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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미션 임파서블'…"'이란의 저주'를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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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미션 임파서블'…"'이란의 저주'를 풀어라!"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이란과의 악연

카타르에서 열리는 2011년도 아시안컵 축구 대회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파상공세에도 인도에게 네 골밖에(?) 얻지 못함으로써 네 팀 중 2위라는 그리 마땅치 못한 성적으로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이탈리아처럼 월드컵 축구 대회 예선에서 죽을 쑤다가도 경기를 거듭할수록 나은 실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우리의 상대가 이란이다 보니 예선에서 1위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걸어가게 될 대진표를 보면 아쉬움은 더 커집니다.

우승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대진 운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월드컵 대회에서 아시아의 어느 팀도 이루지 못한 훌륭한 성적을 거둔 것처럼, 이제 아시안컵 대회에서도 대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승컵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국 대표 팀의 과거 성적표

지금까지 14회의 아시안컵 대회에서 한국 축구 대표 팀이 4강에 들지 못한 것은 모두 몇 번일까요?

우승 2회(1956, 1960년), 준우승 3회(1972, 1980, 1988년), 3위 3회(1964, 2000, 2007년)를 차지한 게 전부이니 여섯 번은 4강에 오르지 못했거나, 불참했으며,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1, 2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는 단 4개국만이 참가하여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역시 4개국이 참여하여 이스라엘이 우승을 차지한 3회 대회에서는 첫 출전한 인도에게까지 패하며 3위에 머물렀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래도 반 이상에서 4강에 들었다고 자위할 수도 있지만 지난 다섯 대회만을 돌이켜 보면 일본이 우승 3회, 4위 1회, 사우디아라비아가 우승 1회, 준우승 3회를 차지한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나라는 3위를 2회 차지한 게 전부입니다. 중국이 준우승 1회, 3위 1회, 4위 1회를 차지했으니 중국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또 다른 아시아의 맹주 이란도 3위를 두 번 한 게 전부이니 우리와는 동병상련을 느낄 만합니다.


한국과 이란의 성적이 나쁜 이유는?

2007년부터 아시안컵에 출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구 강국 호주는 그 대회 8강전에서 일본에 패하여 탈락했으니 그렇다 치고 한국과 이란의 성적이 이렇게 나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두 팀이 1996년부터 네 번 연속 8강전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두 팀 중 한 팀은 4강에 오를 수 없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사이좋게 두 번씩 승부를 나눠가진 건 좋지만 8강전에서 너무 힘을 썼기 때문인지 준결승에서는 두 팀 합쳐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8강전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다섯 번 연속 두 팀 중 한 팀은 4강에 오르지 못할 몹쓸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과 이란이 동시에 출전하여 8강전에서 만나지 않은 경우는 모두 4회(1972, 1980, 1984, 1988년) 있으며, 우리나라가 예선에서 탈락한 1984년 대회를 제외하면 양 팀 모두 4강에 올랐습니다.

"경기장이 푹신해서 뛸 수가 없었다" : 1996년

지난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아랍에미레트에서 개최된 1996년도의 8강전은 오래된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치욕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경기였습니다.

