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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에서 막힌 독립동맹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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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에서 막힌 독립동맹의 역할

[해방일기] 1946년 2월 17일

1946년 2월 17일

초기의 북한 노동당에는 빨치산파,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의 네 개 큰 인맥이 있었다.

빨치산파는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무장 항쟁을 벌이다가 1940년대 들어 소련으로 피신, 소련극동군에 편입되어 있다가 해방을 맞은 집단으로, 해방 후 귀국한 교민 출신의 소련파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소련파에는 큰 명망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해방 직후의 이북 공산당(북조선분국)에서는 빨치산파와 국내파가 양대 인맥이었고,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에 조선신민당(신민당)이 합류해 연안파가 되었다.

1946년 2월 신민당을 만든 것은 독립동맹 인사들이었다. 1942년 7월 중국 화북 지방에서 결성된 독립동맹은 중경 임정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실질적 독립운동에서는 오히려 더 활발한 모습을 3년 동안 보였다. 중국공산당에 의지해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통일 전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에 공산당원이 아닌 민족주의자 김두봉(1889~1961년)이 주석으로 독립동맹을 이끌었다. 김두봉은 해방 후 귀국을 앞둔 시점에서야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독립동맹 인사들은 조선의용군 4개 대대를 이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9월 3일 연안을 출발해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압록강변에 도착했다. 5000리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북의 소련군이 의용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대부분의 의용군은 중국에 머물러 중국공산당의 해방군에 참여했고, 비전투 인원만 입국했다.

역사에서 '만약'을 얘기하지 말라고 하지만, 조선의용군이 무장은 해제하더라도 조직을 갖춘 채로 입국했다면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상상하면 가슴이 뛰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독립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그만큼 강한 세력이 해방 공간의 국내에 존재했다면 미·소 점령군과 대등한 위치는 아니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임정 인사들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도 독립동맹-조선의용군과의 협력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족 통일 전선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을 것이다.

군대 없이 입국하고도 독립동맹은 민족 통일 전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 기대되었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양쪽의 신뢰와 존경을 모으는 주석 김두봉을 상징으로 한 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과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초당파적' 위치로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독립동맹의 큰 역할은 38선 이북에 국한되었다.

이북의 공산당에서 국내파에 맞서 통일 전선과 대중 노선을 중시하고 있던 김일성 일파가 독립동맹의 존재에서 힘을 얻었다고 찰스 암스트롱은 본다.

조선공산당이 대중 노선을 추진할 수 있었던 요소에는 이른바 '연안파'의 영향도 있다. (…) 마오쩌둥의 농민 대중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고 실제로 중국 혁명을 경험한 연안파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민족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매우 명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1946년 2월 말 '조선신민당'이란 이름의 정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최창익은 '조선 민주 운동'의 해방 이전 역사를 논의하는 1946년 팸플릿을 통해 계급 투쟁을 민족 투쟁으로 효과적으로 흡수시켰는데, 이러한 경향은 북한 이데올로기의 이정표가 되었다. (…) 그는 조선에서 계급 투쟁의 언어는 반식민주의 민족투쟁의 언어라고 주창했다. (<북조선 탄생>, 111~112쪽)

김일성 일파는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과의 관계에서도 협력 관계 구축에 많은 공을 들였다. 김일성 자신이 조만식에게 창당을 권유했다는 말도 있고, 측근인 최용건이 조선민주당에 참여했다. 1946년 초 조만식이 강력한 반탁 주장으로 소련군에게 연금당하고 그 지지자들이 조선민주당을 떠나거나 쫓겨난 사태는 지금까지 본 몇 권의 참고 서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공산당북조선분국이 1946년 초부터 '북조선공산당'이란 이름을 쓴 것은 서울의 중앙에 예속되지 않는 별도의 중앙을 자임한 것이었고, 김일성 일파의 주도권 장악을 비춰 보여준 것이다. 국내파는 박헌영 일파의 '법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 일파에게 독립동맹(신민당)은 몰락한 조선민주당 대신 가장 중요한 협력 상대가 되었다. 2월 초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에서 두 당의 협력이 중심축이 되었다. 이 중심축 위에서 농촌 지역에 기반을 가진 천도교 계통의 청우당도 포용되었기 때문에 임시인민위원회 체제가 북한 정치계의 거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조회를 위해 간간이 이용하는 <네이버백과>와 <위키백과>의 관련 기사들을 보면 신민당이 반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재하지 못한 채 소련 측 압력으로 인해 노동당에 합쳐진 것으로 대개 적혀 있다. 신민당의 역할을 축소해서 보는 것이다. 소련과 김일성의 의지를 북한의 모든 현상의 근거로 보던 냉전·반공 시대의 시각이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통합된 북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장을 김두봉이 맡았을 뿐 아니라 위에 인용한 암스트롱의 말대로 최창익도 이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등 초기 노동당에서 연안파는 당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흡수 통합이 아니라 대등한 통합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원 자격을 까다롭게 하는 전위정당 공산당에서 대중정당의 성격이 강한 노동당으로의 이동이 가진 중요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산당이 흡수된 것으로 볼 만한 측면도 있다. 노동당 통합에 이르는 이북의 정치 개편 과정에서 독립동맹-신민당의 역할은 능동적인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 방침이 정해진 1월 하순 독립동맹은 부주석 한빈을 서울에 보내 이남 지지 세력의 조직을 시도했다. 중립적 성향의 <서울신문>은 독립동맹 서울특별위원회 설립을 보도하며 대단히 큰 기대감을 표명했다.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한빈의 입경 이래 그 동정은 각 방면으로 주목되고 있는 바, 지난 5일 저녁 시내 가회정에서 조선독립동맹 서울특별위원회 설립준비회를 개최하고 38도 이남에 있어서의 독립동맹의 정치적 활동은 근근 표면화할 동 서울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키로 결정한 후 다음과 같이 위원을 선정하였다.

