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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김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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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김구인가?

[해방일기] 1945년 12월 30일

1945년 12월 30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에서는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개인 테러의 절대배격을 주장하였다.

"이 중대한 민족운동의 위기에 있서 개인적 테러는 도리어 완전한 민족통일을 저해하고 또 혼란을 일으킬 뿐임으로 상대 여하를 불문하고 개인 테러는 절대 배격한다(略). 신탁 통치를 주장하는 자 누구며 민족 통일을 분열시키는 자 누구이냐? 이즈음에 있어 그 책임을 국내 좌익 진영에 전가하려는 음모에 속지마라! (略)

개인적 테러를 절대 배격하자!
신탁 통치 절대반대!
반소 반공의 음모를 배격하자!
민주주의적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자!"

1945년 12월 31일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서울신문> 1946년 1월 1일자
)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월 5~6일에 결성된 전평은 인민위원회와 함께 해방 후 자생적으로 자라난 풀뿌리 민주주의 조직이었다. 미군정은 지방 행정과 치안을 식민지 시대의 제도에 맡긴 것처럼 자생적인 노동자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조합에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좌익의 지도와 지원을 받으며 자라났고, 전국 조직인 전평을 결성하면서부터 좌익의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이 되었다.

전평이 테러 배격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12월 30일 새벽 송진우의 암살 때문이었다.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에 침입한 괴한들이 그를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었다.

위 성명서에서 "책임을 국내 좌익 진영에 전가하려는 음모"라 한 것은 좌익에 의심이 돌아가고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 송진우가 대표(수석총무)를 맡아 이끌어 오던 한민당이 9월초 결성 이래 다른 독자적 정강정책을 보여주는 것 없이 좌익 공격에만 일로매진해 온 정당이기 때문에 좌익에 대한 의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암살 시점의 상황을 보면 좌익보다 임정 쪽에 의심이 간다. 송진우는 29일 오후 하지를 만난 후 경교장으로 가서 반탁 운동 방향을 놓고 김구와 대립되는 입장에서 토론하다가 암살 두어 시간 전에 귀가했다고 한다. 이 상황을 서중석은 이렇게 적었다.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에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그는 전부터 훈정설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고, 암살된 이유도 훈정을 지지하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도 유의하여야겠지만, 그의 암살에는 보다 큰 요인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진우 측은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등으로 중경임시정부 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송진우 측의 중경임정 측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반탁 투쟁이 반 미군정 투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군정과 밀착된 그의 입장은 중경임정 측의 '즉각 정권 인수' 의지와 대립될 수 있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310~311쪽)

서중석이 개인 '송진우'가 아니라 '송진우 측'이라고 집단을 지칭한 것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 주류'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한다. 당시 한민당 비주류의 두드러진 움직임이 따로 없었으므로 이 집단을 편의상 그냥 '한민당'으로 표시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는 이 시점에서 한민당과 김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서중석의 관점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두 개 갈등 요소를 제시했는데, 헤게모니 문제는 임정과 한민당, 이승만 사이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계속되는 것으로서 이 시점에 갑자기 격렬해질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친일파 문제에 관해서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서 임정의 위상을 누구도 모를 수 없는 것인데, 그와 다른 '과거의 이미지'를 한민당이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반탁 운동의 전개 방향은 오히려 한민당과 김구 세력의 밀착을 보여준다. 김구는 귀국 이래 한민당과 독촉에 대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를 지켜 왔다. 그런데 이제 반탁의 깃발 아래 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겠다고 나선다. 경찰과 군정청 직원들의 호응을 믿고 나서는 것인데, 한민당의 강한 영향을 받는 집단이다.

반면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좌익을 배제하고 구성되었다. 30일에 선임된 중앙위원 76인 중에 김두봉, 김무정, 박헌영, 김석황 등 몇몇 이름이 보이기는 하지만 여운형, 이여성 등 인민당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좌익 중 극히 협조적인 사람들 외에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구색용으로 올려놓은 것 같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총동원위원회가 인민위원회를 대치할 지방 조직을 새로 만든다는 데 좌익의 주류는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정과 한민당 사이에 갈등 요소는 상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김구 측이 극단적 방법으로 한민당 영수를 제거하러 나설 동기는 없었다. 임정과 한민당이 대규모 합작으로 반탁 운동을 출범시키는 마당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행위는 오히려 극력 피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9일 밤 김구와 송진우 사이의 의견 대립도 송진우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영향을 끼친 면이 있을 듯하다. 29일에 사실로 나타난 것은 경찰서장들과 군정청 직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한민당의 작용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이 움직임이 김구 측의 과격 노선 결정을 뒷받침했다. 송진우가 경교장으로 가기 전에 하지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든, 그 시점에서 그가 김구를 격노시킬 주장을 내놓을 계제가 아니었다.

