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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비상국민회의는 통일전선의 포기인가?

[해방일기] 1946년 1월 2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⑧

1946년 1월 25일

김기협: 해방 당일 이래 선생님 활동은 무엇보다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목적을 둔 것이었습니다. 지난 14일 만났을 때 통일전선의 전망을 여쭈니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는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 이제 비상정치회의에 독촉이 합류해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바꾸면서 좌익의 참여를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 유림 등 임정 비주류 요인들도 이에 반대하며 주비회를 탈퇴하고 있습니다.

좌익이 배제된 비상국민회의는 진정한 '통일전선'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비상국민회의 추진에는 통일전선 포기의 뜻이 있지요.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자세일 수 있습니까?

안재홍: 나는 탈퇴한 분들의 뜻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21일 주비회에서 비상국민회의로의 선회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김성숙 씨가 그 자리에서 바로 반대했지요. 장덕수 씨가 "우리는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임시정부의 법통은 절대적이다" 주장하자 김성숙 씨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내가 주장해 온 '임정보강론'과 합치하는 말씀입니다.

"임시정부의 최고목표는 오직 조선의 독립이요, 독립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는 혁명적 정신이다. 임정의 지지는 구성인물에 있지 않고 그 정당한 정책에 있다. 만약 임정이 그릇된 정책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러분은 주장할 것이다. 공산당과 좌익진영은 초대를 하였는데 자기네가 참석치 않았다고. 그것이 잘못이다. 왜 좌우익이 같이 참석하게 하지 못하고 참석치 않을 회의를 가지는가? 형식적 주관적 초대만으로는 안 될 것이다. 객관적 실제적으로 참석할 전 민족적 합치의 통일을 위주하는 회의라야 될 것이다. 우익만의 통일은 민의를 가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해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아쉬운 점이 있어도 일단 임정의 권위와 김구 선생의 영도력을 중심으로 비상국민회의를 궤도에 올려놓으면 그 후에 아쉬운 점을 메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단계에서 통일전선에 대한 집착을 접어놓는 것이 나중에라도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병자호란 때 부득이 작성한 항서를 김상헌이 찢어 던지자 최명길이 주워 모으며 "찢는 대감도 계시고 줍는 저도 있어야지요." 했답니다. 어떤 일에나 여러 역할이 있죠. 나는 탈퇴한 분들과 같은 생각이지만 비상국민회의에 남아 내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최명길의 역할도 필요한 것이었죠. 그렇지만 선생님의 성격과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선생님께 최명길의 역할보다 김상헌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그런데도 최명길의 역할을 바라보시는 것은 그쪽 역할 맡아줄 사람이 너무 없어서인가요?

안재홍: 좋은 분들이 많이 있죠. 지금 상황에서 그쪽 역할의 필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해서 내 미력도 그쪽으로 보태려는 겁니다.

지난 반년간 나는 어떤 정치이념이 좋다는 주장을 내놓기보다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에 어려운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분들도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자기 생각에 고집을 세우는 바람에 일을 잘 풀어오지 못한 것이 참 답답합니다.

연합국 외상회담이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이제 더 미적거려서는 안 됩니다. 며칠 전 빈센트 씨 담화에 "현재 조선에 90여 개 정치단체가 있어서" 새 임시정부 수립이 어렵다는 말이 있었죠. 우리 비상국민회의 주비회에서는 정당이 56개밖에 안 된다는 성명을 냈는데, 구차한 얘기죠. 서로 다른 정치이념이 56가지나 될 수 있습니까? 같은 이념을 가지고도 정치인들이 화합을 못한다면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전 민족의 통일전선을 바로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가능한 범위의 통합이라도 미소공위의 보조에 맞춰 해내야 합니다.

김기협: 선생님은 11월 27일 막 귀국한 김구 선생과 대담할 때 좌익 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죠. 좌우 합작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 점령이 민족 분단으로 이어질 위험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좌익을 배제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지지하신다는 것은 민족 분단의 위험을 감수하신다는 것입니까?

안재홍: 하느님이 내 소원을 꼭 한 가지만 들어주신다면 민족 분단을 막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합니다. 분단된 독립은 통일된 종속보다도 더 나쁜 것입니다. 분단된 독립이 진정한 독립이 될 수도 없는 것이고요.

생각해 보세요. 민족이란 집단에는 저절로 뭉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 성질을 국가라는 제도가 가로막고 있으면, 민족과 국가가 서로 대항하는 형국이 됩니다. 민족의 힘과 국가의 힘이 서로 합쳐도 장래를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힘이 서로 맞선다면 어떤 꼴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공산당의 비협조가 너무 심합니다. 11월에도 두 차례나 근택빌딩으로 찾아가 독촉 참여를 권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모스크바 결정이 전해지자 바로 다시 찾아가 이주하 씨에게 "탁치반대 운동을 아니하고서야 무슨 운동을 하겠느냐"는 말을 듣고 이제야 합작의 길이 열리는구나,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공산당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지요. 그러고도 1월 7일 4당 대표가 모였을 때 공산당 입장을 배려한 표현으로 '4당 코뮈니케'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공산당을 끌어들일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산당 없이라도 할 일을 해 나가면서 새로운 기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김기협: 4당 코뮈니케의 폐기는 후세 사람들도 무척 안타까워하는 일입니다. 서중석 선생은 합의 내용에 앞서 "해방 이후 좌우익 간에 있었던 최초의 중요한 합의"이며 "국내의 주요 정당이 한국에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합의를 본 유일한 문서"라는 점을 중시했지요.

