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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갈등, 효과적 대응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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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탁 통치 갈등, 효과적 대응책 있었다

[해방일기] 1946년 1월 11일

1946년 1월 11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우익 진영과 삼상 회의를 지지하는 좌익 측 각 정당은 其間 미묘한 움직임으로 개별적 회합이 누차 속행되고 있던 바 7일 시내 모처에서 人民黨代表 李如星·金世鎔·金午星, 韓國民主黨 代表 元世勳·金炳魯, 國民黨 代表 安在鴻·白泓均·李承複, 共産黨 代表 李舟河·洪南杓 諸人이 회집하여 간담회를 열고 현하의 긴급 제 문제를 신중 토의한 결과 의견의 일치를 보아 별항과 같은 人民黨, 韓國民主黨, 國民黨, 共産黨의 4당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혼돈하던 정국은 통일일로의 노선을 걷게 되어 이 서광은 박두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자못 관심을 끌고 있다.

즉, 공동 성명서의 내용 중 탁치 문제를 단적으로 해명하면 신탁 통치라는 제도는 배격하되 연합국의 우의의 협조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4당 회의 관계로 7日 夜 임시정부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5대 정당 대표 회의는 하루나 이틀 연기될 것으로 보이며 이상 4黨에서는 8일 新韓民族黨을 참가시켜 5대 정당이 계속하여 시내 모처에서 민족 통일 촉성에 관한 토의를 계속 중이다.

◊ 4당 공동 코뮤니케

1) 모스크바 三相 會議의 조선 문제 결정에 대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국제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신탁 제도)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케 함.

2) 테러 행동에 대하여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 행동을 감행함은 민족 단결을 파훼하며 국가 독립을 방해하는 자멸 행동이다. 건국의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는 모든 이러한 반민족적 테러 행위를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모든 각종 비밀적 테러 단체와 결사의 반성을 바라며 그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각자 진정한 애국운동에 성심으로 참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46년 1월 8일
朝鮮人民黨 / 國民黨 / 韓國民主黨 / 朝鮮共産黨 (<조선일보> 1946년 1월 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시정부 귀국 후 '민족 통일 전선' 결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해방 후 몇 달 동안 정치적 분열 추세의 강화에 대한 우려가 짙어지고 있었다. 임정은 분열 추세를 막을 가장 강력한 구심력을 가진 존재로 널리 기대를 모았다.

민족 통일 전선을 놓고 임정 안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한국독립당(한독당)을 배경으로 한 우익 성향 주류는 좌익과의 합작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임정의 법통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통합을 중시했다. 한편 조소앙, 김원봉 등 비주류는 좌우 합작을 중시하고 이를 위해서는 임정의 법통도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12월이 지나가는 동안 좌우 합작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비주류가 적극적 정치 통합을 위해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가 임정 지도부의 승인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외상 회의 결정이 알려지자 독단성이 강한 극단적 반탁 노선에 임정 지도부가 휩쓸리고 공산당이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면서 정국이 대결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다. 임정 비주류 등 합작을 중시하는 정치인들이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대응을 서두른 결과가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였다.

간결한 내용의 4당 코뮤니케에는 두 개의 현안이 언급되었다. 3상 회의 결정 문제는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문제였고, 정치 테러 문제는 심각성이 꾸준히 늘어나 온 문제였다. 11월 20~22일 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서 크게 드러난 테러 문제가 12월 29일 조선인민보 습격과 그 이튿날의 송진우 저격으로 정치계의 중심 문제로 부각되었다. 4당 코뮤니케가 나오던 시점에서도 국군준비대 탄압, 대동일보와 자유신문 습격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정치 테러 문제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었지만,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4당 코뮤니케가 효과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3상 회의 결정은 지지하되 신탁 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대응한다는, 중층적인 접근 방법이었다. (많은 연구 문헌에서 '중층적' 대신 '이중적'이란 말을 쓴 것을 보는데, 마치 같은 차원에서 이율배반을 품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말이라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취지에 대한 지지와 방법에 대한 비판은 다른 차원의 일이므로 '중층적'이란 표현이 적합하다고 본다.)

이 중층적 접근 방법을 가장 일관되게 제창한 것이 여운형의 인민당이라고 서중석은 본다.

