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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기독교만 읽는 책? '하나님'은 누구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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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기독교만 읽는 책? '하나님'은 누구의 신?

[프레시안 books] 김용규의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

19세기 말 이후 우리의 학문과 생활은 이미 서양적인 것에 의해 점령당했다. 선(善)의 반대가 불선(不善)이 아니라 악(惡)이라고 생각하고 공정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기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서양적인 것은 이미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동양 속의 서양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서양적인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각종 학문 영역에 두루 쓰이는 'substance'라는 말이 어떤 유래로 만들어졌고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어떤 의미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존재를 선으로 보는 서양의 전통을 눈치 채고 그것이 서양의 학문, 예술에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 느끼는 한국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서양 사람들이 쓴 서양의 문명에 대한 각종 소개서들은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된 서양 문명의 소개서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맞는 서양 문명의 안내서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김용규의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펴냄)은 서양 문명의 가장 핵심에 있는 것들이지만 아직 한국인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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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서양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만일 수밖에 없다. 종교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성서는 필독의 고전이라는 점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성서가 고전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성서가 가지는 강한 종교성 때문일 것이다.

또 서양인들이 소개하는 그리스도교와 서양 문명은 유불도(儒彿道)의 유전자를 가진 우리에게 소화되지 못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신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 책은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그 문명 곳곳에 박혀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해, 그리고 그와 관련한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 진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준다. 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러나 특정 종교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에 망설였던 사람들에게 창조와 삼위일체, 유일신, 신의 여러 속성에 대해서 부담 없는 여행을 안내한다.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이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적 신 개념과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이 종합된 것이라는, 그래서 신앙과 이성이라는 상극(相剋)을 조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서양의 존재와 선(善) 개념, 존재의 대연쇄, 예정설, 섭리, 공간, 시간 개념을 공감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과정을 추적해서 창조, 신, 존재, 예정, 유일신 등 여러 개념으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유대교와 다른지를 이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책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이 책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보수주의적 성경 해석이라는 편향성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전통에 의거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종교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해준다.

특히 신앙이 과학이나 철학을 배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깨닫고 더욱 강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현대 과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창조론과 관련되는 시간, 물질 등 여러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언어 놀이나 패러다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진화론이 어떻게 창조론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대에 있어서도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신학, 철학, 문학, 예술,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다드는 해박함에 있다. 저자는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 창조주, 인격, 유일자라는 네 열쇳말로 조곤조곤 설명한다. 그 안에서 신의 존재 증명,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그리스도교적 창조의 함의,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유일신 개념의 진정한 의미 등 다양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논의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작품을 모티프로 시작해 여러 철학, 문학, 예술 작품의 씨실로 묶고 나서 다시 그 <천지창조>로 끝을 맺는 수미일관한 구성은 분량과 내용의 방대함이 주는 위압감을 위로하고 있다. 또 시종일관 원전에 근거해서 분석하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원전에 담가보지도 않은 채로 철학사라는 묵은지를 상에 올리는 얄팍한 소개서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꼼꼼하게 고대, 중세와 근현대의 원전을 인용하는 진지함과 고대의 플라톤부터 중세의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 그리고 근대와 현대 철학의 흐름을 꿰고 있는 스케일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저자의 입장과 논의가 개신교적 관점에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서양 철학과 신학, 문화 전반에 있어 목적론적 세계관과 존재와 선의 일치, 역동적 존재 개념인 에세(esse)를 한 차원 높이 발전시키고 자연법 개념과 전통을 정립한 아퀴나스의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는 플라톤적 전통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 개신교에서는 자연신학으로 폄하되지만 가톨릭의 공식적 신학으로 자리매김한 토마스의 전통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혹시 저자의 신앙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요즘같이 개신교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적대감이 심한 때에 굳이 '신'이나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의 개인적인 종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외에도 아쉬운 점들이 또 있다. 분량이 너무 많다는 점도 참을성 없는 독자들을 쉽게 지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선함, 전능, 전지, 무소부재와 같은 신의 다른 속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아쉽다. 비록 다른 주제들을 다루면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비중이 큰 주제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 문헌이 따로 없는 점도 아쉽다. 812쪽부터 참고 문헌이라고 되어있는 부분은 미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자세한 공부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참고 문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좀처럼 찾을 수 없지만 옥의 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393쪽의 "구분되는 창조의 행동"은 "창조로부터 구분되는 행위"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또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표현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대목도 있다. 146쪽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한 것이었습니다"라는 표현이 그 예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고 있는 강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이 가지는 유일성이라는 속성이 포괄성의 의미이지 배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타성과 폭력성은 교회 내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현재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반(反)신앙적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624쪽에서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오해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무신론자들의 오해인가 아니면 유일신교의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오해인가? 물론 5부 전체, 특히 9장을 읽으면 무신론자들의 오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오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읽는 것일까? 아니면 서양 문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을 이해하는 것일까? 책 전체를 존재, 창조주, 인격, 유일자로서의 신으로 나누고 설명하는 것으로 봐서는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맺음말에서 저자가 리오타르를 인용하면서 작은 이야기에 빠져 큰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지성적 흐름을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신의 속성을 통해 서양 문명이라는 고장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서양의 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점 또한 목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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