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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쇠고기, CO₂를 국회로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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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쇠고기, CO₂를 국회로 보내자!"

[인터뷰] '백남준 국제예술상' 브뤼노 라투르 교수

지난 11월 29일부터 2주간 멕시코 칸쿤에서 유엔(UN) 기후변화협약 제16차 당사국 총회(COP16)가 열렸다. 인류가 산업화 과정에서 배출한 온실 기체가 초래할 지구 온난화와 같은 위험에 맞서고자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는 지난해 덴마크 코펜하겐처럼 올해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데 실패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칸쿤 총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 한 프랑스 학자가 한국을 다녀갔다. 파리정치연구대학교 교수 브뤼노 라투르(63). 그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매년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인류 문화에 기여한 예술가, 이론가에게 수여하는 '백남준 국제예술상'의 올해 수상자로 결정돼, 한국을 방문했다.

브뤼노 라투르? 한국에서는 학계에서도 생소한 학자다. 그러나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사정이 다르다. 그는 사회(철)학자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자다. 그가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고안한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 ANT)'은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환경학, 경제학, 경영학 등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백승욱 옮김, 창비 펴냄)에서 라투르 교수의 ANT를 기존의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여섯 개의 새로운 접근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었다. 이번에 백남준아트센터가 이론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라투르에게 백남준 국제예술상을 준 이유도 이런 라투르의 업적 때문이다.

왜 라투르가 주목받는가? 그는 인간(human)에만 초점을 맞춰온 사회과학의 그간의 경향에 반발하며, 현대 사회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수많은 비인간(nonhuman)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ANT가 인간뿐만 아니라 자동차, 세균, 온실 기체 등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actor)의 역할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라투르는 이런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비인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앞에 닥친 생태 위기, 경제 위기 등의 전대미문의 불확실한 문제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리라고 믿는다. <프레시안>은 지난 11월 26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그의 생각을 들었다.

과학기술학자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사회학)가 인터뷰어로 나섰다. 김 교수는 국내에 생소한 라투르의 사상과 ANT의 문제의식이 지닌 중요성을 10여 년 전부터 강조해 왔다. 최근에는 라투르의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Reassembling the Social)>(2005년) 등을 번역 중이다.

▲ 프랑스 파리정치연구대학교 브뤼노 라투르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과학기술 탐구야말로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

김환석 : 당신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 STS)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하나로서, 특히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라투르 : 과학기술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현대 사회가 형성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과학기술학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전에는,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기술은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종교, 법을 연구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을 연구했어야 했는데도 이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과학기술학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행히 지난 30년간 과학기술학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더 큰 문제로 다가올 생태 위기의 해법을 찾는데 있어서 과학기술학이 큰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환석 : 현재 서구의 사회과학계는 과학기술학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라투르 : 학자의 숫자로 보면 과학기술학은 여전히 주변 학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학문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활발하게 토론을 주고받고 있다. 여성학(gender studies), 발전 연구(development studies), 식민지 및 탈식민지 연구(colonial and postcolonial studies) 등의 학제적 연구에서 과학기술은 핵심 주제다.

최근에는 경제가 과학기술학의 새로운 주제로 부상 중이다. ANT의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금융 시장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는 학자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미셸 칼롱이나 영국의 도널드 맥켄지가 그렇다. 더구나 이런 시도에 자극을 받은 각 학문 분야의 젊은 학자들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과학기술학은 이미 주류다. 이렇게 과학기술학이 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과학기술학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이 외면했던 사물의 물질성(materiality)을 다시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끌어왔다. 예전에 마르크스주의가 했던-그것은 물질을 지나치게 관념론적으로 파악했지만-역할을 지금 과학기술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김환석 : 현재 한국의 사회과학계의 모습은 30~40년 전의 서양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느 나라보다도 과학기술의 영향이 큰 사회지만, 과학기술학은 사회과학의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은 여전히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취급된다. 한국의 과학기술학자로서 10~2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이런 풍토가 바뀌길 바란다.

"과학과 예술, 서로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이번에 백남준 국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평소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나?

라투르 :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무엇인가? 바로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다. 잘 알다시피, 예술은 언제나 이 재현 과정에서 과학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과학의 사정은 다른가? 과학도 마찬가지다.

재현의 문제는 과학에서도 중요한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행한 연구 결과를 논문 등으로 발표하는 과정 역시 예술의 재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예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역사적으로 과학과 예술의 교류를 시도했던 흐름이 많았다.

20세기 초반 건축과 예술의 조화를 추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의 시도도 그런 맥락이었다. 나 역시 2002년과 2005년에 독일 칼스루에의 ZKM(Zentrum For Kunst Medientechnologie)에서 두 차례 전시회를 공동 기획했는데 큰 반향을 얻었다.

