전반부(1~16장)는 수학적 개념을 설명하는데 고스란히 쓰였다"라고 하니 우리 과학 문화의 실정에서 보면 이 책을 교양 과학서라고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오히려 펜로즈 자신이 서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이 책은 '수학'을 바탕으로 '현대 물리학의 핵심 개념을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매우 훌륭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실체에 이르는 길>(로저 펜로즈 지음, 박병철 옮김, 승산 펴냄). ⓒ승산
펜로즈의 말을 그대로 빌려서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수학적 개념과 물리적 거동 사이의 관계', 즉 수학의 창을 통해서 만물의 물리적 본질을 파악한다면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전반을 흐르는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수학'인 셈이다.

'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포심을 의식해서인지 펜로즈는 친절하게도 이 책을 읽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서 (하지만 여전히 '수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4단계의 각기 다른 수준에서 읽을 수 있도록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1단계

"수식을 볼 때마다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분수 계산에 자신이 없는 독자들"은 "모든 수식을 뛰어넘고 글자만 읽어도 꽤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 중 수식에 가장 둔감한 사람은 아티스트 이휘재이다. (개그맨 이휘재가 아니다. 그가 지인을 통해서 어느 어린 소녀의 이름이 '이휘재'라는 것을 듣고는 자신의 예명으로 쓴 것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진짜 '이휘재'는 선점 당한 자신의 이름 때문에 늘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학을 너무 못했는데 한 번은 과외 선생님이 답답한 나머지 사과를 예로 들어서 '빼기'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단다. '휘재야, 사과가 열 개가 있는데 동생이 세 개를 먹어버렸어. 그럼 남은 사과는 몇 개지?' 이 질문에 어린 이휘재는 이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휘재는 너무 슬퍼요'라고 답을 했단다. 그녀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사과가 열 개인지 세 개인지는 그녀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동생이 사과를 '먹어버렸다'는 설정에 슬픔이 몰려와서 울음을 터뜨려버렸던 것이다.

만약 당신의 숫자 불감증이 이 정도라면 당장 이 책을 덮어버리라고 충고하고 싶다. 펜로즈의 친절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어쩔 수 없는 '수학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약간의 인내심과 호기심이 남아있다면 <실체에 이르는 길>의 차례, 서문, 그리고 제34장 '실체에 이르는 길을 찾아서'만 읽어보더라도 펜로즈의 바람대로 현대 우주론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단계

마찬가지로 "수학과 친하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수학적 내용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설명이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수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텍스트만 읽어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어떤 수학적 개념에 대한 역사적 서술로부터 시작해서 이의 현장에서의 적용 과정에 대한 설명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그 개념의 명확한 확립에 주력하는 방식으로 펜로즈의 글이 반복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3단계

"수학에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수식을 손수 검증할 만큼 열성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책의 하단부에 나와 있는 "문제"를 직접 풀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아이콘으로 문제의 난이도까지 구분해 두었다. 수학에서 "대충 읽는 것"과 "직접 문제를 풀어보는 것"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있다.

무엇이든 '직접'해 보는 것을 당할 재간은 없다. 멋진 그림을 보다가 직접 그리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 손수 그리기 시작했거나 기타리스트의 현란한 손놀림을 동경하다가 결국은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를 불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니아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이 정말 '수학'에 대한 그런 숨은 '열정'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과연 그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장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실체에 이르는 길>이 이런 과정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텍스트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4단계

