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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공세…"박헌영을 공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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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공세…"박헌영을 공격하라!"

[해방일기] 1946년 1월 19일

1946년 1월 19일

박헌영이 '좌익'을 대표하는 인물로 통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조선공산당(공산당) 책임비서였기 때문이다. 해방 후의 공산당은 정통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코민테른이 '1국 1당'의 권위를 보장하던 원리가 코민테른이 해체된 아직까지도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동유럽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 식 '전위정당'보다 '대중정당'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던 것과 대조된다.

박헌영은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참여와 1930~1933년간의 '국제선' 역할로 경력상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위에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를 답습한 8월 테제를 만들어 이념적 정통성을 함께 주장했다. 이것이 상당한 범위의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인정받아 박헌영이 공산당 '재건'의 기수가 되었고, 그는 공산당을 권위주의 체제로 이끌었다. 그가 장악한 공산당을 통하지 않고는 공산주의 활동이 성립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조봉암, 고경흠 등 자신과비길 만한 능력과 명망을 가진 활동가와 이론가를 공산당에서 배제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95~497쪽)

박헌영이 장악한 공산당의 존재는 이북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도 제약을 주었다. 1945년 10월 중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든 것은 분할 점령으로 인해 중앙당의 역할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별도의 중앙당을 만든 것이다. 분국의 필요성이 분명한 데도 박헌영과 그를 추종하는 이북 지역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분국 설치에 반대한 것은 종파적 주도권에 집착한 것이었다. 그 반대를 박헌영이 접은 것은 소련군 측의 권유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주도한 북조선분국이 실제로 별도의 중앙당이면서도 명목상으로 서울의 중앙당과 책임비서 박헌영의 상급 위상을 존중한 것은 식민지 시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익숙했던 '1국 1당' 원리를 뒤집을 경우 일어날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박헌영의 위상이 계속되었다. 1946년 3월 이후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통칭되는 상황에서도 이 위상은 명목상으로라도 유지되었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이 각각 세워진 뒤에야 해소되었다.

박헌영의 대표성을 강조하는 권위주의 체제 때문에 공산당에 대한 공격이 박헌영 개인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는 일이 많았다. 1월 5일의 기자 회견 내용이 왜곡되어 물의를 일으킨 것이 그런 예의 하나다. 그 회견의 <서울신문> 1월 6일자 보도는 이렇게 나왔다.

5일 오전 11시부터 조선공산당 朴憲永은 내부 기자단과 회견하고 조선의 탁치 문제, 정당 통일 문제, 군정의 경향 등에 대하여 두 시간 동안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공산당은 모스크바 會談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
(答) 삼국 외상 회담에서 결정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 조선 문제의 결정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결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탁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 과정의 식민지화의 의도가 없고 셋째는 오늘의 세계 문제는 美 英 蘇 3국 연합의 민주주의적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이 높은 과정에 이르러 각국이 다 협력하여 파시즘을 박멸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민주주의로서 국제 협조 정신 하에 국제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도 국제 관계의 일환으로서 이러한 국제적 노선에 순응해야 비로소 조선 독립이 가능한 것이요 또 그 독립이 조선을 위한 독립이요 세계를 위한 독립이 된다.

(問) 조선은 쏘비에트화하지 않는가?
(答)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서 봉건 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問) 조선 통일 문제에 있어서 통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答) 우리는 速한 기한 내에 실현될 줄 안다. 현재 우리 당에서 각 당과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데 통일에는 공통된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원칙은 3국 외상 회담의 결의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있다.

(問) 임정과 인공의 합작은 가능한가?
(答) 현재 정당 합작으로만 가능하며 임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임정도 참가할 수 있으나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참가할 수 있다. 현재 조선의 통일은 위로 국제적 압력과 밑으로부터의 하부 압력 즉 민중의 압력에 의하여 모스크바 원칙으로 통일될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問) 임정을 주로 한 전번 탁치 반대 데모에 대한 견해 여하?
(答) 金九 씨의 반탁 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탁치의 본질적 설명을 하지 않고 고의로 일본 제국주의의 위임 통치제와 혼동시켜 민족을 의혹케 하고 반 연합국적 조직을 양성하여 민중을 나쁜 의미에서 혼란케 하고 있다.

(問) 데모와 군정의 태도는 어떠한가?
(答) 군정청에서는 이러한 데모를 원조하는 것처럼 보여 이상스럽게 생각된다. 라디오 사용을 허가하고 또 시위 운동을 칭찬하는 언사를 함은 군정이 반 연합국 시위를 원조하는 것이다. 하지 중장은 이것을 말하여 조선 사람의 반탁 운동을 마치 십자가적 운동으로 나와 그 당시 이를 방해하면 반대의 효과가 나타날까 두려워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金九 씨가 그 취지를 잘 모르는 것은 자기도 안다고 하였다.