내가 올해 '정치 예술(political arts)' 과정을 개설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 사회과학자, 예술가가 모여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모색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과학과 예술, 정치철학과 예술 등의 공통 접점을 찾아보려는 좋은 시도였고, 새롭고 다양한 정치적 질문이 여러 개 나왔다.

김환석 : 프랑스에서 예술가와 과학자의 지적 교류는 활발한가?

라투르 :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주제를 개척하며 교류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 생태 위기를 매개로 이런 시도를 한다면, 과학자와 예술가 모두에게 생산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과 시도는 백남준이 애초에 추구했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쑥스럽지만, 그것이 내가 이번에 상을 탄 이유가 아닐까?

▲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우리는 '근대'였던 적이 없다"

김환석 : 방금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간단히 듣기도 했듯이, 당신은 1990년대부터 관심 분야가 과학기술학에서 좀 더 넓은 영역으로 넓어졌다.

특히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프랑스어 : 1991년, 영어 : 1993년)에서 근대주의(modernism),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논쟁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서 비근대주의(non-modernism)를 모더니즘의 대안 개념으로 제시했다. 비근대주의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인데 자세히 설명하자면?

라투르 : 과학기술학의 성과가 계속 쌓였지만 대부분의 과학자와 사회과학자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들은 나의 연구 성과를 포함한 과학기술학이 과학을 공격한다고, 그러니까 반(反)과학주의라고 오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의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modern)', '근대화(modernization)', '서구화(westernization)' 등처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 바로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깨달음을 정리한 책이 바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였다.

과학기술학이 탐구한 과학기술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 정말로 우리는 한 번도 '근대'였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얘기되는 근대화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과학자는 근대화를 자연으로부터 사회의 해방, 그러니까 비인간(자연)과 인간(사회)의 분리로 이해했다.

즉,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을 분리하지 못했던 비합리적인 전근대인과는 달리 근대인은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을 분리함으로써 합리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난 수백 년간 우리는 주로 과학기술을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사물)을 끊임없이 결합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과 같은 산업 문명이 등장하는 데는 석탄, 석유와 같은 비인간(사물)에 대한 의존은 필수 불가결했다.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문명을 지속할 수 없는 처지면서 무슨 자연으로부터의 해방, 비인간/인간의 분리를 얘기하는가? 오히려 우리는 지난 수백 년간 비인간-인간의 잡종(하이브리드)을 엄청나게 양산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결과가 바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생태 위기다. 이 책을 처음 썼을 때도 이미 심각했던 생태 위기는 최근의 (화석연료의 산물인) 온실 기체가 초래하는 지구 온난화에서 알 수 있듯이 더욱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근대화, 서구화 같은 개념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내세운 용어가 바로 '비근대주의'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근대주의'에 강하게 결박된 탓에) 앞에서 설명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는 미흡했다. 최근에 내 입장을 '컴포지셔니즘(compositionism)'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닌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술가의 통찰에 기대를 거는 편이다. 19세기~20세기 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고 그것의 본질을 작품으로 보여줬다. 그런 노력이 '근대'라는 개념이 정착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예술가들도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문제의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용어라고 얘기했지만, 일단은 비근대주의라는 용어를 쓰겠다. 탈근대주의와 비근대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투르 : 우리가 한 번도 근대였던 적이 없는데, 근대의 다음을 뜻하는 탈근대 자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국가/시장, 산업/상업 등 갈수록 세계의 모든 것이 통합되는 추세야말로 지난 수백 년간의 진짜 역사 아닌가? 그런데 개념으로서의 근대화는 (많은 사회과학자가 믿듯이) 모든 영역의 분화와 분리를 뜻한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정반대의 이론과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근대를 말하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을 더욱더 어렵게 할 뿐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는 일이다.

들뢰즈와 푸코,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김환석 :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지식인 가운데 특히 푸코, 들뢰즈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들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라투르 : 들뢰즈가 현대 사회의 정체를 해명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아주 중요한 철학자라는 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들뢰즈는 철학에서 비인간(자연)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아주 훌륭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지금 현재 진행 중인 나의 연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다. 그와 나는 가브리엘 타르드 그리고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푸코에 대한 평가는 좀 복잡한데…. 물론 나는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랑스와 외국에서 푸코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프랑스에서 푸코는 (데카르트 이후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 합리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전통적인 인식론자로 평가를 받는다. 그런 탓인지 인간/비인간을 같이 사고하는 나로서는 푸코의 사유로부터 얻을 게 많지 않다.

이런 질문은 아주 당혹스러운데, 사실 푸코, 들뢰즈와 나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끼친 영향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 그들의 사상을 바탕에 두고 나만의 새로운 견해를 펼치려고 노력했고. 아마 현대의 프랑스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왜 '컴포지셔니스트'인가?