"수학을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는 전문가층 독자"에게도 문제를 직접 풀어보는 것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평범한 진리, 즉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펜로즈가 서문에서 말하는 '현대 물리학의 핵심 개념을 이해하려는 독자들'이 4단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먼저 나는 몇 단계에 속한 독자일까 생각해 봤다. 4단계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웠고 2단계라고 우기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3단계 독자로서 이 책을 읽어 나기기로 했지만 막상 '문제'를 다 풀어볼 '열정'은 뽑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연습 문제는 풀지 않고 본문에 나오는 수식은 겉치레로 훑어보고 텍스트는 꼼꼼하게 읽는 것으로 타협했다. 결국 '3 -'(3 마이너스) 단계의 독자로 <실체에 이르는 길>을 완독했는데, 생각보다 읽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실체에 이르는 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펜로즈는 물리학적 현상을 기술하는데 필수적인 수학 개념을 설명하면서 <실체에 이르는 길> 제1권의 거의 4분의 3을 할애하고 있다. '수학'에 대한 그의 확신이 앞선 만큼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공이 들어갔고 충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펜로즈는 이 부분에서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기본적인 수학 개념의 역사와 실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공부를 완전히 제쳐놓고 있던 나는 미분적분학 첫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8점을 맞았다. 이공계 학생이면 한번 쯤 골머리를 썩었을 '입실론-델타'라는 난해한 개념의 덫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 후 미분과 적분의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기계적으로 계산만 하는 '미분 기계'가 되고서야 간신히 학점을 딸 수 있었다.

간섭계 전파 망원경을 사용해서 외부은하를 관측해 얻은 자료를 다루면서 복소수함수를 계산하고 사용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대학교 1학년 때나 지금이나 내 자신이 활용하고 있는 '수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무심코 사용만 하던 수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개념과 역사에 대해서 반추해 보는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이 책의 '수학' 개념 설명 부분은 나처럼 무개념의 '미분 기계'였거나 혹은 지금 그 늪에 빠져있는 이공계 학생들이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겨레>의 과학 웹진 '사이언스온'에는 물리학자 이종필이 연재하는 '샐러리맨 전 차장이 아인슈타인이 되기까지'라는 칼럼 코너가 있다. (☞바로 가기) 수학에는 문외한인 평범한 문과 출신의 샐러리맨 전 차장은 휴가를 내고 호주로 천체 관측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들른 호주국제중력관측소의 벽에 걸려있던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field equation)을 보고 큰 감흥을 받았다.

이때부터 전 차장은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지 100주년이 되는 2015년까지 자신이 이 방정식을 직접 풀어보고 이해하겠다는 '원대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공부해야한다는 이종필의 조언에 따라서 전 차장을 포함한 '수학'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고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공부하는 감동적인 과정이 이 칼럼에 소개되고 있다. <실체에 이르는 길>은 전 차장과 같이 숨은 '수학적'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찾고 있던 바로 그 텍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실체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부분은 수학적 개념을 밑바탕으로 현대 물리학의 양대 산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소개하고 현대적인 표준우주론에서 말하는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광활한 우주 시공간을 거시적으로 기술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이 필요하고 우주 초기의 아주 작은 시공간을 묘사하는 데는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두 이론이 떠받치고 있는 현대 표준우주론의 대표 주자인 빅뱅우주론에 수학적 물리학적 설명은 그나마 내게는 제일 익숙하고 상대적으로 복습하듯이 편안하게 읽었던 부분이었지만 이 부분에 등장하는 수학적 개념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여전히 벅찬 느낌이었다. 이 부분에서의 펜로즈의 서술은 책의 앞부분에서 수학의 기본 개념을 독창적으로 설명하던 것과 비교하면 다른 책들의 내용과 큰 차이 없이 다소 의례적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다만 다음에 인용하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양자역학보다는 상대성이론에 더 큰 신뢰를 보내는 펜로즈의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점이 어느 정도 도드라질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이론 하나를 꼽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을 선택할 것이다.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이론(그리고 양자장이론)을 최고의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일반상대성이론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걸쳐 다양한 자연 현상들을 설명해 주긴 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이론 체계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29장에서 논했던 '측정역설'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서 위 내용을 부연 설명을 하면 이렇다. 결국 양자역학은 미완의 이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고 전적인 신뢰를 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건 간에, 양자역학의 U-과정을 '우주를 서술하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한 결국은 다중세계해석 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다중세계관점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의식을 가진 관측자'라는 존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관측자가 인지한 '실체'는 '관측자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어서, 관측자에게 어떤 상태가 허용되는지를 모르면 어떤 실체 상태(외부 세계)가 허용되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는 우리에게 객관적인 객체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관측자의 의식이 무수한 양자적 중첩 중에서 어느 쪽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의식을 가진 관측자를 적절하게 서술하는 이론이 없는 한, 다중세계해석은 미완의 이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사족을 달자면, 펜로즈의 이러한 비판적 견해는 최근 들어서 양자역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예컨대 <위대한 설계>에서 도전적인 다중우주론을 펼친 그의 오랜 동료 스티븐 호킹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프레시안 books' 17호(2010년 11월 26일자)에 소개되었던 변호사 금태섭의 서평에세이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관련 기사 : "서울대 필독 도서? 교수님은 몇 권이나 읽었나요?")

