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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피를 먹은 일본, 기억상실증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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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피를 먹은 일본, 기억상실증에 걸리다!

[프레시안 books] 마루카와 데쓰시의 <냉전문화론>

서울도 평양도 도쿄도, 동경(東經) 135도 표준시간선을 쓴다. 따라서 시차가 날 리 없지만,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엄연한 시간 감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냉전 문화론>(장세진 옮김, 너머북스 펴냄)의 저자 마루카와 데쓰시라면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진행 중인 냉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일본은 문자 그대로 종결된 '전후(戰後)'를 살아가고 있다고.

마루카와는 2008년 국내 소개된 <리저널리즘>(백지윤·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을 포함한 여러 저작물에서, 반복적으로 '동아시아'라는 사고틀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학자다. 그의 눈에 비친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성립 조건 그 자체에 냉전이 개입해 있는, 냉전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따라서 모든 국가들은 불완전한 국민국가이며, 그 체제를 상대화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체라는 사고틀을 필요로 한다.

동아시아 냉전 구도의 결절점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마루카와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한국 독립이 좌절되는 과정으로서의 내전"이자 "미소 동서 진영이 첨예하게 맞섰던 최전선"이며, "중일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과 일본이 참가한 전쟁"이라는 세 층이 중첩된 전쟁이었다. 또한 대만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생멸과 직결되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고착화된 냉전을 1945년 일본의 종전과 그 전의 전쟁 과정과 함께 다루는 얼개를 마련해야 하며, 이런 얼개를 바탕으로 한 대화가 그 전쟁들의 자장이 미친 '동아시아' 차원에서 벌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냉전 문화론>(마루카와 데쓰시 지음, 장세진 옮김,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은 양 태연하게 전후의 종결을 선언(1956년 일본 <경제백서>)하고, 동아시아에 등을 돌려왔다. 그리고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칼 슈미트의 "적이 누구인지를 선택·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행위"라는 말에 비추었을 때, 이때 아시아에 대한 적대는 '가짜'이며 따라서 주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과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적대성은 미소 대립에 따라 '부과된' 것일 뿐 실제 일본이 '초래한' 것은 과거 침략자-식민지 적대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사(擬似) 적대성 속에서 일본이 누린 것은 상당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얼떨결에 독립을 이루었고 불완전한 전범 처리로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으며, 한국전쟁 후방의 병참기지로서 전후 부흥기를 맞이했다. 덧붙여 '히로시마적 기억 방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원자폭탄 투하 피해국으로서의 상상도 가능하게 했다. 마루카와는 일본의 이 기형적 탄생과 아시아 제국(諸國)과 끊임없이 불화를 겪는 역사의식을 냉전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 체제의 구별에 따라 나눠진 국제 정치의 공간 편성을 가리켜 온 냉전 구조는 1990년을 전후로 하여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그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최근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한반도의 긴장과 대만 주변의 해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앞서 지적한 서울(평양)과 도쿄 사이의 '시간 감각'은 이 지점에서 어긋난다.

그러나 입 아프게 반복돼 온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물론 지식계에서조차 제대로 공유되고 있지 않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일본은 이 냉전 구조 속에서 '의식적인 방관자'의 역할을 해왔다. 객관적으로는 한국전쟁과 전쟁의 자장 속에서 타국의 고통에 영향을 미쳐 왔지만 그것을 망각해 온 셈이다. 전후의 미국식 민주주의와 고도 경제 성장은 달콤했으며, 그렇기에 실제로는 선혈이 낭자한 쇼와(昭和·1926~1989년) 시대가 '노스탤지어'란 말로 둔갑해 자라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냉전 문화론>이 쓰인 문제의식에 해당한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 저자가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본의 탄생 비화가 소거되고 아름다운 전후 풍경만 남게 된 과정을 문화 속에서 분석한 작업물이다. 표지에 쓰여 있는 대로 '1945년 이후 일본의 영화와 문학은 냉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그 주제다.

기자는 책을 집어 들면서부터 내용을 예감했다. 일본 유학 시절 쇼와 시대를 향수로 점철한 영화나 8월이면 브라운관을 들썩였던 '일본' 전몰자들을 다룬 비장한 진혼 프로그램에 위화감을 느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원폭의 아이>(1952)부터 <팔월의 광시곡>(1991)까지 나르시시즘적인 피해자 의식을 강조한 원폭 소재 영화 속에서도, 반전 구호는 공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책의 주된 작업은 전후를 노스탤지어로 포장할 수 있게 한 '내셔널리즘 작품'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그보다 나아가 있었다. 그는 평화로운 전후 풍경에 균열을 일으켰던 아주 작은 순간들을 발굴하고 의미를 복원해 내는 작업에 집중한다. 번역자 역시 이러한 '비주류 계열'에 해당하는 작업들을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야심이었다고 설명한다.

