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31일
1946년의 설날은 2월 2일 금요일이었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교무과장 김성칠은 1일 오후 5시에 서울역에서 대구행 기차를 탔다. 대구 지역 업무를 보는 길에 영천군의 고향에 가서 성묘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출장이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자 김성칠은 기차에 오르기 전부터 불편한 마음을 느낀다.
Traffic Controlling Bureau엘 들렀더니 회장이 이미 전화로 연락해 두었으므로 곧 좌석 지정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사람에게 빌붙어서 일반 동포들이 가지지 못하는 좌석을 차지하지 말라는 아내의 부탁이었고 나는 그 말이 지당한 줄 알지만 이번에 일부러 이 길을 취해보기로 하였다.
조선 사람들의 타는 차는 그렇게도 초솔한 것이건만 미군인 전용 차량은 2등 침대차를 개조한 것으로서 호화로운 것이었고 그나마 조선 사람의 손으로 각별히 소제해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멀리 온 손님을 위해서 우리들의 반가운 심정을 표하는 것이고 또 저네들도 겸손한 마음으로 고맙게 받는 것이면 좋으련만 만일 그렇지 못해서 우리들은 힘에 눌려서 상전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러한 설비를 베풀고 또 저네들은 어떠한 우월감으로써 이 대접을 받아들인다면 통곡할 현상이다.
조선 사람들의 대접하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미군이 대접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석을 준다기에 미군 전용 차량에 탔더니 MP들이 와서 next car로 가라고 몰아세운다. 계집아이 둘만 남기고 기타의 조선 사람은 좌석 지정이 있어도 전부 쓰레기통 같은 다음 찻간으로 쫓아내고 그리고 그 찻간에 이미 타고 있는 일반 승객들은 또 몹시 붐벼서 설 자리도 없는 다음 찻간으로 내쫓는다. 간혹 그런 줄을 모르고 이 찻간에 타는 사람이 있으면 총부리를 내밀고 left go를 연발하면서 기어이 next car로 떠밀어낸다. 이쪽 차량에는 열 사람도 못다 타서 아주 비다시피 하고 다음 칸은 수백 명이 붐비어서 창밖에까지 넘칠 지경이다.
앞에 찻간에 탄 계집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나 next car의 수많은 승객들은 이 찻간에 탄 우리들을 또 그와 같이 얄밉게 생각하리라.
밤이 깊을수록 한기가 스며드는데 유리가 깨어진 차창으로부터 눈보라 섞인 매운바람이 불어치고 그나마 거의 비다시피 한 찻간이므로 사람의 훈기도 없어서 몹시 춥다. 이러한 곡경은 미인(米人)에게 좌석 지정을 받은 당연한 업보리라.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34~35쪽)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횡포에 관한 기록이 수없이 많지만,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특권과 차별을 당연시하는 자세는 본 바 없다. 군정 실시 5개월을 채워가는 시점에서 미군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성칠은 깨끗하고 따뜻한 차량을 미군과 함께 타고 가는 '계집아이'들을 얄미워한다. 그러면서 자리라도 넉넉한 '다음 칸'을 타고 가는 자신을 더 뒷 칸의 사람들이 얄미워할 것을 알고 있다. 미군의 절대적 특권을 많이 나눠받은 제1그룹을 조금 나눠받은 제2그룹 입장에서 얄미워하지만, 미군의 특권과 아무 관계없는 제3그룹의 눈길을 의식하는 것이다.
두 명의 '계집아이'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군정청 직원 아니면 유력 계층 인사의 따님들이었을 것 같다. 출장길의 금융조합 간부보다 우대받을 공식적 자격은 없었겠지만, 미군의 '기사도 정신' 때문에 제1그룹이 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양장을 갖춰 입은 젊은 여자가 길을 지나가면 아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양갈보!" 소리치기도 하고 심지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군의 특권에 대한 반감이 연약한 표적을 향해 비뚤어져 분출된 것 같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을 젊은 여성들을 '계집아이'라고 적은 것도 분노의 비뚤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1주일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봉변은 더했다.
미군 철로계의 증명서를 가졌으므로 미군 전용차에 타려다가 다른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과 함께 가슴패기를 몹시 얻어맞았다. 가슴이 사뭇 떨리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개도야지처럼 함부로 얻어맞고 쫓겨나서 화차에 가까스로 설 자리를 비집을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 왜인 경찰에게 무지스레 얻어맞았고 이제 다시 미국 군인에게 이 봉변을 당했다. 약소 민족의 설움이 새삼스레 뼈에 사무친다. 그래도 그때는 일정(日政)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았지만 이번엔 미군정에 빌붙어서 좀 편한 자리를 얻으려다가 이 봉변이다.