"용기를 내서 물리학과 대학원 홈페이지에 여름방학 동안 물리학 기초를 공부하고 싶은 법학 전공의 공무원(당시 공무원이었다)에게 개인 교사를 해 줄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기대를 갖고 한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후배를 통해서 물리학과 대학원에 알아봤는데, 법학 전공자가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냥 포기하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쓴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만약 친절한 전공자를 만났다면 무식한 법학도의 인식의 폭을 넓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든다."


만약 당신이 금태섭처럼 교양 과학책을 읽다가 자생적으로 궁극적인 물리학적 지식에 대한 배움의 욕망이 생겼다면, 현대 표준우주론을 개관하여 기술해 놓은 <실체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부분이 배움을 얻는 하나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현대 우주론의 기둥인 양자역학-상대성이론의 패러다임을 깰 수 있는, 하지만 여전히 수학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다른 급진적인 대안 이론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흥미로운 초대칭, 끈 이론, 초끈 이론, M-이론, 그리고 트위스터 이론 같은 최신 물리학 이론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내가 제일 자신이 없고 낯선 분야이기도 해서 펜로즈 같은 대가가 전체 숲을 보듯이 정리해 놓은 최신 물리학 이론에 대한 해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뭇 흥분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펜로즈는 단순한 해설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엄밀한 과학적 타당성과는 상관없이 이들 이론들 중 특정 이론(예컨대 끈 이론)에 연구자들이 집중되는 현상을 꼬집으며 과연 과학자들이 한때의 '유행'에 휩쓸리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지 반문한다. 또한 이들 이론이 '측정'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기 보다는 '수학적' 완결성에 매몰되는 현실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아무리 대단한 이론이라 해도, 물리적 사실(궁극적인 관측 결과)에 우선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진실은 이론이 아닌 실험 결과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실험이나 관측 결과에 부합되지 않는 이론은 수학적 체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과학의 전당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한편, 정작 이 책의 또 다른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는 펜로즈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자신의 트위스터 이론을 은근히 가능성이 큰 대안 이론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노학자의 호기가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반갑다. <실체에 이르는 길>의 세 번째 부분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단순한 대안 이론 소개에 그치지 않고 이들 이론에 대해서 펜로즈가 자신의 견해를 곁들인 과감한 비평을 가했다는 점에 있다. 약간은 상기된 그의 이야기를 낯선 감성으로 읽어내는 재미가 있었다. <실체에 이르는 길>은 최신 물리학의 대안 이론들을 다소 편견이 담긴 해설로 담아낸 비평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펜로즈가 이 두꺼운 책을 통해서 '수학을 통해 실체에 접근하는 긴 여정'을 거친 후 도달한 결론은 무엇일까. 다소 시시하고 허무하게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지난 2500년 동안, 그리고 특히 지난 수백 년 사이에 과학이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체에 이르는 길'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길을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는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인 '실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듯하다. 부족하지만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물리적 실체'를 파악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고 이를 대신할 여러 이론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무엇'과 '왜'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결국 물리적 '실체'를 찾는 길은 바로 이 실체에 대한 '무엇'과 '왜'라는 이런 질문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체에 이르는 길>은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면서 더 심오한 질문이 제기'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긴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극복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끊임없이 '물리적 실체'를 찾아 나서게 하는 진짜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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