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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와 결탁한 에비슨, 7人 의사 탄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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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와 결탁한 에비슨, 7人 의사 탄생의 비밀?

[근대 의료의 풍경·84]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대한제국 시기, 관립 "의학교"에서만 의학 교육을 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이 운영하는 병원에서도 한국인들에게 의학을 가르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에비슨도 제중원의 운영권을 이관받은 뒤에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의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정식으로 의학교를 설립한 병원이나 개인은 없었다.

의학교에 관한 법령이 없었을 때에는 "정식"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지만, 법령이 제정된 뒤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의학교 규칙>은 기본적으로 1899년에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에 관련된 사항을 규정한 것이지만, 차후에 공·사립 의학교가 세워질 것에 대비하여 그에 관한 조항도 마련했다.

<의학교 규칙>에는, "공·사립 의학교는 지방관과 관찰사를 경유하여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명기되어 있다(부칙 제2조). 이는 의학교를 설립하는 데 지켜야 할 의무적인 절차를 규정한 것이지만, 민간인들이 공·사립 의학교를 설립할 권리를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 <독립신문> 1899년 7월 19일자. <의학교 규칙>은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뿐만 아니라 신문들에도 게재되었다. <의학교 규칙>은 부칙에 공·사립 의학교에 관한 규정을 명기했다. ⓒ프레시안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11월 의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결정을 하기 전에도 의학교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재정적인 이유로 설립을 미루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선 한성에 의학교를 설립한 뒤 형편이 허락하면 의학교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격과 역량을 갖춘 병원이나 단체, 개인이 의학교 설립을 신청하는 경우 승인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정부로서는 오히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에비슨이 진정으로 한국인 청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고 그들을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의학교 규칙>에 정해진 대로 의학교 설립 신청을 했어야 할 것이다. 에비슨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은 바 있으며, 국왕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다. 따라서 에비슨이 의학교 설립을 신청하는 경우 정부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지언정 반대할 까닭은 없었다. (정부는 후루시로의 종두의 양성소를 인가하고 많은 지원을 했으며, 대일본해외교육회가 세운 경성학당에도 정부 인가학교 인허장을 교부했고 1899년부터는 1년에 360원씩을 보조했다.)

그런데 에비슨은 정부로부터 의학교 인가를 받지 않았다. (더 이상 1908년의 <사립학교령>이 제정되기 전에는 관련 법령이 없어서 정부에 설립 신청을 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에비슨이 <의학교 규칙>이 제정, 공포된 1899년 7월에는 안식년 휴가로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몰랐던 것일까? 또는 한국의 법과 제도를 무시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의학교를 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에비슨이 정식으로 의학교를 설립하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학생들에 대한 의학 교육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정확한 수학 연한과 교육 과정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에비슨 박사 소전 (26)"(<기독신보> 1932년 7월 20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7년에 니르러 학생 일동은 언제나 졸업을 하여 의사가 되는 것을 알녀고 애를 썻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졸업 기한을 확실히 말해주지 않게 되면 그들 중에서는 공부를 중지하려 하는 학생도 잇어 갓갓으로 얻은 학생을 중로에 잃어바릴 념녀도 잇엇다. 얼마동안 생각하여 본 뒤에 아직 공부할 것이 얼마가 남은 것을 설명하여 주고 말하기를 만일 학생들이 공부에 좀 더 힘쓰고 실습하는 시간을 좀 더 늘녀한다면 일 년 안에 전과를 다 맟이겟다고 하엿다."

말하자면 세브란스 병원은 법적·제도적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의학교를 세운 것도 아니었으며 수학 연한, 졸업 시기, 교육 내용도 정해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선발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나 "제도 교육"과는 너무나 다르며, 당시 관립 의학교와도 크게 차이가 났다.

