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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순사보다 더 악독한 남한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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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순사보다 더 악독한 남한 경찰

[해방일기] 1946년 2월 11일

1946년 2월 11일

법령 제21호

제1조 법률의 존속
모든 법률 또한 조선 구정부가 발포하고 법률적 효력을 有한 규칙, 명령 고시 기타 문서로서 1945년 8월 9일 실행중인 것은 其間 이의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 조선군 정부의 특수명령으로 폐지할 때까지 全 효력으로 此를 존속함. 지방의 제반 법규와 관례는 당해 관청에서 폐지할 때까지 其 효력을 계속함.
법률의 규정으로서 조선총독부, 도청, 부, 면, 촌의 조직과 국장, 과장, 부윤, 군수, 경찰서장, 세무서장, 면장, 촌장, 기타 하급 직원에 관한 것은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개정 또는 폐지된 것을 제하고 당해 관청에서 폐지할 때까지 此를 존속함. 상사의 지령에 종하여 종래 조선 총독이 행사하는 제반 직권은 군정장관이 행사함을 得함.

제2조 포고, 법령, 지령의 시행
북위 38도 이남 조선의 모든 재판소는 조선의 법령, 미국태평양육군총사령관의 포고의 제 규정 及 조선군정장관의 모든 명령 及 법령을 주의 시행할 事. 此 목적을 위하여 여사한 모든 재판소로 玆에 육군점령재판소를 구성함. 본령의 조문에 의하여 여사한 재판소에 미국 또는 연합국의 군인 또는 관리에 대하여 재판 관할권을 부여하든가 또는 재 조선 미국 육군이 설립한 군정위원회, 헌병재판소 기타 육군재판소에 부여한 재판 관할권을 박탈치 못함.

제3조 본령의 실시 기일
본령은 1945년 11월 2일 야반에 효력을 발생함

1945年 11月 2日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A. B. 아놀드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식민지 시대의 법률 체계와 그 시행 기관인 재판소를 온존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북의 소련 점령군이 일본 지배 체제를 해체하려고 노력한 것과 달리 이남의 미군은 일본 지배 체제를 그대로 두고, 다만 그 운영자인 일본인만을 축출했다. 일본인이 비운 자리 중 꼭대기 부분은 미군으로 채우고 아래 부분은 한국인에게 맡겼다.

법의 집행 기관인 경찰도 마찬가지로 온존되고, 다른 통치 기구와 마찬가지로 꼭대기 자리는 미군이 맡았다. 그러나 경찰은 수만 명에 이르는 그 크기 때문에 20여 명 배속 미군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10월 초부터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큰 역할을 맡긴 것은 미군의 직접 통솔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경찰이 미국 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전국적 '동일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최소한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경찰을 상명하복의 '동일체'로 만들지 않는다. 전국적 '동일체'로서의 경찰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권력의 도구가 되는 반면 분권화된 경찰은 소속 지역사회 주민의 만족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통치자를 위한 국가 경찰이냐, 국민을 위한 민주 경찰이냐 하는 차이다.

미군정은 각도 경찰부장이 도지사 아닌 경찰국장의 지휘를 받게 함으로써 식민지 경찰 체제의 근간을 지켰다. 민주 경찰의 개념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좌익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경찰을 택한 것이다. 미군정 사관은 한국에서 국가 경찰 채택의 이유를 이렇게 열거했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3쪽에서 재인용)

1. 비상사태나 재난 시 얼마든지 많은 수의 경관을 즉각 현장에 동원할 수 있다.
2. 경찰 내의 관할권 문제나 일상적 분쟁을 회피한다.
3. 정치적 영향을 배제한다.
4. 일률적 훈련과 공정한 법 집행이 보장된다.
5. 경찰이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특정한 [정치]단체에 참여할 가능성을 줄인다.
6. 많은 지역사회에 최대한의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
7. 불온한 움직임에 관한 사찰 정보가 지역 조직의 서류함에 파묻혀 있지 않고 평가되고 유통된다.

그럴싸한 표현으로 수식되어 있지만, 모두 통치자 입장의 이점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중시되는 이점이고, 바로 일본 통치자들이 염두에 뒀던 이점이다. 미군이 한국인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경찰 운영 방침이었고,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피부로 느껴진 일이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 97~98쪽에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 대목을 인용해 놓았다.