1956년 1회 대회부터 1968년 4회 대회까지는 4~5개 팀이 출전하여 풀리그로 자웅을 가렸고, 1972년 5회 대회부터 1992년 일본 대회까지는 6~10개 팀이 참가하여 두 개 조로 나뉘어 경기를 벌였습니다. 문제의 1996년 11회 대회와 2000년 12회 대회는 12개 팀이 출전하여 4개 팀씩 3개조로 나뉘어 경기를 벌였으며, 2004년 13회 대회부터는 16개 팀이 출전하여 4개 팀씩 4개조로 예선을 벌이고 있습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대표 팀 감독을 맡아서 8강전에서 수중전 끝에 주최국 일본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일본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한국 대표 팀은 준결승에서 또 수중전 끝에 슈팅수 24대 2라는 압도적인 경기를 벌이고도 우즈베키스탄에게 1대 0으로 패하는 바람에 "아시안컵은 물론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팀을 이끈 비쇼베츠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더라면 1996년 아시안컵 대표 팀을 맡을 수도 있었겠지만 올림픽에서 예선 통과라는 숙원을 달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냥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대표 팀 감독을 맡은 이는 일화(현재의 성남)팀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감독으로서는 이룰 걸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박종환이었습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서울시청 감독으로 스타가 없는 팀을 맡아 좋은 성적을 거두며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종환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에서 FIFA 주관 대회에 처음 4강을 이룩한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2년 앞선 1981년 호주 대회 예선 첫 경기에서 최순호(현 강원 FC 감독)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 2 도움을 기록함으로써 세계의 축구팬들을 놀라게 할 당시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프로팀을 맡아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도 했지만 네 번이나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서 그리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던 박종환은 다섯 번째로 1996년 아시안컵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직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박종환의 뜻과 다르게 연습 기간조차 충분히 가지지 못한 상태로 출전한 한국 대표 팀은 예선 첫 경기에서 아랍에미레트와 1대 1로 비긴 후 두 번째 경기에서 인도네시아에 4대 2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마지막 경기의 상대는 앞선 경기에서 인도네시아와 비기고, 아랍에미레트에게 패한 쿠웨이트였으니 쉽게 이길 만도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선수들의 행동이 앞선 경기와 다르게 무겁게 느껴지더니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2대 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1승 1무 1패로 조 3위, 그러나 3위 팀 세 팀 중 두 팀이 와일드카드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8강에 올라 이란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반전만 해도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반 11분에 김도훈이 선취골을 터뜨릴 때만 해도 전통적으로 어려운 상대인 이란을 잡을 기대를 가지게 했고, 20분 후 바게리에게 동점골을 허용하자 박종환은 서정원(현 대표팀 코치) 대신 신태용(현 성남 감독)을 투입했습니다. 그로부터 2분이 지나지 않아 신태용이 다시 앞서가는 골을 성공시키자 "역시 박종환은 선수 교체의 명수"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후반 7분,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아지지에게 동점골을 내준 후부터 선수들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이란의 알리 다에이는 38분 동안 혼자 네 골을 몰아넣었고, 득점왕에 올랐으며,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의 경기내용이 왜 그렇게 달랐는가에 대해 경기장의 잔디가 쿠션이 심하여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8년 만에 출전한 아시안컵 대회에서 4강에조차 들지 못하고 귀국보따리를 싸야 했다는 것입니다.

▲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2011년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한국은 1차전 바레인을 꺾은 데 이어서 14일(현지 시간) 오스트레일리아와의 2차전에서는 1대 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은 전반 23분 구자철 선수의 선취골로 1대 0으로 앞섰으나 후반 17분 동점골을 허용하며 1대 1로 경기를 마쳤다. 사진은 이정수 선수(오른쪽)가 공중볼을 다투는 모습. ⓒ뉴시스

걸출한 신인의 등장 : 2000년

1981년 호주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이탈리아 청소년 팀을 공황에 빠뜨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이탈리아 프로팀의 스카우트 대상자가 되었던 최순호는 이미 대표 팀 주공격수로 활약하던 선수였습니다. 1980년 쿠웨이트 아시안컵 대회에서 최전방 공격수를 맡아서 이란의 베타쉬 파리바와 함께 7골을 기록하여 득점왕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최순호는 만 19세가 채 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0년, 한국 대표 팀에 새로 걸출한 신인이 등장했으니 이동국이 그 주인공입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출전하여 인상적인 중거리 슛을 쏜 고졸 신인은 이듬해 세계청소년대회에서 한국 팀의 공격수로 활약한 후 20세를 갓 넘어선 나이에 (황선홍이 없는) 대표 팀의 주전 자리를 꿰찼습니다.

허정무가 이끈 대표 팀은 중국과 2대 2로 비긴 후 쿠웨이트에 1대 0으로 패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골을 기록하지 못하던 이동국이 인도네시아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1승 2무를 기록한 중국, 쿠웨이트에 이어 조 3위에 올라(?) 다시 한 번 와일드카드를 잡았습니다.

8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역시 이란이었습니다. 후반도 반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지난 대회에서 한 방을 먹인 바 있는 바게리에게 또 한 방을 먹을 때만 해도 예선에서 보여 준 그리 내세울 게 없는 경기력이 다신 한 번 드러나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후반 45분이 끝나갈 무렵 김상식이 동점골을 터뜨리더니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결승골을 터뜨려 지난 대회의 빚을 갚게 해 주었습니다.

준결승전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2대 0으로 뒤지고 있을 때 후반전 끝나기 직전 한 골을 넣어 아쉬움을 달래 준 이동국은 중국과의 3, 4위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함으로써 득점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동시에 선정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넣은 9골 중 6골을 그가 기록했으니 20년 만에 아시안컵 대회에서 걸출한 신인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시작은 좋았는데 : 2004년

