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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원, '을사5적' 못지않은 '병술23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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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의원, '을사5적' 못지않은 '병술23적'

[해방일기] 1946년 2월 18일

1946년 2월 18일

군정청, 3월 1일을 국경일로 결정 발포

기보한 바와 같이 3월 1일 독립 선언 기념일을 국경일로 정하는 데 있어서 조선에 있는 미군사령부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2월 18일부로 다음과 같이 제 2호를 발포하였다.

"재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추천으로 1946년 3월 1일을 경축일로 정함. 이 경축일은 일본의 압박과 지배를 기쁘게 벗어나 대한 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후 제 27회의 기념일이다. 이날은 대한 독립의 대의에 순사한 애국 열사를 추념하기 위하여 봉정된 것이다. 이날에는 대한 민족의 꽃과 같은 영광을 누릴 자유와 민권의 신 대한을 세운 순국열사 제위를 선조와 함께 전 대한 민중은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21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군정청이 국경일을 결정한다? 그것도 남반부의 군정청이? 미·소군의 한반도 진주는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정부 노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 군정청이 한국의 국경일을 결정해? 주제넘은 짓이다.

군정청이 무슨 근거로 이런 짓을 했나? "민주의원의 추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2월 14일 개원한 민주의원은 이 날 제2차 회의를 열고 있었다. 민주의원은 어떤 기구인가? 비상국민회의의 두 영수 김구와 이승만이 뽑은 28인의 최고정무위원회에 비상국민회의 쪽의 아무런 공식 조치 없이 '민주의원'이란 이름을 붙여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구로 만든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김구와 이승만의 사조직을 하지의 자문 기구로 제공한 것이다. 28인 중에서도 조직원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그런 기구에서 '의결'이란 것을 한다면 의장 선출 등 자기네 조직 운영이나 하면 된다. 일제 시대의 자동차 좌측 통행을 우측 통행으로 바꾸도록 미군정에 건의할 것인지 정도는 의결해도 좋다. 3·1절 기념 행사에 공헌하고 싶다면 교통, 차량 통제 등 실무적인 일에나 신경 써주면 된다. 국경일 지정을 군정청이 결정해 달라고 나선다는 것은 '을사5적' 못지않은 '병술23적'이다. (2월 14일 회의 참석자는 李承晩, 金九, 金奎植, 金俊淵, 李義植, 白寬洙, 崔益煥, 金法麟, 金度演, 金麗植, 朴容羲, 張勉, 趙琬九, 黃賢淑, 白南薰, 白象圭, 權東鎭, 黃鎭南, 元世勳, 金善, 金朋濬, 安在鴻, 吳世昌.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은 불참.)

23인 모두가 권력과 출세만 생각하며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며 주어진 상황에서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경일 결정을 미군정에게 추천하다니! 이 가운데 내가 존경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행위 하나만은 용서할 수 없다.

명분에만 그치는 일도 아니었다. 민족 단합의 계기가 되어야 할 해방 후 첫 3·1절을 분열과 대립의 무대로 만드는 뜻이 민주의원의 이 조치에 있었다. 기념행사의 주관을 헤게모니 쟁탈전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김구-이승만 진영에서는 1월 25일부터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기미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기념행사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참여한 20여 단체 중 정당은 한국민주당(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과 민중당이었다. 다른 단체 중에는 반탁학련 등 '반탁'을 내건 단체들이 많았다. 비상국민회의에서 좌익을 배제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우익 단합 대회로 만들려는 의도로 보인다.

뒤이어 좌익 쪽에서도 이에 맞서 3·1기념투쟁위원회(3·1위원회)를 구성하고 따로 기념행사를 추진했다. 양측 모두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자 기념행사 통합을 위한 회담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7일 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인민당 공산당과 서울시인민위원회, 6개 단체 대표가 모였으나 명예의장 추대 문제에서 걸렸다.

기미대회 준비위에서는 김구와 이승만 2인을 명예의장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좌익 측에서는 독립 선언 서명자 33인 중 정계 원로로 남아있는 권동진과 오세창 두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4인을 모두 추대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김구와 이승만 2인만을 고집했다.

이 의논은 2월 12일 조선민주당과 독립동맹이 가세한 7당 회담까지 이어졌는데, 이 회담에서 한민당과 국민당을 제외한 5개 정당의 공동 성명이 나왔다.

우리 민족이 포악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투쟁을 개시한 첫 날이며 피를 흘리며 싸운 역사적 3월 1일을 해방된 오늘 전 민족이 한 뭉치가 되어 성대히 기념코자 벌써부터 이에 대한 준비가 진척되어 오던 중 12일 한국민주당, 인민당, 조선공산당, 국민당, 독립동맹, 신한민족당, 조선민주당 등 일곱 정당의 대표들이 신한민족당 사무소에 모여 협의한 결과 3·1 기념행사를 통일하여 전 민족적으로 성대히 거행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다음과 같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그중 한민당, 국민당은 제외)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 공동 성명

