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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파를 왜 좌익으로 몰아붙이나?

[해방일기] 1946년 1월 10일

1946년 1월 10일

독자 한 분이 국군준비대에 관한 논문 두 편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강수의 '해방 직후 국군준비대의 결성과 그 성격'(<군사> 32호(1996년), 209~253쪽)과 임종명의 '조선국군준비대와 건군 활동'(<한국사학보> 2호(1997년), 267~304쪽)입니다. 두 편 논문을 보며 지금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관련 내용을 수정·보완하고 국군준비대에 관한 생각을 더 정리해 봅니다. 논문 보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자>

국군준비대(국준) 전국 대회가 12월 25~26일에 열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26~27에 열린 것이었다. 그밖에도 두 논문을 보며 크고 작은 사실들을 새로 파악한 것들이 있다.

이강수의 논문에서 국준의 뿌리를 해방 직전의 '산악대'에서 찾은 데 공감이 간다. 징병·징용을 기피하거나 탈출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강원도 지역에서 조직한 비밀 결사라고 전국 대회에서 발표한 <경과 보고>에 내세운 것이다. 해방 후의 조직 활동에서 조직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해방 전의 연원을 과장해서 내세우는 경향도 있었지만, 국준의 경우는 해방 직후부터 정치적 편향성 없이도 강한 조직력을 계속 발휘한 사실로 볼 때 해방 전의 연원이 사실로 추정된다.

1946년 1월 초순 미군정의 국준 탄압 과정도 이강수의 논문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12월 29일의 조선인민보 습격이 그 발단이었다. 1월 7일 일기에 인용한 1월 2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이유 불명의 폭력단 약 20명"이라 했는데, 그 정체는 건국청년회(건청)였다. 이강수는 건청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건청은 임정에 의해 이끌려진 단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국군준비대가 1945년 12월 26일 입수한 '청년회 자금 일람표'를 살펴보면, 최소한 자금 면에서는 임정이 아니라 한민당 계열의 단체로 보여진다. (…) '일람표'에 의하면 총 19만 원의 지원금 중 공장주의 지원금이 대부분이며, 정당-단체로는 한민당이 3만6000원으로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이승만 계열의 이흥진이 건국청년회에 참여했던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건국청년회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조직이라고 우선은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수, 238쪽)

폭력 조직을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널리 필요로 한 것이 공장주들이었다. 해방 후 확산된 직원위원회와 노동조합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건청은 노동자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공장주들이 조직해 놓은 단체인데, 한민당도 정치 테러에 이를 이용하기 위해 끼어든 것으로 보인다.

건청 단원들은 조선인민보사를 때려 부수다가, 출동한 국준 대원들과 충돌하고 나서 인민보사 직원 26명을 납치해 건청 본거지인 태고사로 끌고 갔다. 이틀 후인 31일 국준 대원들이 건청 사령부를 습격,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인민보사 직원들을 구출하고 건청 단원 17명을 '체포'해서 국준 사령부로 연행했다. 다시 이틀 뒤인 1월 2일에 국준은 군정청의 명령에 따라 건청 단원들을 석방했다. 군정 경찰의 국준 사령부 습격은 그 이튿날 시작되었다.

31일 국준의 건청 습격 전까지 이틀 동안 군정청의 조치는 아무것도 나타난 것이 없다. 신문사 직원 수십 명이 납치, 감금되어 있는 상황에서 치안 책임자인 군정청에 사태 해결 요구가 쏟아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도, 군정청은 건청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준이 건청을 습격하자 그제서야 국준을 탄압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조병옥과 장택상이 장악하고 있던 경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군정 사령부의 문제였다.

1월 초순 미군정의 국준 탄압 과정을 이강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1946년 1월 2일 이승만 계열의 이흥진 등을 국군준비대 사무실에서 풀어준 이후, 미군정의 국군준비대 수색·조사는 급속히 추진되었다. 1946년 1월 3일 미군정 경찰은 국군준비대 사령부를 급습, 총기류를 압수하고 국준 대원 4명을 체포하였다. 또 1946년 1월 4일 국군준비대 대원들이 1945년 12월 31일 건국청년회 사무실을 습격한 책임을 물어, 국군준비대 사령관인 이혁기도 체포하였다.

