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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기 시작한 美의 한국 분단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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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기 시작한 美의 한국 분단 의지

[해방일기] 1945년 12월 16일

1945년 12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국의 독립 방침을 연합국이 정한 것은 1943년 11월 하순의 카이로 선언이었다. 미국, 중국, 영국의 3개국이 여기에 참여했다. 대 일본 전쟁 방침을 의논하는 카이로 회담에는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이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며칠 사이를 두고 대 독일 전쟁 방침을 의논하는 테헤란 회담을 열었다.

카이로에서 한국 독립 방침을 정한 것은 장개석이 주장한 덕분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에 동의한 것은 그 전략적 의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유럽국들의 동남아 식민지를 침략하면서 '해방'을 내세우는 데 대한 맞불 작전으로 생각한 것이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인의 작용은 장개석을 포섭한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개석의 중국도 연합국 진영에서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

일본 항복 후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의 방침은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 때까지도 더 이상 구체화되지 않았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미·영·소 3국 외상 회담을 열어 미진한 사안들을 더 다루도록 결정해 놓았다. 이에 따라 12월 16일에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 회담이 열렸다.

"적절한 과정"이란 신탁 통치를 뜻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신탁 통치를 무척 좋아했다. 후발 강대국인 미국이 대외 영향력을 늘려가기에 종래의 식민지 체제보다 다변주의(국제주의) 방식의 신탁 통치 체제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필리핀 통치와 비슷한 수준의 긴 기간 신탁 통치를 구상했고, 스탈린은 더 짧은 기간을 생각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회담에서도 미국과 소련의 이 입장 차이는 계속되었다. 미국은 멀리 떨어진 이 지역에 안정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모스크바에 모인 3국 외상은 한국의 신탁 통치 방침 자체에 아무 의문이 없었다. 기간과 방법만이 토론 의제였다.

그런데 전쟁 막바지의 원자폭탄 개발로 미국이 전략적 이점을 가지게 되면서 다변주의보다 일방주의(국가주의)를 추구하는 풍조가 미국 군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힘이 충분하니 이제 국제적 협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이 풍조의 한 중심지였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한국의 신탁 통치 방침을 뒤엎고 미국의 직접 영향력을 키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1월 20일 주한 정치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이른바 '랭던 제안'이 바로 신탁 통치의 대안으로 남한 군정청이 만든 것이었다. '정무위원회(Governing Council)'를 만들어 한국의 국가 건설을 준비시킨다는 것이다. 4개 항으로 구성된 이 제안의 성격을 본문보다 더 확연하게 보여주는 '주'가 붙어 있다.

"위 계획에 앞서 소련 측에 통보해야만 하며, 회의는 정무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지명한 소련 지역 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게 해 정무위원회를 강화할 수 있도록 소련 측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 측의 참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만 실행되어야 한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81쪽에서 재인용)

소련 측에 '통보'하여 협조를 얻으면 좋고, 아니면 미국 혼자 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군정 관계자들이 분단 건국을 확고한 목표로 세워놓지는 않고 있었더라도 분단 건국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북보다 이남이 인구가 많고 중심도시 서울이 들어있다는 점을 이용해 이남 점령군의 구상을 이북 점령군에게까지 수용시킬 희망도 약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주' 내용은 이남에서 미국의 독자 노선을 제창한 것이다.

랭던 제안의 '정무위원회' 역할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 이승만의 독촉이었다. 군정청은 모스크바 회담 전에 독촉을 출범시켜 "이런 정무위원회를 만들었으니 한국에는 신탁 통치가 필요 없다"는 주장으로 국무성의 신탁 통치 방침 철회를 요구할 참이었다. 이 '정무위원회'를 그럴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임정 인사들을 참여시키고 좌익도 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좌익과의 절충에도 실패하고 임시정부 인사들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12월 14일까지 전형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 39인을 선정했지만 12월 15일과 16일의 제1차 및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 모임에는 각 15인만이 참석했다. 임정 인사들은 선정 자체를 거부했고 일방적으로 선정된 좌익 인사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독촉은 이승만이 10월 13~14일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나고 귀국한 이래 가장 공들인 작품이었다. 그는 교묘한 책략을 시도했다. 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미끼로 임정 등 민족주의자들을 독촉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군정청에 대한 정치적 권위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임정이 귀국하자 군정 하에서는 임정 그대로 활동할 수 없으니 독촉으로 들어오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임정 수뇌부만 포섭하면 충분한 권위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좌익 포용에 대해서는 진지한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12월 15일 중집위 첫 회의에서 이승만이 구사한 '2중화법(double-speaking)'을 정용욱이 지적한 데서도 그의 책략 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이 고문 제도를 군정의 부속물로 하려 하였지만 자신이 반대하여 군정부와 연락하는 국정회의로 하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46~47쪽) 군정청에 대한 자기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중집위 회의록을 검토한 정병준은 15일 첫 회의에서 "이승만은 매우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고 평했다. 회의록이 인용된 부분을 보면 그런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미군 측에 장담했던 성과를 이루지 못한 초조함 때문에 평정심을 잃고 속내를 마구 드러낸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운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 독촉중협은 원래 민의 대표 기관을 만들려 한 것이 목적이다. 지금 모스크바회의 같은 데 대해서 우리의 민의를 부르짖자면 이러한 합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 우리는 임정의 승인을 목표로 싸워 나갈까, 독촉중협을 육성하여 나아갈까 어름어름 하는 사이에 신탁 단체 같은 것이 음생(陰生)되면 참으로 야단이다. (…) 외교 관계 신탁 문제 등에 대한 것은 나의 독단적인 의사만이 아니다. 군정 당국에서도 극력으로 자기 나라의 국무성과 싸워가면서 우리를 조력해주고 있다. (<우남 이승만 연구>, 493쪽에서 재인용)

그래서 눈가림으로라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독촉중협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고 한다. 임정과의 관계에 대해 "김구와 말한 바가 있어 양해가 어렵지 않으나, 김구가 임정 요인들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몇몇 참석자들이 캐묻자 "이 말은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임정 각료회의 진행에 적지 않게 난색이 있는 모양"이라고 덮어버렸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0~501쪽) 군정청과의 관계도 깨놓고 얘기했다.

져 군정부 하지 장군은 우리를 위하야 신이냐 넉시야 하면서 2주 내로 이 결성을 속히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 오날이 미국인 군정 측이 내용으로 이 결속의 결과를 보고해 달랜 최후의 한정일이오. 적어도 1주일 전찜 이 합동을 보여쥬엇드면 미국인이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이 있엇슬 것인데 참으로 유감이오. (<우남 이승만 연구>, 489쪽에서 재인용)

12월 15일과 16일 서둘러 중집위 1, 2차 회의를 열었으나 독촉은 모스크바 회담에 영향을 끼칠 규모도 되지 못했고 시간도 놓쳤다. 그 다음 회의는 1월 15일에야 열리게 된다. 묘수 일발을 놓친 이승만은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12월 16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일이 늦어져서 군정청 하지 장군은 골이 나 있다. 공산당이 불참한 것을 들으면 또 불만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 긴박한 시국을 볼 때 2주일 3주일이라는 기막히는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참으로 애닯은 마음이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3~504쪽에서 재인용)

랭던은 12월 11일과 14일에 국무부로 전문을 보내 (1) 정무위원회 방안과 (2) 남북한에 최장 5년간 미소의 배타적 신탁 통치 후 양군 완전 철수 방안, 두 가지 중 선택을 요청했다. 독촉의 부진으로 정무위원회 방안에 대한 대안을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그 대안을 보면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분단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다시 느껴진다. (<우남 이승만 연구>,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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