또 졸업 기한을 확실히 말해주지 않으면 공부를 중지하겠다는 등 학생들의 호소 또는 항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비슨은 이런 일을 겪고도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의사 자격을 인정받는 데에 필요한 법적, 행정적인 조치는 여전히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에비슨은 이보다 앞선 1906년 6월 8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학위를 정부가 인정하도록 노력해 왔다(For their encouragement I have been trying to gain the consent of the government to recognise our diplomas)라고 썼지만, 그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기독신보> 1932년 7월 20일자. "어비신(魚丕信) 박사 소전" (26). ⓒ프레시안

이제 에비슨이 학생들에게 약속한 1년이 지났다. 그때 에비슨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의사 자격을 받도록 해주었는지 에비슨의 메모를 바탕으로 클락(Allen DeGray Clark)이 쓴 <에비슨 전기 :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Avison of Korea : The Life of Oliver R Avison, M.D)>(연세대학교 출판부 펴냄, 1979년)를 통해 알아보자.

"1908년에서야 나는 비로소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공부한 7명의 젊은 학생들을 독자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의사로서 사회에 내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해에 나와 동료들은 그들에게 엄격한 시험을 실시하고 6월 8일에 졸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졸업식은 한국에서 외국 기준에 맞는 의학 교육을 실시하여 의사로서 배출하는 제일 처음의 일이었기에 우리는 되도록이면 성대히 거행하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큰 강당이 없었고 6월은 우기여서 옥외에서 하기도 위험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통감의 승인 없이는 우리가 의사 자격증을 졸업생들에게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 통감 이등박문의 관심과 협조도 얻어야만 했다(We realized, also, that we should make sure of the interest and cooperation of the Japanese Resident-General, Prince Ito Hirobumi, without which we would have no authority to award medical degrees that would enable the new doctors to practise medicine.) 그래서 나는 이등 통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이등박문은 나를 기꺼이 만나주었으며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기간에 걸쳐 몇 명의 젊은 한국인들에게 의학의 이론과 임상 교육을 시켜 이제 개업할 수 있는 의사로서의 실력을 구비하게 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의 관심과 도움이 없으면 이런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며 만약 당신이 관심과 협조를 보장한다면 우리들은 그 학생들에게 의사 자격증을 수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선 졸업식에 초청한 여러 내빈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병원 잔디밭에 칠 군용 천막을 빌려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는 응낙했다. 나는 곧 이어 그를 귀빈으로 초청하겠으니 왕림하여 졸업생들에게 졸업증을 수여하고 축사를 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에비슨 전기> 287~288쪽)

에비슨은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을 때 보여주었던 탁월한 외교관과 수완가(제37회)로서의 면모를 이번에도 여실히 나타내었다. 에비슨은 이럴 경우 누구를 찾아가서 어떤 부탁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반식민지 한국에서 법률적, 행정적으로 풀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를 대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밖에는 없었다. 또한 이토는 에비슨이 평소에 흠모하는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에비슨은 자신의 <Memoires of Life in Korea>(<에비슨 전집>, 청년의사, 2010년)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가장 탁월한 일본인 정치가를 만난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1895년 그가 평화조약을 조정하고 서명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길에 그는 서울에 잠시 들렀고 일본 공사가 그에 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나는 명예롭게도 내빈으로 초청되었다."

"(…) 이토는 전형적으로 정중하고 품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정중함과 품격 사이에 구별이 있을까? 그의 태도는 위엄이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 그런 호감이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를 습득했기에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 회화하는 것을 보면 그가 외국에서 많은 견문을 넓혔으며, 그가 서양 사람들을 좋아하고 민주적 제도를 칭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 그는 일본의 첫 통감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자신의 조국을 위하고 한국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하려는 그의 희망은 매우 분명했다. 나는 그것이 진실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 그는 곧 한국인들에 대해 어느 다른 집단보다 선교사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설정하려 했다." (<에비슨 전집 2> 182~184쪽)