그런데 4당 코뮈니케의 폐기는 공산당이 아니라 한민당의 책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민당 김성수 씨는 엊그제 담화에서 코뮈니케 제1항을 놓고 "공산당 이주하가 조공은 신탁을 절대지지하므로 수정할 수 없다고 고집하여 필경 결렬된 것"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려 했지만, 그 회담에서 이주하 씨가 "신탁을 절대지지"한다고 하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코뮈니케 제1항은 이런 내용이었죠.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국제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신탁제도)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케 함."

신탁을 지지하는 내용이 아니라 표현을 유보한 것일 뿐이며, 신탁을 별도로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 아닙니까? 그 정도 표현이 적당하겠다고 한민당 대표로 온 김병로 씨와 원세훈 씨도 동의했던 것을 대표까지 교체해 가며 번복한 것은 참 심했습니다. 이 일만이 아니라 통일전선에 대한 그 동안 한민당의 성의가 공산당만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한민당의 문제점이야 눈 있고 귀 있는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른 건 차치하고, 몽양과 나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데야 더 할 말이 없죠. 한민당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병로, 원세훈 씨 같은 분들까지 깔아뭉개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데는 정말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러나 한민당에 민족의 장래를 위한 소중한 자원이 많이 포용되어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행정, 경영, 기술, 모든 분야의 높은 수준 훈련과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대부분 한민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민당이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건준 때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몽양은 좌파의 설득, 나는 우파의 설득을 맡고 있습니다. 누구 일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민당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은 피할 것입니다. 한민당의 편협한 노선을 따라가지 않으면서 한민당이 따라올 만한 길을 보여주는 것을 나와 국민당의 역할로 생각합니다.

김기협: 여운형 선생의 인민당이 공산당의 편협한 노선을 따라가지 않으면서 공산당이 따라올 만한 길을 보여주려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그러고 보면 공산당과 한민당은 정책 내용은 달라도 매사에 합작을 어렵게 하는 대립지향적 성격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박헌영의 공산당 노선은 인민당만이 아니라 공산당의 북조선분국에서도 '좌경 모험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극좌파'지요. 한민당 주류 세력도 같은 틀의 '극우파'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편 인민당과 국민당의 정책노선에 그리 큰 차이가 없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합작할 수 있는 사이인데, 이것을 극좌파, 극우파와 대비되는 '중도파'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극좌파는 헤게모니 투쟁을 중시하는 볼셰비즘의 전통에 따라 민족 문제를 경시하거나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우파라 할 수 있는 한민당 주류는 식민지시대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 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양쪽을 다 배제하고 중도파의 통일전선을 만드는 것이 극좌, 극우의 흡인력을 막는 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익은 비상국민회의로,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따로 나간다면 이쪽에서는 극우파가, 저쪽에서는 극좌파가 각각 주도권을 쥐게 되기 쉽지 않습니까?

안재홍: 중도파의 통일전선! 가능하기만 하다면 좋은 길이죠.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몽양과 내가 건준을 함께 한 것이 바로 중도파 통일전선의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나요? 우익에서는 외면했고, 좌익에서는 박헌영 일당이 달려들어 말아먹었습니다. 몽양과 나의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지요.

내가 임정을 높이 받들어 온 것이 중도파 통일전선을 실현시킬 실력을 가진 주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말에는 콧방귀 뀌는 사람도 김구 선생이 똑같은 말씀을 하면 그러지 못합니다. 민족의 진로를 밝은 길로 열어가는 가장 큰 열쇠가 임정에 있습니다. 임정이 역할을 제대로 하면 한민당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박사나 독립동맹 같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과 보조를 맞춰주면 더욱 좋지요.

김기협: 임정이 한민당과 이 박사를 선도하기보다 거꾸로 휘둘려 버렸다고 후세 사람들은 많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 계기가 반탁운동이었다고 봅니다. 연말의 '국자(國字)' 1, 2호로 임정과 김구 선생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지 않았습니까? 극단적 반탁운동으로 인해 좌우합작의 길도 더 좁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제 좌익을 배제한 비상국민회의 추진도 좌우 대립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안재홍: 결과를 보면 김 선생 말이 맞습니다. 국자 사건으로 임정의 권위는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큰 타격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임정 요인 네 분의 주비회 이탈이 더 걱정됩니다. 하고 싶은 말씀을 충분히 한 다음 비상국민회의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라도 임정의 소속은 굳게 지키기 바랍니다.

반탁운동 때문에 좌우합작의 길이 더 좁아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반탁운동 아니라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합작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 염원을 좌익 일각에서 이용해 먹으려 들기 때문에 더 어려운 면도 있었습니다. 억지로 하려 해도 안 되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예 큰 통일에 대한 집착을 접어놓고 우익은 우익 안에서, 좌익은 좌익 안에서 각자 단결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좌우 대립은 더 뚜렷해지겠죠. 그럴 때 오히려 새로운 접점이 나타나지 않을까 나는 기대합니다.

"썩어도 준치"란 말대로, 임정의 권위가 아무리 타격을 받아도 그 가치는 쉽게 스러지지 않습니다. 임정의 지도력에 기대할 것이 없게 되는 상황은 바로 민족의 장래에 희망이 없게 되는 상황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임정의 권위를 지키고 키우는 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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