순천을 점령한 미군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일정 시대 경찰 근무자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미리 알아 어딘가로 도망을 간 그들을 찾아내려고 미군들은 소란을 피워댔다. 삐라를 뿌리고, 다른 지방으로 피한 사람을 지프차로 실어오고, 산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미군들이 산으로 들어가고 하는 소란들이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채용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런 미군의 처사에 반발하는 한편 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미군정의 식민 경찰 복원 작업은 10월 중에 이뤄졌다. 장택상은 10월 7일, 조병옥은 18일(또는 20일)에 채용되었다. 17일에는 헌병사령관 보좌관 마셜 중령이 지방 경찰을 순시하고 돌아와 경찰력 강화 방침을 밝혔고(<매일신보> 1946년 10월 17일자), 19일에는 경기도 경찰부장이 종래의 고등과를 없애고 정보과를 설치한다고 밝혔다.(<매일신보> 1946년 10월 20일자) 이름만 바꿔서 사찰 기능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11월 3일에는 경찰 급여를 결정했다.

10월 26일에는 조병옥 신임 경찰부장이 경찰 행정 일신의 포부를 밝혔다.

20일부로 발령된 군정청 경무부장 趙炳玉(※註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임명사령 제22호에 의하여 경무국 경무과장에 임명되다)은 26일 군정청 출입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포부를 말하였다.

"조선의 경찰 행정을 새롭게 꾸미고 통일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 하겠는데 신 국가를 건설해가는 과정에 있어 우리는 군정하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이번 경무부장은 경무국장 대리라는 중임으로 내 자신의 포부도 있고 함으로 단순한 통역관이나 기계적인 역할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경찰 본래의 사명은 치안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있으므로 종래 일본주의적인 압박과 위협 공갈의 기관일 수 없으며 종래 조선 민족의 의사를 말살시켰거나 인권을 유린한 자 혹은 직책 이상의 권리를 남용한 경관은 점차로 숙청하여 민중의 순전한 협력자인 경관을 배치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지 사령관 등 여러 당국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경찰 개혁을 언명했다. 그러나 1946년 2월 11일 현재까지 구체적 조치는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11월 8일에 패검 대신 곤봉을 착용한다는 결정이 있었지만 1월 10일자 <동아일보>의 "경찰의 복장과 직명 바꿈" 기사를 보면 간부 이상은 계속 사벨을 차게 하고 있었다. 2월 1일의 직제 개편이 경찰이 겪은 가장 큰 변화였다.

전날의 압박 경찰 제도에서 단연 탈각하여 새로운 건설 조장과 치안 확보의 중책을 다하고자 군정청 경무국에서는 내용은 물론 각 부문의 명칭부터 갈도록 하여 책무를 다하기로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경무국장 관할 아래 총무부·경무부·형사부·통신부·소방부 등 5부를 두고 각 도에 경찰부장과 차장 감찰관을 두며 그 밑에 통신과·교통과·수사과·공안과·문서과·총무과·소방과가 있고 각 경찰서가 있어 그곳 행정기관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民政을 원활하게 하도록 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경찰부장 : 금빛 무궁화 넷을 어깨에 달아 표시한다.
同 차장 : 금빛 무궁화 셋을 어깨에 달아 표시한다.
총경 : 금빛 무궁화 둘을 어깨에 달아 표시한다.
감찰관 : 금빛 무궁화 하나를 어깨에 달아 표시한다.
경감 : 경시와 같은 것으로 은빛 무궁화 둘을 어깨에 단다.
경시 : 경무보로 은빛 무궁화 하나를 단다.
경사 : 현 순사부장으로 팔에 ≪ 표시를 단다.
순경 : 현 순사로 아무런 계급 표시는 없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1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런 피상적 변화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친일파와 악덕 경찰관의 숙청도 입만 떼면 의지를 밝히지만 실제 조치는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2월 13일에야 모처럼 한 건 올렸다.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경기도 경찰부, 악질 친일 경찰 구속"이라는 제목의 큼직한 기사가 오른 것이다.

경찰계 숙청의 제3탄, 앞서부터 도 경찰부에서는 테러, 강도 사건 이외에 대내적 숙청을 단행하여 田 보안과장 사건을 필두로 安城경찰서 간부 등 9명을 인치 취조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 고등계원으로 민족 반역의 좋은 표준이 되는 본정서의 경부보를 구속하고 엄중 조사 중이다.

