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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000년의 애증을 풀고 '그'와 화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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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000년의 애증을 풀고 '그'와 화해하다!

[프레시안 books] 푸페이룽의 <맹자 교양 강의>

유교는 식물성이다. 유교의 사유 구조는 근본과 말절, 즉 '본말론'으로 구성된다. 여기 본(本)은 뿌리요, 말(末)은 잎사귀를 뜻한다.

나무나 벼가 생장하기 위해선 잎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그 생명의 핵심은 뿌리에 있다. 본말론 구조를 사람으로 가져오면 내 몸의 뿌리는 부모와 조상으로 은유된다. 여기서 효도와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의 틀을 이해할 수 있다. 또 맹자 사상의 핵심인 성선설의 성(性)이 씨앗 또는 싹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본성을 기르는 방법으로서 농사꾼이 작물을 키우듯 억지로 북돋지도 말고(勿助長), 그렇다고 씨 뿌린 것을 잊어버리지도 말기(勿忘)를 권한 것도 그렇다. 곧 유교는 '농경의 시대'를 바탕으로 건설된 사상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세기 서구화·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친 '상공업의 시대'에 유교가 핍박을 당한 까닭도 짐작이 간다. 동시에 오늘날 자연과 생태가 중시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시금 유교 사상이 재조명되는 내막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10년 전 이 땅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 제목이 우리들 속마음을 잘 드러내주었듯, 지금도 유교는 우리들에게 마뜩치 않다. 근대화를 가로막는 전근대성,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가부장제, 그리고 민주주의와 과학, 진보의 소매를 붙잡는 수구꼴통의 아성이 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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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쪽 사정은 더 극적이다. 40년 전, 문화혁명기만 해도 유교는 전통, 봉건, 미신의 온상으로 파괴의 대상이었다. 어느 순간 그것이 급변하여 초등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논어>를 암송하고, 베이징의 천안문 안에는 마오쩌둥 초상화 크기보다 더 큰 공자 동상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공자 평화상'이 제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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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 교양 강의>(푸페이룽 지음, 정광훈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최근 번역된 <맹자 교양 강의>(정광훈 옮김, 돌베개 펴냄)는 이런 유교의 재인식 바람에 편승한 중국 쪽 텍스트다. 중국 중앙방송(CCTV)의 <백가강단>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10차에 걸친 '맹자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강연자(저자)는 푸페이룽. 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다.

한국이든 중국에서든 겹겹이 애증이 교차하는 유교 사상에 대해, 특히 2300년 전 전국 시대의 고전인 <맹자>를 오늘날로 초청하여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맹자>를 강의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현대 동아시아인들의 반(反)유교적 눈길이 가장 큰 장애이긴 하지만, <맹자> 자체의 고유한 난점들 탓도 크다.

<논어>와는 달리 이 책은 이른바 백가쟁명의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즉 수더분한 대화가 아니라, 치열한 논쟁이 <맹자>를 구성하고 있다. <논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길고 또 단어 하나하나에 여러 겹의 뜻이 서려있다. 그러니 피상으로 죽 훑어 읽어서는 맥을 잃거나 그 속뜻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또 다양한 전거들을 인용해서 논쟁의 밑천으로 삼기 때문에 끊임없이 출현하는 경전들인 <시경>, <서경>, <논어> 그리고 당시의 속담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맹자와 논전을 벌이는 맞잡이 사상들, 예컨대 묵가, 종횡가, 법가, 농가 등에 대한 이해도 갖춰야만 균형 잡힌 해설이 가능하다. 요컨대 <맹자>는 그 자체로 참뜻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어려운 난삽한 텍스트다.

저자 푸페이룽은 이런 여러 가지 난점을 헤치고 오늘날 대중들의 가슴에 와 닿도록 해설에 성공한 드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철학 분야에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저자가 간략한 언어와 적절한 사례로, <맹자>의 정수를 독자에게 풀이해주어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훌륭한 강의라 할 만하다"는 번역자의 장담이 헛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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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은 특정한 구절을 뽑아 읽고 해설하는 강독식이 아니라 10가지 주제를 선별하여, 이를테면 맹자 사상을 10면체로 깎아서 독자(청중)들에게 제시하는 입체적 방식이다. 이 중에서도 저자는 "맹자 사상에서는 특히 인성론, 수양론, 교육관, 생명의 경지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라며, 이 4가지 면에 더욱 주목하기를 요구한다.