서중석은 송진우를 김구와 맞서는 훈정(訓政) 지지자로 보는 근거로 죽기 직전 한 미국 기자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제시했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310쪽 주26에서 재인용)

송진우와 한민당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굳이 소리 내어 밝히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졌다 해서 12월 29일 밤에 김구가 원하는 과격 노선에 반대하고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경찰서장들과 군정청 직원들 중에 진심으로 군정 철폐와 임정의 정권 인수를 위해 목숨 바칠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하지가 기침 한 번만 하면 쑥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임정이든 총동원위원회든 아무리 날뛰어봤자 군정이 계속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저 목청 높여 "탁치를 반대하는 우리가 진정한 애국자니 과거를 묻지 마시오!" 외치는 것, 여기에 임정 인사들이 토를 달지 못하도록 묶어놓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암살범 한현우는 1946년 4월 9일에 체포되었고, 5월 12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2월 14일에 2심에서 15년형으로 줄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인 1951년 8월 한현우가 시내를 활보 중이라는 문제 제기가 국회에서 있었고, 이에 법무차관이 체포에 노력 중이라고 답변했다. 그 후 한현우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고 한다.

1951년 8월이면 '이승만의 세상'이었다. 시내를 활보하고 않고는 이승만의 뜻에 달려있을 때였다. 한현우가 좌익의 하수인이었다면 이승만의 세상을 활보하고 있을 수 없었다. 김구의 하수인이었다면? 그 2년 전 김구 저격이 자기네가 시킨 일이라는 사실을 이승만 세력은 감추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 만약 한현우를 통해 김구의 테러 행위를 밝혀낼 수 있다면 이승만 측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비극적 죽음으로 신화화된 김구의 도덕적 권위를 깨뜨리기 위해.

그래서 나는 한현우의 '거사'가 김구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러면 누구의 지령이었을까? 한현우는 자신의 거사를 김구와 이승만이 '의거'로 칭송했다고 말했다. 김구가 아니라면 이승만이었을까?

내가 이승만을 너무 미워해서 확고한 증거도 없는 일에 대한 의심까지 그에게 돌린다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김구보다는 그에게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중석은 임정과 한민당 사이의 헤게모니 문제를 거론했는데, 헤게모니 문제라면 이승만과 한민당 사이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임정의 권위를 서로 이용해 먹기 위해 평면적 대결을 벌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29일의 상황을 임정-한민당-이승만의 3각 관계로 한 번 바라보자. 반탁을 애국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군정청에게까지 대항하겠다는 과격 노선이 임정을 중심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새로운 애국의 기준을 반공-반소로 몰아가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송진우의 <동아일보>는 27일자 허위 기사로 이 관점을 밀어주고 있었다. 한민당은 경찰과 군정청 직원들을 움직여 임정이 군정청과 맞서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양쪽 다 임정을 앞세우기 위해 임정을 떠받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총동원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반탁 운동은 임정이 주축이 되고 한민당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것이었다. 출발은 군정청에 대한 대항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은 좌절이 예정되어 있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었다. 그 다음 단계가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지, 거기에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 헤게모니 싸움의 초점이 있었다. 이 싸움에서는 송진우의 부재가 이승만에게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1951년 8월 한현우가 '이승만의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이승만에 대한 의심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증거가 전혀 없다. 어느 주요 세력과도 관계없는 한현우의 돌출행위로 볼 여지도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점에서 이승만은 극단적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할 만큼 인적 기반이 든든하지 못했을 것 같고(조병옥과 경찰은 아직까지 이승만보다 한민당과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당시 29세이던 한현우가 테러 하수인으로 동원되기에는 너무 고급 인력이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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