1) 3·1 기념은 조선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 민족적 항쟁의 첫날이다. 그러므로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000만 전 민족이 다 같이 이날을 기념하여야 할 것.
2) 3월 1일 기념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결성된 양 기성 준비회(기미독립선언기념국민대회 及 3·1기념투쟁위원회)는 동 기념을 의의 있게 함과 동시 민족 통일 촉성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고 기념행사 일체를 전기 5정당에 일임할 것
3) 5정당은 각당 2인씩 위원을 선출하여 새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되 제 대중단체 及 종교단체를 광범히 참가케 할 것
4) 대회의 명예의장은 독립 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으로 하되 일제 지배 하에 변절하지 않은 분 중에서 추대하기로 할 것 (<서울신문> 1946년 2월 16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인 출신의 권동진(1861~1947년)과 오세창(1864~1953년)은 80대 고령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진영에서 원로의 역할을 맡아주고 있었다. 2월 14일의 민주의원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안 되고 김구와 이승만이어야만 한다니! 12일의 7당 회담에서 다른 당은 몰라도 권동진을 당수로 모시고 있던 신한민족당은 예절 때문에라도 한민당에 동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주의원의 군정청을 통한 국경일 추진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3·1절 기념식을 비상국민회의 영수 김구와 이승만의 권위를 높이는 행사로 만드는 데 군정청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3월 1일 양쪽 기념식이 따로 열리고 있을 때 반탁학련 학생들은 좌익 집회장 어귀에서 트럭에 타고 스피커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러분은 속고 있다. 이것은 찬탁을 주장하는 민족 반역자 공산당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서 발을 돌리시어 서울운동장에 갑시다. 그곳에서는 우리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말씀을 들읍시다. 거기서 3·1 정신을 기립시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 227쪽에서 재인용)

행사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보다 못해 언론사들이 나섰다. 양측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 따질 것 없이, 무조건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거부하는 측의 행사는 보도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극우의 선봉 <대동일보>는 보이지 않지만 <동아일보>까지 끼어 있어서, 여론의 압력이 어떠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국경일 3·1절은 3000만이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념식을 거행해야겠는데 동 기념준비회가 두 단체이므로 이것을 촉진하여 통합하고자 시내 각 신문사에서는 26일 오전에 두 준비단체에 통일안을 전달하고 단시간 내에 회답을 요청하였다는데 통일안은 다음과 같다.

가. 3·1과 기미 두 준비회는 그대로 두고 당일 기념행사만은 같이 거행할 것
나. 두 기념준비회의 행사를 집행할 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식과 시가행진 순서를 적당하게 배정할 것
다. 기념식전을 거행할 인원은 동수로 하되 대표는 개인 자격으로 할 것
라. 본회의 제안인 독립선언기념행사 통일안을 승낙치 않는 편에 대해서는 금후 기사 보도를 일체 거부함
1946년 2월 25일 자유신문 조선통신 중앙신문 한성일보 공립통신 코리아타임스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서울타임스 합동통신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2월 2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우익의 기미대회 측은 13개 언론사 연명의 이 제안까지 거부했다.

독립선언기념행사 통일을 위하여 26일 서울시내 13일간·통신 신문 대표자회의에서 4개 항목의 통일안을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와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준비회에 제의하였던 바 3·1기념회에서는 즉일 전적 승인의 회답을 하여 왔으나 기미독립기념회에서는 간부회 통과를 이유로 회답을 1일 연기하였음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기미독립기념회에서는 27일 드디어 통일안을 거부하는 불승인 회답을 보내 왔으므로 신문 통신 대표자회에서는 당초 기정한 방침에 순응하여 단호한 태도로서 매진하려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27일 발표하였다.

◊ 성명문 요지
해방 후 처음 맞는 3·1기념일을 앞두고 저간 이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단체가 양분되어 진행되고 있음은 민족적 기념일의 모독이오 건국도상의 큰 불상사임을 통탄히 생각한 나머지 일간신문 통신 13개사 대표는 지난 25일 서울신문사에서 회동하여 최후적 합동안으로 독립선언기념행사 통일안을 작성하여 3·1측과 기미 측 양 준비회에 제안 권고하였던 바, 동 26일 3·1측으로부터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였고 기미 측으로부터는 27일 오후 2시 해회 전체회의에서 토의 결정하여 태도를 표명하겠다는 회시가 있었다. 본회로서는 기념일을 전기하여 기념행사 보도의 최선을 다하고자 시간 관계상 모든 지장을 무릅쓰고 회답의 1일 연기를 묵인하였던 바 기미 측에서는 드디어 27일 오후 3시 30분 본회의 제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문서를 제시하여 왔다. 본회가 저간에 있어 가장 공평 타당한 견지에서 정당한 통일안으로 확신하고 제의한 데도 불구하고 동회와의 교섭 경과로 보던지 회답 문서의 내용으로 보던지 기미 측에서는 통일에 관하여 미진의 성의를 발견할 수가 없다. 본회는 기념행사 분열의 책임이 기미 측에 있음을 확인하고 민족적 치욕을 자초하는 기미 측의 고립적 행동을 탄핵하는 동시에 본회는 소정 통일권고안 제4항을 玆에 실시키로 성명한다.

1946년 2월 27일 자유신문 조선통신 중앙신문 공립통신 조선인민보 서울타임스 합동통신 동아일보 코리아타임스 서울신문 한성일보 조선일보 (<조선일보> 1946년 2월 2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절 기념행사는 결국 남산공원과 서울운동장에서 따로따로 열렸다. 대부분 신문은 약속대로 서울운동장 행사의 기사를 싣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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