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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대통령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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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대통령 어디 없나요?"

[프레시안 books] 장자오청·왕리건의 <강희제 평전>

정치는 전투다. 권력을 장악하고 또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싸움이다. 정치는 비전 게임이다. 구성원 대다수가 갈망하고 동의하도록 미래를 보여주는 희망의 메신저이다. 정치는 자기 수양이다. 스스로 부지런히 관리하여 솔선수범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자신을 완성해가는 힘든 수양 과정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청 성조 강희제(강희는 연호)는 이러한 정치를 실천한 대표적인 모델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불세출의 영웅이거나 뛰어난 천재가 아니라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 강희제였다.

그런 인간 강희제(본명은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1654~1722년)를 소설처럼 읽기 좋게 그려준 책이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이준갑 옮김, 이산 펴냄)라면 장조성(蔣兆成·장자오청)과 왕일근(王日根·왕리건)의 <강희제 평전(康熙傳)>(이은자 옮김, 민음사 펴냄)은 그 방대한 내용과 치밀한 사료 고증 때문에 완독을 위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책이다.

모든 주변의 중국화라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기획된 인민출판사의 역대제왕전기 시리즈의 하나인 탓인지 "만주족의 어린 황자 현엽에게는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 스스로 만주족과 한족의 결합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11쪽)는 출발이나 곳곳에서 한족과 만주족의 일체화로 아름다운(?) 결론을 맺어가는 부분들이 인내를 요구한다.

▲ <강희제 평전 : 민생을 살펴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통합의 지도자>(장자오청·왕리건 지음, 이은자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중국의 동남쪽으로부터 남부 및 대만, 티베트, 신강, 몽고, 흑룡강 북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강역을 중국으로 만들어가는, 과도한 중국 중심주의적 시각의, 재미없는 강희의 전투 장면에다 400쪽 넘는 분량을 할애한 구성 때문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민생을 챙기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아들들 때문에 고민하는 인간 강희제를 다루는 후반부로 갈수록 위대한 통치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 <강희제 평전>이다.

세계사적 힘의 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중국의 힘의 원천은 광대한 영토, 많은 인구, 위대한 전통과 관련이 있다. 서양의 잣대로 중국을 보지 않고, 중국의 잣대로 서양을 보아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의 정신을 지키며 서양의 기술을 몸으로 익힌(11장) 정치가 강희는 그러한 전통의 실례를 선구자적으로 잘 보여주며 청나라를 당시 지구상 최대 강국으로 키웠다.

그러니까 오늘날 960만㎢의 땅과 13억4000만 명의 인구, 중체서용의 전통으로 강국이 된 한족의 나라 중국의 기초는 100만 명이나 되었을 만주족이 만들어준 셈이다. 박은식은 '꿈에 금 태조를 뵈었다'는 <몽배금태조>라는 책에서 여진족을 우리 민족의 형제로 본다. 이 여진을 청 태종 황태극(皇太極)은 만주(Manchu, 문수보살의 만주어)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였고, 그의 손자 강희와 강희의 넷째 아들 옹정과 옹정의 넷째 아들 건륭에 의해 현대 중국의 터전이 갖추어진 것이다.

강희는 61년간 제위에 있었고, 건륭은 할아버지를 너무 존경하여 60년만 하고 물러났다. 건강과 정력과 투철한 권력 의지가 없으면 장기 집권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장기 집권은 대부분의 경우 부패와 타락, 그리고 엄청난 후유증을 낳는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장기 집권을 하고도 최고의 태평성대인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룰 수 있었는가. 이 책은 위대한 통치자의 그 면밀한 통치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다.

16세의 "강희는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옛사람의 계책을 이용"해(44쪽) 권신 오배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오랫동안 관찰하고 적의 수괴를 딱 한 번의 기회에 제압하고 "일시 부화뇌동하여 이 사건과 연루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일률적으로 사형을 면하고 가벼운 죄를 받"게 함으로써 "어린 강희제는 지혜로움과 신중함 그리고 용감함과 정직성을 보여 주었다."(46~47쪽) 한나라 고조 유방이나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권력을 엿볼 만한 사람은 깡그리 도륙함으로써 항구적인 권력을 장악한 리더십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권력을 확고히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강희는 젊은 황제로서의 냉철함, 견고함, 결단력, 담력을 충분히 드러냈다."(110쪽) 황제에의 권력 집중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상가희, 경정충, 오삼계 등 삼번(三藩)에 대해 '분할과 통치'라는 기본 원칙을 견지하며 세력을 약화시킨 뒤, 한족들의 집단 반발에 이르지 않도록 "한인 장수와 병사를 존중하며 군대 내의 단결에 주의할 것을 주지"(181쪽)시키는 등 치밀한 계산과 대응으로 진압하였다.