김환석 : 아까 잠시 언급한 최근의 입장을 얘기해 보자. 몇 달 전에 '컴포지셔니스트 선언'을 전면에 내세운 논문(An Attempt at a "Compositionist Manifesto")을 발표했다. 컴포지셔니즘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라투르 : 컴포지셔니즘은 '비판(critique)'을 넘어선 '대안(alternative)'에 초점을 맞춘다. 비판은 '근대'라고 이름 붙여진 시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비판자는 문제뿐만 아니라 해법도 알 것으로 간주되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비판은 힘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생태 위기의 상황에서 그런 비판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쓸모가 없다. 모든 것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 비판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내가 제시한 컴포지셔니즘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전 지구적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다. 이런 문제에 대항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그간 우리 근대인들은 전통, 농촌, 가족 등과 같은 옛 것을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 방향은 과연 맞는가?

과거로부터 도망가려던 우리 근대인 앞에 전혀 새로운 '가이아(Gaia)' 즉 지구의 문제가 딱하니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 외에는 다른 행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근대주의는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만약 미국인처럼 전 세계인이 소비하고 살려면 다섯 개 이상의 지구가, 프랑스인처럼 살려면 두 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하다. 한국인에게는 몇 개의 지구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근대주의가 추구하던 '비판'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컴포지셔니즘이다.

김환석 : 올해 발표한 글의 '선언'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연상했다. <공산주의자 선언>과 '컴포지셔니스트 선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투르 : 둘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공동인 것(the Common)'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때 '공동인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란 점이 중요하다. 1940~50년대에는 근대성의 확장으로 자연 또는 시장에서 쉽게 이것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환상은 깨졌다.

물론 <공산주의자 선언>은 근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비판과 진보에 대한 절대적 믿음, 사전예방을 고려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을 의미하는 혁명 추구 등에서 '컴포지셔니스트 선언'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나는 '공동인 것'은 당연시되어 모두에게 강요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이제부터 점진적으로 하나하나 구성(compose)해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라투르가 제기한 컴포지셔니즘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자연의 정치학(Politics of Nature : How to Bring the Sciences into Democracy)>(프랑스어 : 1999년, 영어 : 2004년) 등에서 해왔던 주장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라투르는 그동안 인류의 눈앞에 펼쳐지는 전대미문의 문제들, 즉 지구 온난화, 생명공학의 영향, 인구 증가, 환경오염 등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이 문제들은 라투르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과학기술을 매개로 지난 수백 년간 만들어낸 수많은 잡종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인류와 지구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라투르는 기존의 좌파, 우파의 접근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전혀 새로운 정치적 기획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최근의 문제는 원인부터 해법까지 불확실성은 가득한 반면에, 제대로 된 해법을 제때 찾지 못했을 때의 피해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새로운 기획의 한 예로서 '사물의 정치(Politics of Things)'를 제안한다. 우선 그는 그 동안 억압돼 왔던 모든 인간/비인간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도록 해서, 수많은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해 '논란'과 '협의'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문제의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거기에 부합하는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물의 정치'를 통해서 지구를 공유하는 인간/비인간은 그 동안 잡종의 양산으로 누적된 많은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면서 새로운 균형 상태, 즉 '공동 세계(common world)'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논쟁'을 만들고, 대안의 '해법'을 찾자는 컴포지셔니즘 역시 이런 기획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편집자>

"'사물의 정치'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다. '사물의 정치(Politics of Things)'와 같은 개념은 여전히 낯설다.

라투르 :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해보자. 시청에서 하는 중요한 업무는 무엇인가? 도시의 주택 관리, 교통 관리, 상하수도 관리, 토양 관리 등…. 이처럼 시청에서 하는 업무의 대부분은 사물의 정치다. 당연히 그런 업무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치 역시 언제나 사물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갈수록 그런 사물의 정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광우병 전파의 위험이 큰 쇠고기 무역을 둘러싼 갈등에서 알 수 있듯이, 쇠고기(사물)는 이제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내가 '사물의 정치',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환석 :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헷갈릴 것 같다. 사물의 정치라는 것이, 실제로 의회에서 사물이 인간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쇠고기가 행위자라면, 그것은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나타내는가?

라투르 : 아니다. 사물이 인간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물의 정치다. 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가? 기후변화협약을 둘러싼 회의에서 과학자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 기체를 대변해서, 혹은 온실 기체 탓에 변화하는 기후 때문에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을 대변해서 발언을 하고 로비를 한다.

과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산화탄소,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과 같은 '사물'의 대변인이다. 인간을 주체(subject)로 비인간(사물)을 대상(object)으로 구별을 하는 인식 속에서는 이런 접근이 낯설어 보이겠지만, 사실 이런 인간/비인간의 구분이야말로 인위적인 것이다. 북한과 남한 사이의 경계인 휴전선이 인위적인 것처럼.