그들의 만행을 책하기보다도 내 지지리 못났음이 한스럽다.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다른 동포들과 함께 붐비는 중에 고생하는 것이 옳은 것을, 그들의 증명서를 이용하려던 내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그 비루칙칙한 증명설랑은 쓰지 마라던 것을, 그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몸의 컨디션이 좋지 못함을 양심에의 변명으로 삼고 차중의 안일을 얻고자 한 내 생각이 무엇보다도 잘못이었다. (<역사 앞에서>, 38~39쪽)
김성칠은 대구고보 재학 중이던 1928년 15세 나이에 독서회와 동맹휴학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면서 일제의 극심한 폭력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정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은 것이지, 그 후 16년간 식민지 시대를 지내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미군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꼴은 보지 않고 살아왔다. 미군정의 질서 유지 방식은 일본 식민 지배자들보다 더 야만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어떻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김성칠의 아내 이남덕은 남편보다도 더 선명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군의 증명서가 "비루칙칙한" 것이니 아예 쓰지도 말라고 했단다. 그런 증명서가 미국인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김성칠이 내려가는 길에 이 증명서를 쓴 것은 "일부러 이 길을 취해 봄"으로써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고, 올라오는 길에는 여러 날 출장 끝에 편안한 여행을 바란 것이었다고 한다.
아내의 관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겪어보고는 아내의 관점에 동의하게 된다. 그가 두 달 후 금융조합을 그만두고 경성대학 사학과 조수(조교)로 들어간 데도 미군 대위를 회장으로 모시는 직장에서 일하기 싫은 마음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경성대학 학장도 미군 대위였지만, 금융조합에서처럼 가까이서 모실 필요는 없었으니까.)
출장 중에 김성칠은 틈을 내어 17년 전 함께 검거되었던 선배, 친구 몇을 만났다. 일제하에서 쟁쟁한 사회주의 운동가가 된 사람들이었고 몇 달 후에는 대구 '10월 민중 항쟁'의 주역으로 활동할 사람들이었다.
이상길 군을 노조에서, 김일식 군을 전매국의 쟁의 현장에서, 윤장혁 군을 민성일보사에서, 장적우 씨를 이목 씨 댁에서 만났다.
장 씨에게는 조선공산당의 신탁 문제에 관련한 오류를 지적했더니 솔직히 그들의 잘못을 승인하였다. 민족전선의 혼란을 막고 또 건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좌익이 좀 더 양보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우익의 극단한 반동화와 당래할 그들의 쿠데타를 위하여 어느 일선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또 좌익 파쇼와 또 일부 공산당원들의 소아병적인 경향 때문에 민심이 공산당에서 이탈하고 있으니 공산당이 독선주의를 고집하지 말 것과 또 학생들을 정치 전선에 몰아내지 말고 잠심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의해달라는 요망을 하였다.
어제 박 군 댁에서도 강신묵 씨에게 공산주의의 이념은 좋으나 조선공산당의 잘못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며, 소련과 스탈린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고 공산당의 사대주의를 시급히 청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오늘 장 씨에게도 젊은 공산주의자 중에 공산당을 유아독존으로 여기고 스탈린을 전지전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더니 그도 웃었다. (<역사 앞에서>, 37~38쪽)
<역사 앞에서>를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떠올리고 서중석에게 검토를 부탁했을 때 그의 검토 의견 첫 마디가 지금도 생각난다. "역시 중도 우파셨구먼요." 분명히 그렇다. '개량주의자'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김성칠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린 1932년의 동아일보 농촌 구제책 현상 공모 당선작이 철저한 개량주의 입장이었고, 그 기본 입장은 1946년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도 우파 개량주의자도 공산주의(내지 사회주의) 원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좌익의 보다 바람직한 역할에 관해 좌익 운동가들과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같은 날 군정청 사람들과의 자리에 관한 기록은 이와 대조적인 분위기다. 도청의 부장들이라면 그 지역 우익의 중진급 인사들일 텐데, 그런 자리에서 민족과 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냥 우연할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밤에 화월식당에서 김의균 지사 이하 각 부장을 초대해서 연회가 있었다. 농상부장 서만달 씨가 여러 사람을 붙들어서 함부로 욕설을 퍼부어도 모두 감수하므로 부쩍 기수가 나서 종말엔 나를 대하여 이 자식 금융조합에 무슨 교무과가 필요하냐고 트집을 걸기에 너 같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받아주었더니 노발대발해서 덤비었다. 아무리 술자리라 하더라도 그 아니꼬운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으나 나는 주인 측이고 그는 손님이며 또 금융조합 전체의 일을 위하여 참고 자리를 비켰다. (<역사 앞에서>,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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