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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반탁', 애국심만으로는 설명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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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반탁', 애국심만으로는 설명 못한다!

[해방일기] 1946년 1월 13일

1946년 1월 13일

지난 8월 시작한 '해방일기' 작업이 반년이 되어 간다. 애초에 5년간 작업을 구상했다가 지금은 분단국가 건설까지 3년간으로 계획을 줄여놓고 있는데, 반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제일 아쉬운 점이 38선 이북의 상황 전개에 충분한 비중을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접할 수 있는 연구 자료의 분량이 너무 적다. 이북 상황에 관한 자료 범위를 확충하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이 문제로 인해 이북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큰 걱정이다. 1946년 1월까지 이북 지역에서는 해방으로부터 독립으로 나아가는 길이 잘 펼쳐지고 있었다. 2월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3월의 농지 개혁, 8월의 북조선노동당 창당을 지나 11월과 1947년 2월의 인민위원회 선거까지, 큰 흐름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순조로운 흐름이 어떤 고비에서 어떻게 민족 분단과 내전이라는 파국을 향해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일지, 아직도 시야에 분명히 들어오지 않는다. 억지로 서두를 일이 아니다. 꾸준히 흐름을 따라가면서 계속 면밀히 살펴볼 일이다.

이북 지역의 상황 전개가 순조로운 첫 번째 이유는 점령군의 역할이 소극적이라는 데 있었다. 1945년 7월의 미국 원자폭탄 실험 성공에서 1949년 9월의 소련 원폭 실험 성공까지 4년 동안 소련은 미국에 대해 전략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동유럽의 위성국가 확보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모든 지역에서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 혁명 이후 가장 큰 공산주의 승리라 할 수 있는 중국의 공산 혁명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군사적 대결을 피하는 만큼 외교적 협력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강압적 성격의(기간을 길게 잡고 임시정부 구성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신탁 통치안에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강압적 성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그런 입장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결정된 신탁 통치안에 만족하지 못하는 미국 극우파의 반대를 극복하고 국제 협력에 기초한 신탁 통치안을 관철시키려는 동기가 소련에게 있었다고 생각된다.

북한 점령 정책에서도 갈등을 최대한 피하려는 기조를 알아볼 수 있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 혁명을 서두르도록 재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급격한 확장을 유도하려 애쓰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평안남도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좌익이 민족주의자들과 대등한 지분을 갖게 한 일 정도가 지적되는데, 1945년 8~9월 시점에서 '좌익'의 의미를 감안해서 이해할 일이다. 일제하에서 '좌익' 딱지를 붙인 범위는 통상적 의미의 사회주의자를 넘어서는 광범한 것이었다.

공산당(북조선분국)에서 김일성이 주도권을 쥐는 데는 소련군 당국자들의 지지와 지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독립동맹계(연안파)가 귀국하지 않은 시점에서 김일성의 빨치산파와 경쟁하는 공산주의 세력은 국내 공산주의자들(국내파)뿐이었다. 김남식은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에서 두 집단의 기본 성격을 이렇게 요약, 대비했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구체적인 투쟁과 실천 속에서 단련되었다기보다는 사상-이론만을 습득한 관념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상-이론적인 습득이라는 것도 체계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고 불 수 있다. 이들은 합법적인 정치 활동의 실무 면에도 어두울 뿐 아니라 투쟁 경험의 결여로 혁명 발전에 따르는 새로운 사업 방법 등을 개발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 구조에서 최고 책임자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으며, 일제하의 조선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다는 데로부터 서울의 박헌영 중심의 당 재건파와의 연계를 중요시하고 그를 중앙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15년 이상의 간고한 빨치산 투쟁을 통해 이들은 사상 의지를 강화시켜 나갔으며 주민들의 호응과 지원 속에서 활동해야만 했기 때문에 창조적인 대중 사업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이들은 해방 후 북조선 사회의 변혁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들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세력들과는 달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더불어 입북한 항일 빨치산 세력이 당시 소련으로부터의 신임이 가장 두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30~31쪽)

뒤에 입국할 연안파와 함께 빨치산파는 '통일 전선' 전략에 익숙했고, 김일성은 이 전략에 의거해 지도력을 키워갔다. 찰스 암스트롱은 11월 하순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이 전략이 이북 공산당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본다.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 108~111, 415쪽)

이북 지역에서 통일 전선의 가장 큰 틀은 조만식(1883~1950년)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조만식은 1920년대에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1930년대에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뒤 일제 말기에 협력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홍명희, 안재홍, 송진우와 같은 반열에서 민족주의자의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평안도 지역 장로교회에서 큰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만식의 명망은 좌익 인사들도 널리 흠모하는 것이어서 해방 직후 공산주의 지도자 현준혁(1906~1945년)도 9월 초 암살당할 때까지 평남 인민위원회에서 그와의 협력을 적극 추구했고, 김일성도 귀국 후 그를 자주 찾았다. 김일성이 조만식에게 정당 결성을 권유하고 자신도 참여할 뜻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믿어지지 않지만, 11월 초 조선민주당 창당 때는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의 한 사람인 최용건이 참여했다.