평자로서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이 강한 부분은 제3장, 효도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우리에게 유교는 충효(忠孝)라는 언어로 치환된다. 여기 효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뜻하고, 충은 가정에서 길러진 복종의 습관을 국가(군주)에게 바치는, 유교의 '노예성'을 대표하는 규범이다. 그러나 저자는 충효로 인식되는 유교는, 한(漢) 제국 체제 이후 삼강오상(三綱五常)의 틀 속에서 "변질"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우리에게 유교의 효도는) 부모의 말은 무조건 옳으니 자녀는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그것이 효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현실에서는 올바른 생각이나 행동과 거리가 먼 부모가 무척 많습니다. 유교에서도 이를 잘 알았습니다.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효도하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루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62쪽)

그러면 효도란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과 반신불수가 된 어머니와의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면서 효도는 부모와의 대화와 소통이 핵심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요컨대 사랑의 뿌리인 효도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소통이 본질이다. 이 부모 자식 간의 소통을 통해 획득한 사랑의 힘(이해력)은 점차 가정의 문턱을 넘어 마을과 학교, 그리고 사회와 국가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당신에게 잘해주는 건 당신이 내게 잘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며, 그저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71쪽)임을 체득하는 것이 효도다.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을 효도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 결코 부모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그 힘에 짓눌려 내 욕망을 억제하는 따위는 효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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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 책에는 학술적 가치도 있다. 맹자 사상의 핵심으로 누구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들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푸페이룽은 성선(性善)이 자칫 '태어나면서 본래 선하다', 즉 성본선(性本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또 설득력 있게 개진한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은 '사람은 본래부터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은 선을 지향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향선(性向善)이 성선설의 본래 뜻이라는 것. 마치 씨앗이 성장하면서 태양을 향하는 속성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선을 '향하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성본선과 성향선의 차이는 앞의 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본래 선하다고 오해될 수 있다면, 뒤의 것은 노력을 하지 않거나 외부의 장애가 있을 때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점, 즉 '실천적이고 동태적인 특성'을 담을 수 있는 데 있다. 이 땅의 지성사에 비춰보면, 다산 정약용이 성기호설(性嗜好說)이라, 사람은 선을 '좋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논한 바 있는데, 막상 푸페이룽이 주장한 바, "성선이란 선을 '지향하는' 특성을 뜻한다"는 성향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저자의 친절한 인도를 따라 <맹자>를 읽으면서 문외한인 독자라도, 맹자 사상의 큰 맥락을 헤아릴 수 있고, 또 구체적인 개념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이 책을 통해, 사상가 맹자의 깊은 안목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맹자를 배울 때 그의 표면적인 언사만 봐선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된 배경과 근거를 묻고, 그가 왜 자신의 말에 그토록 자신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라고 우리에게 '맹자 독법'의 신중성을 권한다. 그런데 이런 신중성은 도리어 맹자 본인이 당대의 사건과 사태를 대할 때 견지한 태도로 여겨진다.

나는 신중성을 '겹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거죽의 아래 깔려있는 진실의 여러 겹을 헤아릴 줄 아는 눈이라는 뜻에서다. 세상의 일들과 사람을 만날 때, 겉에 드러난 거죽을 진실로 보는 피상적 이해(육안)를 넘어서, 그 속살을 헤아리는 깊이 있는 안목(심안)이야말로 인문학과 고전 공부의 핵심이다. 또 이점이야말로 <맹자>를 통해 획득하는 참된 가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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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저자와 맹자 사이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 그 첫째다. 저자가 "맹자의 눈이 이처럼 깊고도 정확했다"(64쪽)는 점에 감탄한 나머지 마땅히 지켜야할 대상과의 선을 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다. 대상(맹자·유교)과의 적절한 거리를 잃어버리고 맹자를 변호하기를 넘어서 옹호하고 또 유교를 강조하기를 넘어서 '호교'하기에 이르는 '감동적' 대목이 여러 곳이다.

"맹자 사상은 완벽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에 더 깊이 배울수록 삶이 발전해 가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33쪽)라든지, "서양 사상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유심히 관찰했다면, 유교에서는 인성과 관련된 온전한 관점을 갖고 있다"(193쪽)는 식의 표현이 거듭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그 맥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한, 독자들로 하여금 맹자나 유교의 이해를 북돋우기보다는, 저자의 자기만족에 의구심을 표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맹자 사상의 핵심이 인의(仁義), 특히 정의(義)에 방점이 찍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랑(인)과 정의(의)는 맹자가 제시하는 새 시대의 정치적 비전, 즉 왕도(王道) 정치의 핵심이다. 그런데 저자는 "유교의 의(義)는 어떤 해석을 가져와도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91쪽)라고 언급할 뿐, 맹자 사상의 고갱이인 '정의'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맹자 사상의 핵심을 재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 사상을 현재로 되살리고, 또 오늘날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맹자 '강의'의 역사적 의미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유교 사상은 많은 오해에 싸여있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맹자 사상, 그리고 본래 유교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유교가 오늘날 살아있는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맹자가 이렇게 저렇게 훌륭한 사상이다'라는 계몽만으로는 부족하다. 맹자를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그 비전을 드러내 주는 작업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을 통한 '대중 강의'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사적 공간이 된다.)

즉 오해된 맹자를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맹자를 오늘날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 열쇠가 의(義)에 있다고 평자는 생각한다. 맹자의 정의론, 유교의 정의관에 비춰 현대 중국의 정치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또 우리에게 그리고 정치가들에게 어떤 윤리와 실천을 요구하는지가 '강의'를 통해 제시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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