1월 5일과 6일 군정 경찰은 국군준비대를 다시 급습, 급기야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1월 6일 밤에는 국군준비대 사령부만이 아니라 간부 숙소까지 수색-감금하여, 헌군부 부대장 안영남을 검거하였다. 미군정의 수사 과정은 "특별한 통보"도 없이 진행되었으며, 심지어 구타와 총포 난사로 4명이 부상, 1명이 사망하는 등 강경일변도로 진행되어, 이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강수, 239쪽)


1월 7일 일기에서 인용한 1월 11일자 <서울신문>의 (1월 8일에 있었던) 대담 기사에서 루트워크 경기도 지사는 국준이 "치안을 문란케 하였기 때문"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 '치안 문란' 행위가 12월 31일의 건청 습격이었다. 수십 명 신문사 직원들의 납치-감금 상태를 묵살하고 있다가 그들을 구출한 국준의 출동을 문제 삼은 것이다. 미군정의 이러한 공권력 행사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공권력의 사표(師表)가 되어 있다.

이강수는 국준의 '불편부당적 성격'을 인정하고 중시했는데, 임종명의 시각은 이와 다르다. 이강수의 논문이 나온 이듬해에 낸 논문에서 임종명은 이강수의 논문이 자료와 고찰 범위의 제한으로 인해 국준의 성격 규명이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불편부당적 건국 운동 단체로서의 국준'을 파악하고자 한 필자(이강수)의 의도가 강하게 투영된 결과"로 판단한다고 했다(임종명, 268쪽).

이강수는 국준의 정치적 중립성을 인정한 반면 임종명은 국준이 1945년 11월 말부터 그 중립성을 잃어버리고 좌익에 편향되었다고 본 것이다. 국준은 해가 바뀌자마자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고 말았으니 문제가 되는 시기는 12월 한 달인 셈이다. 그 시기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나로서는 임종명의 "국군준비대의 좌익 편향"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국준의 정치적 변질을 임종명이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좌파 단체와의 연대 모색이고, 그 첫 번째 증거로 "11월 23일과 24일 양일간 개최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경비"한 일을 들었다. 아마 11월 20~22일, 3일간 열렸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를 말하는 것 같다.

12월 16일 일기에 적은 것처럼 극우파에서 수십만 원을 들여 수백 명을 동원해서 파괴하려 했던 대회다. 평화와 질서의 보호를 표방하는 군사 단체가 이런 대회 경비에 나서는 데 좌익 우익을 가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점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는 '좌파 단체'도 아니었다. 인공 중앙은 출범 때부터 좌익의 주도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자생적 자치 조직으로서 전체적으로 볼 때 중도 성향이었다. 인공 중앙의 노선이 지방 인민위원회의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김남식도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에서 이와 같은 견해를 보여준다.

인민공화국의 구성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진보적인 세력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부르주아공화국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더욱이 이승만이 주석 추대를 거부하고 상해임시정부 계열이 인민공화국 자체를 부정했으며, 당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 해체를 요구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인민공화국은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한 각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거의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광범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상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의 남한 주민들은 대부분 일제의 통치 기구가 당연히 철폐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를 대신하는 정권 형태로서 인민위원회를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23~24쪽)


임종명은 12월 8~10일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결성 대회 참석에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나는 이 시점의 전농을 '좌파 단체'로 규정하는 데도 동의할 수 없다. 전농은 좌파의 주장 관철에 앞서 전체 농민의 요구를 최대한 폭넓게 수렴하는 단체였다. 전농이나 전평이 점차 좌익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미군정이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를 외면한 결과이며, 출범 당시에는 좌익 편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로 국준이 좌익에게 자금을 의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11월 24일 결성되어 국준에 자금 지원을 시작한 국군후원회를 "좌파 인사들로 구성된" 단체라고 주장했다. 국군후원회 구성 인사들을 '좌파'로 규정한 근거는 그들이 "전국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이라는 것이다. (임종명, 284쪽 및 주64)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수백 명 지방 인사들 중에 뚜렷한 좌익 인사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중 재력 있는 사람들 54명이 국준 취지에 공감해서 국군후원회에 참여했을 텐데, 재력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중의 좌익 비율은 더 낮았을 것이다. 국군후원회를 '좌파 단체'로 규정하려면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

1월 7일자 일기에 인용한 국준 담화(12월 7일자 <중앙신문> 기사에서)도 "인민주권 보장의 군대로 인식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고 임종명은 지적한다. 담화 내용 중 "폭력 행사자와 민심 소란자를 단호히 문책할 것을 선언"한 구절에서 그 변화가 정점에 달했으며 이는 "국준이 제안을 넘어 직접적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선언"이라고 강조했다(임종명, 282~283쪽).

국준이 이 시점에서 행동을 강조한 것은 국준의 변질이 아니라 시국의 변화가 비쳐진 것이다. 11월 20~22일의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본 것처럼 극우파의 조직적 폭력이 확대되고 있을 때였다. 폭력과 사회 혼란에 대한 대응은 군사 단체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도 응당 나서야 할 일이었다.