위원장 : 白南雲 조직부장 : 沈雲 동 차장 : 成大慶 선전부장 : 高贊補 동 차장 : 朴東喆

일반이 주지하다시피 8·15 전 우리의 조직된 혁명적 군사력으로써 일본 군국주의에 영웅적 항전을 계속하여 온 동맹이 있거니와 이와 같이 실력을 구비한 독립동맹이 환국 이래 오랫동안 지켜오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38도 이남에서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기로 되었다는 것은 크게 기대되는 바가 있다. 우리가 독립동맹에 기대하는 바는 결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개중에도 절실히 기대되는 것은 좌우 양 진영의 첨예화한 대립의 와중에서 점하는 바, 독립동맹의 비교적 초당파적인 정치 성격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독립동맹은 막부 삼상 회의 협정 지지를 천명한 바 있어 세간의 일부에서는 혹종의 의혹을 품는 경향도 없지 않은 모양이나 그러나 삼상 회의 지지만을 이유로 좌경을 운위함은 속단이라고 할 것이다.

추상컨대 독립동맹이 삼상 회의를 지지하게 된 소이는 조선을 민주주의적으로 건국함에는 미소의 힘의 균형 하에서 결정된 조선 문제에 관한 막부 협정을 시인치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주로 외교적인 결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삼상 회의에 대한 태도의 결정을 가지고 곧 좌익이니 우익이니 규정함은 냉정을 잃은 신경질적 견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당 어느 단체이든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결정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무릇 조선의 정당, 조선의 정치가는 탁치를 반대하는 것만으로 능사로 삼을 것이 아니요 탁치니 후견이니 하는 반갑지 않은 국제적 후원을 객관적으로 불필요 또는 무의미화할 수 있도록 하루바삐 자율적으로 통일 전선을 결성하는 것이 최급이오 문제해결의 관건이라고 생각된다.

자율적 통일을 못하고서 탁치를 반대하느니 자주 독립할 역량이 있느니 말하는 것은 연합국에 대하여 도저히 수긍시킬 만한 입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탁치를 시급히 철폐하는 것도 其餘의 모든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오로지 자율적인 통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으로 통한 미소의 국제 정치 노선을 보나 국내 실정으로 보나 우익만의 또는 좌익만의 단일 정권이 설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실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으로 통일 못하고 중국과 같이 타력으로 통일된다면 이는 조선 정치인으로서 불식할 수 없는 수치라는 견지에서 통일이라는 전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용감히 혼란 무쌍한 현 정국에 등장한 것이 독립동맹 서울특별위원회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동 특별위원회에서는 정치 상층 면에 있어서는 좌우 협조, 민족 통일 전선 결성에 강력히 매진하는 동시에 대중운동으로서는 38도 이남의 진보적인 중간층을 총망라 포섭하는 조직 활동도 전개하리라는 바, 그 발족은 좌우 양익의 무비판적 대립 격화로 인하여 모래를 씹는 것과 같은 불쾌감이 있는 현 정국에 명랑한 활기를 주입할 것이 기대된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제사학자 백남운(1894~1979년)이 서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것은 김두봉과의 개인적 친분과 신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남운은 1925년 연희전문 부임 이후 사회경제사 연구를 통해 마르크시즘 이론의 권위자가 되었다.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하면서도 민족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앞세운 그의 정치 노선은 중도 좌파를 위한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서울신문>에 4월 1일부터 13일까지 연재한 "조선 민족의 진로"를 서중석은 "통일 전선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 운동의 이론적 틀"로 중시하여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에 상세히 소개했다. (366~377쪽)

그러나 평양에서 신민당과 공산당이 생산적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서울에서 백남운은 공산당의 극단적 배척을 받았다. 그해 11월 공산당과 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을 만들 때 그는 참여하지 않고 여운형과 함께 정계 은퇴를 성명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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