이 대회부터 16개 팀이 참가함으로써 두 번 연속 3위로 와일드카드에 의해 예선을 통과하는 행운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히딩크의 뒤를 이은 코엘류가 물러난 후 다음 월드컵을 위해 영입된 본프레레가 이끈 대표 팀은 첫 경기에서 요르단과 0대 0 무승부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두 번째 경기에서 이동국과 안정환 투톱이 골을 기록하면서 아랍에미레트에 2대 0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의 상대는 번번이 우리나라의 뒷덜미를 잡은 쿠웨이트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회에서 이미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이동국은 2002년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 빚을 갚으려는 듯 아랍에미레트전의 첫 골에 이어 두 골을 먼저 터뜨렸고, 뒤를 이어 차두리와 안정환이 골을 더하여 4대 0이라는 시원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8강전 상대인 이란은 1승 2무로 일본에 이어 조 2위를 기록했습니다. 8년 전에 우리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알리다에이는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했으나 이미 대비를 단단히 한 우리 수비수들은 그에게 별다른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란에는 대신 알리카리미가 있었습니다. 전반 10분에 선제골을 터뜨린 그는 설기현이 동점골을 기록하자 2대 1로 달아나는 골을 넣었습니다.

이동국은 동점골을 넣어 전반전을 편하게 마감시켜 주었지만 후반전이 시작되자 우리나라는 자책골을 넣고 말았습니다. 김남일이 동점골을 넣어 다시 한 번 4강 진출의 의지를 다졌으니 알리카리미는 후반 22분에 4대 3으로 앞서는 결승골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를 4강에조차 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알리카리미는 바레인의 알라후바일과 함께 5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이동국이 4골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외국인 감독도 별 수 없다 : 2007년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아래에서 두 번의 월드컵 대표팀 코치로 준비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다시피 한 핌 베어벡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자 한국 대표 팀 감독에 올랐습니다. 이미 한국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감독이어서 계속해서 축구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그가 감독을 맡은 후 보여준 국가대표 팀의 경기력은 전혀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감독 생활 1년이 지날 무렵 동남아 4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타일랜드, 베트남)에서 개최된 아시안컵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선 1차전에서 최성국의 골로 우승 후보 사우디아라비아에 1대 1로 비길 때만 해도 우승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2차전에서 바레인에게 2대 1로 의외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레인은 앞선 경기에서 인도네시아에 2대 1로 진 바 있으며, 이 대회에서 1승 2패로 예선 탈락했으니 우리에게 이긴 것이 유일한 승리입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홈그라운드의 인도네시아에 1대 0으로 이기기는 했으나 문제는 경기내용이었습니다. 작전이 뭔지, 과연 우리 선수들이 골을 넣는 법을 알기는 아는 건지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8강전에서는 예선에서 2승 1무를 기록한 이란과 만났습니다.

8강전부터는 경기장에서 우리나라 선수라곤 골키퍼 이운재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란도 이전의 대회에서 보여 준 날카로움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시종일관 별 재미없는 경기 끝에 경기는 득점없이 끝났습니다. 이란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승을 안겨준 이운재는 준결승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조금은 우세한 경기를 버렸지만 골을 넣지 못하는 대표 팀 주장으로서 다시 한 번 승부차기 승을 안겨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3, 4위전에서는 세 경기째 골을 넣지 못하는 대표 팀의 주장으로서 승부차기 승을 거두게 해 줌으로써 3위라는 성적을 거뒀습니다. 결국 여섯 경기에서 세 골밖에 못 넣은 대표 팀에 대한 비난을 피하지 못한 핌 베어벡은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지요.

이번만큼은 화끈한 승리를

1980년 대회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결승에서 우리나라에 예선의 패배를 되갚은 쿠웨이트는 이듬해 월드컵 예선에서도 우리나라를 떨어뜨리고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쿠웨이트는 1982년 아시안게임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니 1980년대 초 약 2년 정도는 쿠웨이트가 아시아 최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쿠웨이트의 시대는 곧 끝났고,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이라크, 이란 등이 중동의 맹주로 군림하는 동안 쿠웨이트는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만큼은 2004년 아시안컵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4대 0 승리를 거두기까지 약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발목을 잡아왔습니다.

1972년 아시안컵 대회에 이어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우리나라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한 이란은 지금까지 약 40년간 아시안 축구계에서 맞수이자 라이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시안컵에서는 서로 치고받으며 힘을 빼는 바람에 두 나라 모두 최근 30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8강전에서 만난 인연도 인연이지만 그렇다고 질 수도 없으니 이번만큼은 한국 대표 팀이 이란에게 화끈한 승리를 거두어주기를 기대합니다. 2004년 아시안컵 대회에서 쿠웨이트에게 그랬듯이 예상을 뛰어넘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동안 쌓인 응어리도 풀어 주고, 이를 통해 앞으로는 현재의 맞수가 아니라 과거의 맞수로 대하게 되어 다시 만나게 될 때마다 마음 편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아시안컵이 끝나는 날까지 매 경기마다 밤잠을 설치게 된다 하더라도 모든 경기에 집중력을 기울여 볼 수 있도록 한국 축구팀이 계속해서 승리를 가져다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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