그는 8·15 이전 민족 해방 운동을 하던 분은 누구나 잘 아는 芝田健次郞(金成點, 45) 형사이다. 芝田은 10여 년 동안 고등계 형사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선열들의 운동을 방해하였을 뿐더러 모진 매와 고문으로 가장 못되게 굴던 자이다. 그가 함경북도 경찰부에서 조선어학회사건을 직접 맡았을 때 어찌나 심하였던지 李允宰, 韓澄 두 분을 죽였을 뿐더러 李克魯 이하 어학회원들을 반신불수가 되게 한 자로 함북에서 경기도로 와서 齊賀 경부 밑에서 온갖 친일을 다하였는데 버젓하게도 해방 후는 본정서에서 경부보로 근무하다가 다시 제 버릇 개 못주는 격으로 시내 森이라는 일인 전당포 주인을 협박하여 30여만 원을 사취한 일로 인치된 것이다. 그는 어학회의 金允經이 일전에 함흥에서 심한 고문 받던 이야기를 라디오 국어 강좌에서 말한 일이 있자 일시 피신을 한 일도 있었다니 죄책을 느끼는 모양이다.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친일파라서 숙청한 게 아니라 사취 사건으로 잡아넣고 보니 마침 두드러진 친일파였던 것이다. 이극로 같은 피해자가 정치계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도 사취 사건 같은 것 터지지 않으면 숙청될 염려 없이 지냈던 모양이다. 기사 중 "田 보안과장 사건"은 자유당 시대의 대표적 정치 군인이 될 전봉덕의 문제가 그 전날 발표된 것이다. 역시 친일 문제가 아니라 독직 사건이었다. 이 정도가 당시 경찰의 자정 능력 수준으로 이해된다.

張 경기도경찰부장은 12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학병동맹 사건
이 사건은 여간 중대한 것이 아니니만치 착수하기까지 오랜 시일을 두고 내사하여 확실한 증거를 수집한 뒤 서 간부 2명 순사 9명을 검거 취조 중인데 건국 도정의 치안을 맡은 경찰관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갖은 비행을 다하였는데 단호히 처벌할 터이다. 취조에 따라서는 사건이 확대되어 다른 간부에까지도 파급될지 모른다. 직권을 남용하여 민중을 못살게 군 경찰관은 어디까지나 적발하여 단호히 처벌하겠다.

◊ 무기 압수 사건
며칠 전 서울 시내 수처에서 교묘한 무기 다수를 압수하였는데 배후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는 듯하여 조사 중이다.

◊ 田 보안과장 사건
구금된 전봉덕 씨는 서대문서에 유치시켜 검사국과 연락하여 취조 중인데 죄상은 파렴치죄로 속속 탄로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1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월 5일의 국군준비대 습격과 1월 19일의 학병동맹 습격은 장택상이 지휘한 경찰의 만행이었다. 특히 학병동맹 습격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무리한 실상이 많이 드러나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잡아떼기로 일관하던 장택상도 어쩔 수 없이 '아랫것들' 몇을 잘라 버리기에 이른 것이었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6~167쪽에는 경찰국 수사과장 최능진(1899~1951년)이 1946년 11월 20일 한 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의 몇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경찰국이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겨난 부패분자들을 비롯해) 일본의 훈련을 받은 경찰관과 반역자들의 도피처"가 되어 있으며, "(조병옥은) 내가 애국자와 독립운동가들을 경찰에 채용하려는 것을 끊임없이 반대한다"고 했다. "매일같이 단순한 사감 때문에 아무 증거 없이 체포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가 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만 하면 그냥 감옥에 끌려가 두들겨 맞는 것이다"라는 증언도 있었다.

이렇게 경찰의 문제점을 내부에서 지적한 사람이 어떻게 됐냐고? 일제하의 투옥 경력이 있고 미국 유학으로 영어에 능통하던 최능진은 많은 군정 당국자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결국 조병옥에게 밀려났다. 1948년 5·10 선거에서 하필이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가 투표 이틀 전에 후보 등록을 취소당했다. 몇 달 후 쿠데타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 전쟁 중 군법회의 판결로 총살당했다. 2009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의 처형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친일 경력도 모자라 파렴치죄로까지 걸려든 전봉덕은 출세의 길을 걷고, 일대의 애국 인재 최능진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그런 세상을 향해 미군정 하의 남한은 움직여가고 있었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 덧붙인다. 식민지 시대 말기 전 조선의 경찰력은 2만 명이었는데 1946년 10월까지 남한 경찰력은 2만5000명이었다. 남한만 놓고 보자면 갑절로 늘어난 것이다(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4~166쪽)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1월 중순까지 인민위원회가 운영한 경찰서 인원이 38명이었는데 미군정이 경찰서를 넘겨받은 후 3월 말까지 인원이 85명으로 늘어난 사실을 45년 10월 28일자 일기에 적었다.

해남군만의 변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군정 하의 남한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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