한편, 에비슨을 맞이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처지와 생각은 어땠을까? 노회한 정객 이토에게 에비슨은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자(에비슨은 어렸을 때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했는데 당시 캐나다는 독립국이라기보다는 영연방의 일원이라는 성격이 더 뚜렷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에게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미국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다. 에비슨의 방문과 청탁은 이토에게 영국-일본-미국 사이의 동맹, 우호 관계를 확인하고 다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한국에서 외국 기준에 맞는 의학 교육을 실시하여 의사로서 배출하는 제일 처음의 일"이라는 에비슨의 인식은 의학 교육 분야에서의 한국인들의 노력과 성과를 완전히 깎아내릴 수 있는, 이것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 통감부의 영자 신문 <Seoul Press> 1908년 6월 5일자. 세브란스 의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이토 히로부미의 연설문(영역)이 실려 있다. 이토는 한국 의학의 성과를 비하하면서,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대한의원 의육부에서 1년 전에 졸업생을 배출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이토는 에비슨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에 따라 1908년 6월 3일(위에 언급한 <에비슨 전기>의 6월 8일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제1회 졸업식이 병원 마당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통감부와 일본군 고위층,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 외국인 선교사 등 천여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는 졸업 증서 수여였다. 에비슨의 요청대로 이토가 홍종은, 김필순, 홍석후, 박서양, 김희영, 주현측, 신창희 등의 순서로 졸업생 7명에게 일일이 졸업 증서를 주었다. 이토는 이어서 졸업을 축하하고 에비슨의 공로를 치하하는 연설을 하면서, 한국 의학의 성과를 비하하는 발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토는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대한의원 의육부에서 1년 전에 졸업생을 배출한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Tai Han Hospital was only lately opened for work, and we have not had time to produce any graduates from the school"―통감부 기관지 <Seoul Press> 1908년 6월 5일자). 졸업생들이 주로 의학교에서 의학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추원 의장 김윤식, 내부대신 임선준, 학부대신 이재곤 등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들은 이토의 연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졸업식이 있은 직후 내부 위생국은 졸업생 7명에게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수여했다. 이것은 물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 <황성신문> 1908년 6월 7일자. "세부란시(世富蘭偲) 병원 의학교에셔 정규한 학업을 졸업한 김필순, 신창희, 김희영, 홍종은, 홍석후, 주현측, 박서양 씨 등 7인에게 일작(日昨) 내부 위생국에셔 의술개업허가장을 수여하얏다"는 기사이다. 7명의 명단 순서가 졸업증서 수여 때와 다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 6월 6일자 기사에는 "홍종은, 김필순 씨 등 7인"이라고 되어 있다. ⓒ프레시안

▲ 사토 고죠(佐藤剛藏)의 저서 <조선의육사(朝鮮醫育史)> 26쪽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졸업식" 부분. 사토는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들에게 무시험으로 의사면허증(의술개업인허장)을 교부한 것은 이토의 외국인 회유 정책의 하나라고 술회했다. ⓒ프레시안
1907년 6월 한국에 와서 1945년 12월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총독부의원 의육과장,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내 그 시기 동안의 의료 상황을 꿰뚫고 있는 사토 고죠(佐藤剛藏)는 <조선의육사(朝鮮醫育史)>(1956년)에서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의 제1회 졸업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세브란스 병원 부속 의학교의 졸업 증서 수여식 때, 이토 통감이 참석하여 세브란스 병원장의 요청으로 졸업생에게 직접 졸업 증서를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정부의 위생당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한국 정부도 이들 졸업생들에게 무시험으로 의사면허증을 교부하여 파격적인 조치를 했던 것이었다. 원장은 에비슨이라는 미국인으로 다소 멋있는 점도 있었지만, 이것은 이토 공작의 외국인 회유 정책의 하나로 이토 통감으로서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은 병합 전이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총독부가 되고나서는 학제 제도도 점차 법제화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의 의료계 사정에 정통한 사토 고죠의 말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그가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배척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에비슨의 언급과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한 진술로 생각된다. 즉 세브란스 병원 부속 의학교 졸업생들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라는 최고 권력자의 외국인 회유 정책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들이 의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석할 일은 아니다. 그 가운데 홍종은과 홍석후가 이미 정규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 자격을 인정받았듯이 다른 졸업생들도 비슷한 역량과 자질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들이 세브란스 출신들을 동료 의사로 받아들여 함께 일했을 것이다(제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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