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의 비경(秘境)도 없고 소문난 경치도 없이 마주친 사람에게 그저 편안한 느낌만을 주는, 농촌 어디에나 있는 물의 흐름. 유종호 교수가 6세 때부터 15세 때까지의(1940~1949) 기억을 엮어놓은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펴냄)는 그런 자연스러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 <나의 해방 전후>(유종호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
나는 문학에 취미가 없다. 실용적 목적 없이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 없다. 소일거리로, 아니면 내 작업의 참고를 위해. 이 책을 손에 잡은 것도 연재 '해방일기' 작업에 참고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 동원한 백여 권 책 중에 아주 특이한 참고서가 되었다. 작업 내내 머릿속에 제일 많이 떠오르는 책의 하나인데, 한 줄도 인용해서 써먹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용지용(不用之用)'이랄까? 그게 내게는 이 책의 용도다. 그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는' 책이 아니라 그 시기가 어떤 시기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그 시기에 대해 꽤 많이 알고는 있다. 그러나 이 한 폭의 그림 앞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얻는다.
그 시기의 성격을 이해한다는 내 코앞의 볼일을 대충 해결하고 보니, 작품과 저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저절로 일어난다. 제일 먼저, 이게 문학작품 맞나, 하는 생각부터. 이건 어찌 보면 이상적 형태의 역사서술 아닌가. 조지 이거스가 <20세기 사학사>(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펴냄)에서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가능성으로 제기한 '이야기체 역사'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이거스는 이 생각을 로렌스 스톤의 1979년 논문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는데 스톤의 논문은 보지 못했다.)
머리말을 다시 읽으며 이런 생각이 문학에 대한 나의 무지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저자는 이 시기의 "삶의 결과 세목을 재현"함으로써 "온전한 사회사 정립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놓았다. 그렇다. 문학 하는 분들도 나랑 다른 세상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모습을 제대로 살피자는 목적은 문학이나 역사나 마찬가지인가보가.
이거스는 포스트모더니즘 대두의 배경을 거시적 사회과학 이론과 방법에 대한 믿음의 소멸로 본다. 그래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시선을 돌리는 미시사, 사회사, 생활사의 성장에서 변화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유 교수의 책에서 그 실천의 노력을 살피는 것은 새로운 일이다.
또 하나의 머리말이라 할 만한 첫 장 '기억의 복권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기억의 한계성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다가 '참무리'에서 구원의 희망을 찾는다. 상상력과 솜씨로 만들어낸 글이 아닌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참된 글은 후광과도 같은 자기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주관의 힘. 객관성에만 매달려온 근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대세계에서 천대받아 온 주관성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그 타당성을 근대주의적 기준으로 따진다는 것도 적절치 못한 일이다. 실천 속에서 확인되는 만큼 인정해 주면 될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주관의 힘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세칭 좌익 교사는 결코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세칭 좌경 교사를 여러 명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해선 어느 정도 안목이 생긴 터였다. (270쪽)
해방공간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채워졌던 것 같은 서술을 보면서 "과연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정말로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거기에 매여 있었을까? 거시적 관점에 쏠려 피상적 현상에 너무 비중을 크게 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의 눈에 좌익 교사의 모습이 정형화되어 나타날 정도라면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주관의 힘, '참무리' 때문이다.
이런 대목에서도 그렇다.
그러한 사단이 있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눈에도 사회는 점점 안정되어 갔다. '산사람'들이 새 소식 만드는 일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조용해졌다. 학원가도 평온해졌다. 남아 있던 구좌파들도 이제는 몸조심하며 체제 순응 쪽으로 돌아섰다. (295쪽)
1949년 여름의 상황이다. 분단 건국이 현실로 자리 잡는 상황이다. 분단 건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나 같은 사람은 믿고 싶지 않은 '안정'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고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김구 선생 암살당한 것이 그렇게 맥 빠진 상황 속에서라니까 수긍이 가기는 간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저자가 어린 눈으로 봤던 세상을 그 때 봤던 그 모습대로 그려 보이니까 담담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치밀하고 정교한 고증에 못지않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50년이 지난 후의 회고가 당시의 기록이 못 가지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있을까? 역사 연구 자료의 평가에서 현장성과 즉시성이 가지는 압도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회고란 현장 기록에 대해 보완적이거나 종속적인 가치만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존 캐리는 <역사의 원전>(김기협 옮김, 바다 펴냄) 서문에서 르포르타주를 논하며 "훌륭한 기록자는 순진한 눈을 가져야 하지만 순진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순진한 눈이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가치 있는 기록이 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성숙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현장 기록의 장점을 회고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해를 성숙시키는 시간의 힘이 잘 활용될 수도 있다. 순진한 눈으로 찍어놓은 사진을 후세 사람이 들여다보며 거기 담긴 의미를 뽑아내는 길에도, 목격자 본인이 목격한 내용을 자기 마음속에서 정제해 그려내는 길에도, 각각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도와주는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 후자의 경우 본인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그 힘이 매우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의 해방 전후>를 읽으며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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