시련을 이겨낸 28세 강희는 신하들에게 절대로 책임을 돌리지 않았고, 투항자는 모두 용서해주었으며, 사람을 "임명하기로 결정한 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뢰를 가지고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다."(274쪽) 그렇게 대만 정벌에 성공하였고, 전면전을 치르지 않고 러시아와 조약을 통해 흑룡강 일대 강역을 확정하였고, 갈단을 친정함으로써 몽고와 서북부 중국을 안정시켰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동원하여 티베트를 복속시킴으로서 오늘날 금계(金鷄)를 닮은 중국의 판도를 만들어냈다.

강희가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이 책의 후반부이다. 이 책을 모두 읽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은 역자의 얘기처럼 관심 분야의 장만 찾아서 읽어도 좋으며(732쪽), 특히 7장에서 11장까지의 독해를 권한다. 강희는 한족과 만주족 모두에게, 신하와 백성 모두에게, 서양인 고문들과 중국인 모두에게 확실한 앞날을 보여주었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강희는 "백성의 안정이 바로 정권 안정의 전제"이고, "미풍양속을 수립하는 것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중요한 전제"라고 생각했다.(465쪽) 동아시아 전통시대 유학을 존숭하는 정치가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였다. 문제는 솔선수범과 실천을 했느냐의 여부이다. 강희는 그 어린 나이에 집권한 이후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절검을 실천하였다. 강희를 옆에서 지켜본 프랑스 선교사 부베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 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476쪽)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동안의 절약은 누구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로서 평생 거친 옷을 입고 궁궐 수리 비용까지 꼼꼼히 따지며 아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제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청렴한 관리가 계속 배출되고 풍속이 되었다. 이에 좋은 관리가 부임하면 "백성들이 관원의 이임을 만류하여 머물러 주기를 청원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546쪽)

강희의 근면과 절제, 그리고 건강과 정력과 의지는 그의 부지런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제국의 세세한 사무를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공부에 대한 열정이었다. 강희는 황하와 회수를 다스리는데 이전 어떤 황제들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치하의 원칙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는 치하와 관련된 옛 서적을 탐구했다."(598쪽)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국의 산천 도로에 대해, 더욱이 서남과 동북의 지형과 기후 및 물산과 민족 상황을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654쪽)

서양의 과학 지식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가까지 지내며 그들과 수학적 논쟁을 할 정도로 대수학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강희는 공부를 향한 채찍질로 자신의 정치적 완성을 지향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공부를 통한 자기 수양으로 이루어짐을 몸소 보여주었다. 35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을 둔 그는 자식들에게도 근면한 공부, 일상생활에서의 절약, 부지런한 공무 수행을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요구했다.(12장)

강희는 "하루 종일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602쪽) 그의 공부는 유학, 특히 주자학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짐이 일생 동안 배운 바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서생의 탁상공론이 아니었다."(608쪽) 주자학을 탁상공론이 아니고 천하 경영의 학문으로 본 강희의 시각이 어떤 '학문적 깨침'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정치적 전략' 때문이었을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책이 보여주지 못한 것은 그러한 한계들이다. 백성들이 규합하여 상소하고 청원하는 데 대하여 강희가 병적으로 반감을 표시한 것을 그의 불철저한 관료 정치 때문이라고 보는 저자의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소수 집단의 지배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집단행동에 대한 정치적 공포 등이 고려되지 않은 판단으로 보인다.

최고 통치자로서 강희의 정치적 선택과 외로운 결단 등을 다각적으로 부각시켰더라면 강희를 보는 현대적 의미가 더 살아났을 것이다. 물론 강희를 정치적으로 읽으려는 평자의 기대 때문이겠지만, 방대한 사료를 주무르는 역사학 전문가에게 사회과학과 접목된 인문학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소망일까.

한자의 한글 독음이라는 원칙이 '갑자기' 무시된 현대 한국에서 몽고 이름, 만주 이름 표기에 혼란스러워하며 고생하신 역자 또한 사회과학 용어에 익숙했더라면 거친 전쟁사 번역이 덜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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