(여운형은) 조선의 지도자를 신랄히 비난하고, 삼상 회의 결정은 지지할 점도 있고 배척할 점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지지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조공을 비판했다. (…) 여운형은 이 기자 회견에서 신탁 통치 문제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고 대중을 어지럽게 하고 신탁 통치를 이용해 민족을 재분열시킨 것은 중대한 과오라고 반탁 투쟁을 비판했다. 사실 1월 14일 이전인 1월 7일 4당 회의를 앞두고 나온 이여성의 담화도 여운형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이여성은 이날 삼상 회의 의도는 감사하지만 신탁 통치라는 용어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좌우가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하자고 역설했다.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160~161쪽)

서중석은 여운형의 입장이 "좌우 합작에 의해서만 통일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좌우 합작으로 삼상 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반드시 임시정부 수립이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높이 평가했지만(같은 책 166쪽), 그 입장이 투영된 4당 코뮤니케는 불발탄으로 끝났다. 안재홍이 1948년 6월경에 쓴 회고를 보면 1차적으로 한민당에, 2차적으로 공산당에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46년 1월 6일, 탁치안으로 인한 좌우 분열의 기세를 완화하고 결합 협동의 길을 열고자, 국민당-인민당-한민당-공산당 등 4대 정당의 대표와 임정 대표들이 회동하여 십수 시간 철야 토의한 결과, 소위 '4당 코뮤니케'란 자 성립되었으나, 그 제3항에서 "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소위 탁치안은 임시정부 수립된 후 독립 정신에 준하여 해결키로 함"으로 약정한 것이 그 어구 철저치 못하다고 하여, 일반의 반대 높았고,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의 소리 있고, 한민당에서는 그 당 대표 김병로-원세훈 양씨를 심히 비난하고 취소를 발표하는 등 사정 있어 결국 폐기되었다. 이즈음 공산당 측에서는 이로써 마치 4당 전부가 3상 결정 전면 지지에 기울어진 것처럼 선전하여, 더욱 민중의 의혹 불만을 조장하였다. ('기로에 선 조선 민족', <민세 안재홍 선집 2>, 266~267쪽)

끝에서 언급한 공산당의 선전 활동에 관한 구체적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당시 공산당의 체질이나 분위기로 보아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다. 4당 코뮤니케 작성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익 정당 소속이라도 좌우 합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중도파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3상 회의 결정의 제한적 수용을 통해 합작의 근거를 지키려 했지만, 극우파의 반탁운동과 정면 대결을 펼치려는 공산당에서는 4당 코뮤니케가 제한적 수용이 아니라 전면적 수용인 것처럼 선전해서 중도파와 극우파 사이를 이간하려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4당 코뮤니케가 발표된 이튿날 이를 거부한 한민당의 성명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昨 1월 7일 하오 1시에 시내 모처에서 회합한 4대 정당 회의에서 결정하였다는 공동 성명서 중 신탁 통치에 관한 조항은 신탁 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하였기 때문에 본당에서는 8일 긴급 간부 회담에서 此 조항을 승인치 않기로 결정하고 종래의 신탁 통치의 반대 태도를 일관 주장함"

1946년 1월 8일 韓國民主黨 (<동아일보> 1946년 1월 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성명서에서 "신탁 통치에 관한 조항"이란 "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소위 탁치안은 임시정부 수립된 후 독립 정신에 준하여 해결키로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신탁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한 것이라고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한민당의 반탁 운동이 정말 신탁 통치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략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 억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한민당 대표로 4당 회담에 나간 김병로와 원세훈은 창당 때 감찰위원장과 총무를 맡았던 같은 1887년생의 원로급 중진이었다. 그들은 8월 하순 안재홍의 권유에 따라 건준에 참여하려다가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을 장악하면서 안재홍마저 건준을 떠나는 바람에 한민당에 합류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한민당에도 이들처럼 극우파가 아닌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1946년 10월 한민당을 대거 탈퇴하는 사태도 원세훈이 대표로 나선 좌우 합작 노력을 한민당 주류가 뒤집은 데 따른 일이었다.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는 신탁 통치안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대책이었다. 이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서중석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정치 훈련이나 정치적 견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대국적 견지에서 풀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계급적 이해관계와 주도권 의식이 아주 강했다"고 하여(<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166쪽) 정치인들의 자질과 태도 문제로 설명했는데, 나는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을 향한 노력이 일체의 합작을 봉쇄하는 쪽으로 작용한 점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 물질적 자원을 가진 한민당과 이념적 자원을 가진 공산당이 서로 적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중도파가 주도하는 합작을 막는 데 서로 호응한 구조적 문제를 중시하는 것이다.

(10월 초순에 있을 일을 미리 몇 마디 설명해 둔다. 7월 10일 시작된 좌우 합작 회담에 원세훈은 우익 5인 대표의 1인으로 참가했고, 이 회담은 10월 7일 '좌우 합작 7원칙'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중 토지 개혁에 대한 '체감매상 무상분배'의 원칙에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하는 한민당이 동의하지 않자 10월 9일 원세훈이 한민당을 탈당했고, 중견 당원 27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로써 한민당의 극우 색채가 더욱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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