'반탁'에서 '3상회의 지지'로 취지를 바꾼 1월 3일 시민대회의 경비에 나선 일도 같은 이유에서 '국준 좌경화'의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 대회 취지가 바뀌었다 해서 예정되어 있던 질서 유지의 역할을 거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치적 중립성을 등지는 일일 것이다.

국준 외연 확대 과정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켜 '좌경화' 현상으로 보는 것은 균형을 크게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일제하 의열단-민족혁명당 계열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조선국군학교와 국준의 통합은 국준과 국내에 있던 의열단-민족혁명당계가 건군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통합한 '전선 통일'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국준과 임정 좌파인 민족혁명당계의 결합은 좌익 블록에의 가담과 더불어 '좌파 군사 단체의 통일 조직'에로의 변화라는 국준의 내적인 변화를 잘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국준은 또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승환, 원용덕, 한상목, 이상렬, 문용채 등을 맞이하여 진용을 강화하였는데, 만주군 장교 출신자들의 국준 합류는 출신 군별로 볼 때 일본군 출신을 중심으로 한 국준의 외연이 확대되어, 국준이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확대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과 건준의 핵심 활동가인 박승환 등이 국준에 가입했다는 것은 이전과는 달리 국준과 인민당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민족혁명당 계통의 국준 합류와 더불어 국준의 내부적 변화 즉, 좌파 군사 단체의 통일 조직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임종명, 286~287쪽)


만주군 출신의 합류는 단순한 '외연 확대'로 보면서 조금이라도 왼쪽 냄새가 나는 요소의 합류에 대해서는 '좌파 군사 단체의 통일 조직'이란 어마어마한 해석을 왜 붙여야 하나? 자유당 시절 대표적 정치 군인으로 악명을 떨칠 원용덕은 벌써 12월 5일 군정청에서 만든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으로 취임하고 있었다. 이런 기회주의적 인물의 참여는 국준의 좌경화가 뚜렷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고위급(중령) 장교인 원용덕의 참여가 인민당이나 민족혁명당 계열의 참여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일이다.

국준이 '친일파 척결' 정도의 기본적 정치 구호조차 내세우지 않았다는 이강수의 지적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적 중립성'과도 차원이 다른 '탈정치성'이다. 정치적 구호는 사람들을 쉽게 끌어 모은다. 지지자와 반대자를 동시에 만드는 길이다. 국준이 정치적 구호를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상당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통상적인 정치적 이슈보다 더 근본적인 '평화와 질서 보호'의 사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결과로 생각된다. 그 탈정치성 때문에 원용덕 같은 기회주의자도 포섭할 수 있었고, 국준의 지도력이 지속되었다면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정치 군인으로 나서는 길도 막았을 것이다.

임종명의 '국준 좌경화' 주장을 보며 '좌익 딱지의 남발' 추세를 생각하게 된다. <위키백과> "국군준비대" 항목 첫 줄에 "좌익 계열 군사 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어느 사전에나 그 항목을 둔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임종명 같은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고 그렇게 규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평론가로서 <해방일기> 작업에 임하며 전문 연구자들과 사실 관계는 다투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해석을 놓고는 양보 없이 의견을 내놓겠다. 이 논문에 나타난 근거 정도로 '국준 좌경화'를 논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좌익 딱지의 남발'이라면 반공 독재 시절 극우파의 행태가 얼른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좌익 내지 친좌파의 손으로도 행해져 온 일이다.

권력을 쥔 극우파는 중도파를 좌익으로 몰아붙였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등 중도파의 상식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이해하는 일이다.

좌익에서는 중도파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해방 공간 당시의 현실 정치에서 끝난 일이 아니다. 극우파의 '승리'가 부정하고 부당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민심'이 왼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극우파의 횡포를 반성하는 사람들은 극우파에 대한 반동으로 그 반대편의 좌파 주장을 조건반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극우파는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집단이었고, 그에 맞서는 좌익이 민심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미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파의 폭력 앞에 억눌리고 말았다는 멜로드라마에 마음이 끌린다. 그래서 해방 공간 안에서도 좌익의 모습을 가능한 한 키워서 보고 싶은 것이다.

중도파가 극우와 극좌의 협공을 받는 해방 공간 안에서 '적대적 공생'의 틀이 빚어졌다. 극우는 중도를 물질적으로 핍박했고 극좌는 중도를 정신적으로 능욕했다. 군사독재 시절 한 운동권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최소한 적과 우리 편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하지 않는가!"

'원칙과 상식'을 바라는 중도의 입장이 오늘의 정치 현실 속에서도 발언의 통로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대적 공존'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까? 이제는 흑백론을 넘어설 때도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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