김환석 : 다양한 사물이 자신의 목소리를 과학자를 통해서 낸다는 발상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과연 그들의 목소리를 잘 대변할까?

라투르 : 그 점은 사물과 인간도 똑같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정책을 원하는가, 이런 질문을 놓고 정치인도 다양한 의견을 내놓지 않는가? 사물과 과학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자는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하지만, 어떤 과학자는 안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기후 변화 문제를 보더라도, 온실 기체의 영향을 놓고 과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바로 이렇게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다양한 인간/비인간사이의 토론을 통해서 협의가 되는 과정, 이런 전 과정이 바로 사물의 정치다.

"생태 위기, 하나의 만능 처방은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당신은 이미 20년 전부터 생태 위기를 계속해서 강조했다. 앞의 질문과 이어지는 것이지만, 지금의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와 관련하여 당신이 주장하는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에 대해 설명해 달라.

라투르 : 과학기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연(비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체 네트워크 안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런 통찰을 통해서 사회과학은 생태 위기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흔히 우리는 '문화'하면 다문화주의로 다양하게 파악하면서 '자연'만은 마치 고정불변의 단일한 실재인 것처럼 취급하는 '단자연주의(mono-naturalism)'에 빠져 있다. 이 역시 인간(사회)/비인간(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사회와 분리된 순수한 '자연'을 생각해온 근대주의의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된 오류다. 오늘날 자연은 이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지역·나라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 단일한 진단, 단일한 해법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런 통찰이야말로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까 '공동 세계'를 '구성(composition)'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인간/비인간의 목소리가 표출돼 토론을 하는 과정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 중에서 일부는 이런 견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생태 위기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단 한 가지 해결책(과학기술)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자신이 대변할 수 있는 사물의 목소리가 자연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시아는 운이 좋다.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사회/자연의 분리와 같은 개념이 낯설지 않았나? 이런 잠재력을 염두에 두면 생태 위기와 같은 현재 제기되는 문제에 아시아가 서양과는 다른 접근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만, 최근의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의 상황을 보면 안타깝다.

이들 나라는 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사회/자연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뒤로 하고 서양 특히 미국의 경제 이론을 흡수하면서 갈수록 제대로 된 상황 인식과 문제 해결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아시아는 지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놓인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세계화에 속지도, 그것을 믿지도 말라!"

김환석 : 생태 위기와 함께 또 생태 위기를 가속화하고 그것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세계화이다. 자유시장 중심의 세계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투르 : 나는 세계화를 믿지 않는다. 흔히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수많은 지방화가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장하는 것일 뿐이다.

도대체 '글로브(globe)'는 어디에 존재하나? '글로벌(global)'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착각에 빠뜨리는 위험한 개념이다. 흔히 '전 지구적 관점(global perspective)'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거짓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provincial)에 갇힌 좁은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통찰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학자는 독일의 페터 슬로터다이크다. 그는 글로벌이 아닌 지방 차원의 '상호 연결(interconnectedness)'이라는 올바른 개념을 만든 유일한 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글로벌' 개념은 마치 물고기(인간)가 헤엄치는 거대한 수족관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작은 연못에서 헤엄치는 존재다. 이들 연못 중 일부는 연결돼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를 믿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중요하다. 세계화, 근대화, 전자 미디어 등에 대한 근거 없는 열광을 막는 일이 중요하다.

김환석 : 실제로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위기를 맞고 있다. 현 상황의 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투르 : 그렇다. 오히려 좋은 기회다. 금융 위기를 계기로 이제 사람들이 그전에는 보지 않았던 시장, 조직들, 기술들, 과학 분야 등 네트워크의 모든 면을 보면서 그것의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마치 경제가 '과학기술학(STS)화'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기존의 근대주의적 경제 이론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위기가 계속될 가능성은 있지만 결국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앞으로 세계에 정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 본다.

▲ 브뤼노 라투르 교수(왼쪽),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분단 한국은 사회과학 연구의 보고다"

김환석 : 마지막 질문이다. 빠르게 발전한 국가이자 마지막 냉전의 대결지로 남아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당신의 이론이 어떤 함의가 있을까?

라투르 :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서 좀 더 오래 머물러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기술학자에게 또 사회학자에게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반도는 아주 많은 연구 주제를 찾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한은 전혀 다른 발전의 경험을 겪어 오지 않았나? 이는 근대성의 서로 다른 경로를 실험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 내가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연구하면서 배울 게 많을 듯하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다시 한국을 찾아서 생태적으로 전 지구에서 가장 잘 보존이 됐다고 알려진 비무장지대(DMZ)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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