조선민주당은 우익 정당으로서 이남의 국민당보다는 한민당에 가까운 강경 노선이었다. 암스트롱은 조선민주당의 노선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만식은 해방 이전에도 그랬지만, 해방 이후에도 개혁에 대해 점진적으로 접근하였다. 1945년 10월 조만식은 조선민주당 정강에 모든 친일파들의 즉각적인 해임 조항 포함을 반대했다. 조만식은 3장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지방 농민연맹 지국들이 1945년 가을부터 시행하고 있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수확분배에 있어서 '3-7'제를 반대하였다. 조만식은 '3-7'제가 지주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고, 대신 더욱 온건한 '4-6' 분배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만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27일에 '3-7'제를 적용하였다. 조만식은 항의의 뜻으로 이틀 동안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회가 '자본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조선 탄생>, 196~197쪽)

남한의 미군정조차 표방한(실행을 위한 노력은 약했지만) 3-7제를 반대했다면 대단한 반동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처럼 공식적으로 펴는 주장은 설령 '반동'이라 하더라도 '악질적 반동'은 절대 아니다. 조선민주당이 지주층 입장을 대변하는 우익 정당으로서 지주층의 이익을 정책에서 추구하는 것은 반동이라도 '건전한 반동'이다.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통일 전선의 협력자로서 결격 사유가 될 수 없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소련 점령군의 조선민주당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정치와 언론의 자유가 상당 수준 보장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우호적 관계가 반탁 운동을 놓고 깨어져버렸다. 암스트롱은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조만식의 격렬한 반대에 다소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북조선 탄생>, 199쪽) 로마넨코 민정 장관이 열심히 설득에 나서서 적극적인 제안을 한 사실을 보면 소련 측은 이 문제를 놓고도 충분히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던 모양이다.

이 충돌로 인해 조만식은 연금 상태에 놓이고 조선민주당 당수직에서 밀려났다. 최용건이 장악한 조선민주당은 대대적 '반동 숙청' 작업을 벌였다. 통일전선의 오른 쪽 축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왜 조만식은 소련 측의 우호적 제안까지 물리치며 극단적 반탁을 주장했을까? 임영태는 이렇게 해석했다.

조만식의 반탁 주장은 분명 민족주의자로서 신념의 소산이었다. 그의 행위가 과연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었느냐, 아니면 잘못된 것이었느냐는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조만식의 행위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권력에 대한 추구와는 비교적 무관한 '민족적 양심'에 대한 개인의 소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그 나름의 순수성은 인정될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남한의 이승만-한민당의 반탁운동과 조만식의 그것은 차이가 있었다. (…) 그런 점에서 조만식은 일관되게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으며, 그의 반탁도 그런 민족주의자로서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김구의 반탁 운동이 가진 순수성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78~79쪽)


반탁 정국을 살펴보며 나는 '순수성의 신화'를 돌이켜볼 필요를 느낀다. 임영태는 김구의 순수성과 같은 선상에서 조만식의 순수성을 인정한다고 했다. 김구의 '순수한 애국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당시 상황에 대한 실질적 이해를 가로막는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김구의 반탁 운동에 대해 내가 '극단적' 반탁이라고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합리적' 반탁과 구분하는 뜻이다.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에서 내놓은 것이 합리적 반탁이었다. 신탁 통치를 반대하지만 그 제안자를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데, 제안자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안한 것일 테니,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안자들에게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커밍스는 모스크바 결정이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의심하거나 한국인에게 후견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신탁 통치 결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고까지 해석했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17쪽) 엄밀히 따지면 옳은 말이다. 신탁 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민족 자존심에 저촉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스크바 결정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자세였다.

반탁 운동의 길을 열어준 것은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이 길을 앞장서서 달린 것은 김구였다. 그래서 "김구의 반탁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은 한반도의 분단을 원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렇다면 반탁 운동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원하지 않던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김구가 무리한 반탁 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 조직 수립 등 임정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략가로서는 이승만이 김구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반탁 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조만식이 극단적 반탁으로 주둔군 및 공산당과의 협력 관계까지 포기한 데 역시 애국심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전략적 판단의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애국자였다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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