(問) 군정의 정책에 대한 소감 여하?
(答) 최근의 경향은 반민주주의에 대하여 관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에는 호감을 갖지 않는 방침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 증거로는 지방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활동은 억압하고 현재 남조선에서는 300명 이상을 유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친일파 관리들의 반민주주의적 증오심에서 나온 현상이다.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런데 1월 8일 작성된 주한미군 정보 문서에는 이 회견에서 박헌영의 발언이 다른 내용으로 파악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이 1월 5일 미국인 및 조선인 기자들과 한 인터뷰는 매우 흥미롭다. 박헌영은 조선에 대한 일국 신탁 통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조선이 소련에 편입될 가능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박은 고산주의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대감과 지리적 난점 때문에 그 같은 편입이 이루어질 만큼 조선이 자주 독립 민주 국가로 변화하는 데는 10년 내지 20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박에 따르면, 소련은 조선에 대해 침략 정책이나 식민지화의 야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민주적 방면으로 최대한의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한다. 그는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했다. (…) 조선 신문에 보도된 인터뷰 내용은 위의 인터뷰에서 박이 행한 실제 언사보다 상당히 완화된 상태였다. 일국 신탁 통치안 혹은 소련연방 편입에 조건부로 요구되는 기간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65쪽에서 재인용)

조선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는 이 내용이 어떻게 이 정보 문서에 올라갔을까? 자료는 미국인 존스턴 기자가 작성한 것이었고, 하지가 이것을 채택시킨 것이었다. 정용욱이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72~73쪽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중 1월 6일의 일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하지 장군, 주한 미군사령부 정례 참모회의에서 정보부장 니스트에게 존스턴의 기사, 특히 송신 허가 되지 않은 존스턴 기자의 메모가 매우 흥미롭다고 주의를 환기시킴.
이 참모회의에 참석했던 군 사관 킵은 인터뷰에 참석했던 미군 장교가 존스턴이 박헌영의 발언을 완전히 곡해하여 써 놓았다고 발언했음을 같은 날짜의 <사관기장>에 남김.
공보국의 뉴먼 대령조차 이 보도의 진위를 의심하여 이를 스노 기자에게 확인하였음. 스노는 이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박헌영의 견해가 아닐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함.


박헌영은 1월 12일 존스턴을 방문해 존스턴의 기사가 사실과 다른 데 유감을 표명하고 정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라디오 방송에서 조선어로 방송되고 서울 중앙방송국이 이를 중계 방송하자 <동아일보>가 1월 16일자, 17일자, 20일자에서 다루는 등 우익지들이 대서특필하고 한민당은 박헌영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15일에 발표했다.

박헌영은 1월 16일 기자 회견을 열어 존스턴의 기사를 반박했다. 17일에는 문제가 된 5일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미국 <Stars and Stripes>지 콘웰 기자가 박헌영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언을 했고, 18일에는 같은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12개사 신문기자단이 연명으로 존스턴의 기사가 사실무근의 허위보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스턴은 18일에도 기자 회견에서 자기 기사가 허위가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 269~275쪽)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53~66쪽에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허위 기사와 관련된 주변 사정을 세밀히 검토하여 맥아더 사령부와 남한 군정청이 한국 여론을 오도하는 기사 조작에 개입했을 개연성을 상당히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존스턴의 조작 기사에는 하지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더 분명히 드러나 있다. 남한을 반공국가로 만들어 미국의 영향 아래 두려는 맥아더의 구상이 모스크바 회담을 계기로 더욱 구체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인 숭배를 지향한 박헌영의 권위주의가 존스턴 조작 기사 사건의 배경 조건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박헌영에 대한 공격이 바로 좌익의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헌영의 관념주의적이고 대립지향적인 성향이 공격을 쉽게 불러올 수 있었다. 1929년과 1930년 국제레닌학교 재학 때 교수단의 평가에서 "관념적 성향"에 대한 지적을 거듭 받은 일이 있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 157, 167쪽) 1925년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직속 상사인 사회부장 유광렬의 회고가 인상적이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나와 같이 근무할 때 나에게 냉혹하게 대했다. 당시 사회부장은 좌익 청년에게 매 맞는 자리였다. 좌익 단체인 화요회, 서울청년회, 적박단 등은 신문 기사가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나오면 신문사에 몰려와 야료를 부리고 사회부장과 취재 기자를 때리곤 했다. 이럴 때면 같은 좌익 기자지만 김단야는 "왜 그러느냐.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렸다. 이에 비해 박헌영은 말리는 김단야를 못마땅하게 생각, "야, 너는 유광렬 개인을 위해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고 빈정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하곤 했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 100~101쪽에서 재인용)

에드가 스노가 존스턴의 조작 기사가 사실이 아닐 것을 "단호하게" 추측했다고 하는데, 누구라도 다른 추측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등지고 소련만을 존숭한다는 것은 극우파의 상투적 공격이었다. 설령 박헌영이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그런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존스턴 기사의 허위를 증언한 기자단의 소속 12개사가 어디어디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12개사라면 좌익 신문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데마고그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데마고그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뒤집힌 데도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에 공산당도 찬성한 데서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공산당의 기본 입장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되 신탁 통치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우익의 무리한 반탁 운동을 비판하는 '반 반탁 운동'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우익과의 차별성을 너무 강조해서 '반 반탁 운동'이 아닌 '반 반탁'을 외쳤다. '찬탁'으로 쉽게 오해받을 만한 구호였다. 그 상황에서 '찬탁'을 외치는 터무니없는 존재로 공산당은 일반인의 눈에 비쳐지고 있었고, 존스턴의 기사 조작은 그런 인상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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