가령 구로다 기오라는 시인은 전후 GHQ에 의해 행해진 일본의 토지 개혁과 일본 혁명 운동의 좌절을 중국이 겪은 전쟁의 파동 속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드문 경우였다. 구로다는 30년대 일본인들의 만주 이주로 중국 극빈자들이 중국공산당 부대로 전신(轉身)한 것과, 항일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의 토지 개혁이 1950년대 일본 사회와 혁명 운동을 동요시킨 접점을 포착해 낸다. 이렇듯 항일 전쟁에서부터 국공내전, 한국전쟁까지 22년 간 중국이 겪은 전쟁은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관련해 이 세 개 가운데 주로 첫 번째 전쟁만을 기억한다.

전후 시베리아 전범 수용소에서 혹독한 포로 생활을 겪었던 시인 이시하라 요시로의 감각도 예민했다. 많은 포로들은 일본에 귀환해 스스로를 '억류자'라 부르며 반 스탈린주의, 반소·반공 의식의 기수가 됐지만 이시하라만은 자신의 '억류' 생활을 무매개적으로 '전쟁 책임'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1953년 이후 냉전 구조가 점차 현실화됨에 따라 '연합국 대 추축국'이라는 기존 구도가 희미해지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을 조건이 약화되었는데도 그는 '누군가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고뇌한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어찌되었든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나는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 결국 누군가는 책임질 차례가 되어 있던 '전쟁 책임'을 어찌되었든 자신이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노트> 중)

그러나 불행히도 사례로 제시된 텍스트들은 거의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라 그 맥락을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다. 마루카와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논쟁들도 일본 비평계에 대한 얄팍한 지식만으론 따라가기가 버겁다. 저자는 <냉전 문화론>이 '커다란 구도'의 일부분을 형성할 뿐이라면서 한국·북한 등 다른 시점에서의 냉전 문화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커다란 구도'는 꿈꾸기 어려운 기획임을 절감하게 된다. 만약 같은 작업이 한반도(혹은 중국·타이완·오키나와) 판 냉전 문화론에서 반복된다 하더라도, 먼저 분석된 작품들이 다소는 읽힐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 문화론>은 정말이지 고독하다. 마루카와는 왜 태반이 번역은커녕 간단히 소개조차 되지 않은 비주류 계열 작품들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매달려야 했을까. 책장을 덮으며 그가 쓸쓸한 분투를 왜 시작해야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루카와는 후기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중국 연구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기를 언급한다. 일기는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1937년, 일본 점령 하에 있던 베이징에서 쓰인 것으로 시기는 이미 열렬한 중국 항일 운동가들은 이미 남방 전선으로 떠나고 난 뒤였다.

"고립된 학문의 권위가 통쾌하게 실추당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대다. 인간적인 능력, 혹은 기본적인 인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었을 때의 쓸쓸함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다."

마루카와는 이 일기가 "마치 역사의 에어포켓에 들어가 있는 듯한 감각"을 갖고 쓰인 것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점령 하 베이징에서는 때때로 피를 볼 정도의 치열한 교섭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다케우치는 그러한 중국 사회를 헤치고 들어가기 위한 방법(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지식인은 자신이 역사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결여와 무력감에 '쓸쓸함'이란 단어를 내뱉게 된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일본이 다케우치가 말한 의미에서 쓸쓸한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숨 막히는 전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 지식인의 고뇌를, 냉전마저도 식은 일본 사회에서 저자 홀로 붙들고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고독 속에서 역사적 '주체'가 되기 위해 자료들을 붙들고 해석하고 쓴 것이 아닐까. 칼 슈미트의 '주체의 행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떠올려 볼 때 일본은 진짜 적대성을 은폐한 이상, 늘 불완전한 지반 위에 흔들리는 열도인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예민한 지식인이 이 흔들림을 포착한 것이다.

<냉전 문화론>을 힘겹게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엔 문득 예전에 본 하라 가즈오의 <가자, 가자, 신군>(1987)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남태평양의 뉴기니아에 파병됐던 한 남자가 군국주의에 대한 피해에 사로잡혀 당시의 상관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내용이다. 오쿠자키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천황의 '인간 선언'에 충격을 받은 뒤 자신을 전쟁에 내몰고 관념적으로도 배신을 해 버린 그 신(神)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데 온 인생을 건다. 그는 당시 궁지에 몰린 전선에서 상관의 명령에 의해 전우 두 명이 사살됐으며, 자신과 동료들은 강요에 의해 그 인육을 먹었다고 주장한다.

오쿠자키는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찾기 위해 광적으로 헤맨다. 그러나 그가 찾아갔을 때, 전 상관들은 한 가정의 인자한 할아버지이거나 불쌍한 환자일 뿐이다. 전쟁 기억은 까마득하다. 그 간극엔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개인들의 평범한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다. 그 평범한 감정들만 갖고 저 세상으로 가고 싶은 상관들은 오쿠자키에게 호통을 친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고. 남은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살면 안 되냐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평범한 삶을 응원하기에,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져가며 책임을 묻는 이 오쿠자키라는 남자의 생애가 너무 쓸쓸했다. 광기에 기댔던 그는 자신에게 인육을 먹으라고 강요한 상관의 동생에게 총을 쏘고, 영화가 개봉한 시점에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1963년생으로 종전 한참 후에 태어났으며, 냉철한 분석과 아찔한 열정으로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키는 마루카와 데쓰시를 오쿠자키와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망각에 맞서는 사투가 얼마나 고독한지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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