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척사위정파와 1907년 여름에 강제 해산된 한국군 출신의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무력 항쟁, 즉 의병 투쟁이 그 하나이고, 개화파 지식인들이 주도한 애국 계몽 운동이 다른 하나이다. 일제의 잔악하고 혹독한 탄압은 주로 의병 투쟁에 가해졌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한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하여 일제가 허용하거나 방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서북학회(西北學會),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 당시 대표적인 사회단체들은 대개 민중들의 교육, 계몽 등 비정치적인 활동을 사업 목표로 내세웠지만 결성 때부터 줄곧 감시를 받다 결국 이런저런 구실로 대개 1~2년 만에 해산을 당했다. 그에 따라 이 단체들의 계몽 교육과 선전 홍보 활동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기관지들도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었고 기사가 불온하다 하여 몰수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애국 계몽 운동 잡지들은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국권회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근대식 사고와 생활방식, 그리고 실력 배양을 계몽하는 기사와 논설을 실었으며, 위생도 그 가운데 중요한 항목이었다.
당시 여러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의 기관지들에 위생과 의학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 사람으로 의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이외에 그러한 활동을 할 전문적 식견을 갖춘 한국인은 외국에 유학했던 몇 명의 의사가 고작이었고, 또한 그들은 당시 애국 계몽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지석영과 김익남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병필, 김봉관, 이규영, 지성연, 강원영 등은 <대한자강회월보>(1906년 7월~1907년 7월 통권 13호 발간), <서우(西友)>(1906년 12월~1908년 1월 통권 14호), <서북학회월보>(1908년 6월~1910년 1월 통권 19호), <기호흥학회월보>(1908년 8월~1909년 7월 통권 12호) 등과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대한유학생회학보>(1907년 3월~5월 통권 3호), <태극학보(太極學報)>,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1909년 3월~1910년 5월 통권 13호) 등에서 활동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와 그 기관지들의 사상적 기반은 대체로 사회진화론적 인식에 근거한 실력양성론으로서, 민력(民力) 함양을 통한 국권 회복과 민권 신장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이미 일제의 반식민지가 되었으며 국가의 완전한 멸망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그들 단체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실력 양성"과 "근대식 생활방식"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보인다. 더욱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애국 계몽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뒤에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인 데에는 이러한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의학교 출신들이 위생 계몽 활동을 벌인 것을 지나치게 미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런 노력을 기울인 것을 폄하할 이유도 없다.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에 무관심하고 방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 의학교 출신들의 위생 계몽 활동. 당시 대표적인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의 기관지들에 위생과 의학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 것은 대개 의학교 출신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1회 졸업생인 이규영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프레시안 |
▲ 의학교 제1회 졸업생 김봉관(왼쪽)과 이규영(오른쪽)이 각각 <서우(西友)> 제1호와 제6호에 게재한 글. 이규영의 논설 "연초(煙草)의 해를 논하야 국채(國債)의 속상(速償)을 축(祝)홈"은 당시 국채 보상 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단연(斷煙) 운동을 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의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흡연의 해로움을 경고하고 금연을 권장한, 한국인의 글로는 최초라고 여겨진다. ⓒ프레시안 |
이제 각설하여, 의학교의 위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제73회에서 언급했듯이 "의학교는 즁셔 훈동으로 뎡하고 슈리하기를 장대히 하고"라는 <제국신문> 1899년 5월 20일자 기사 이래 거의 모든 기록에 "훈동 의학교"식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른 지명을 거론한 당시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의학교가 훈동(勳洞)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황현은 <매천야록> 제3권의 1899년 기사에서 "의학교를 설립하여 고 김홍집의 집을 교숙(校塾)으로 하고"라고 기록했으며, <조선 총독부 의원 20년사>(1928년)에는 위의 사실들을 종합한 것인지 "관인방(寬仁坊) 훈동 전 총리대신 김홍집의 옛집(舊邸)"이라고 되어 있다.
총리대신(영의정)을 지낸 김홍집의 집 위치를 알면 문제가 간단히 풀리겠지만(<매천야록>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전제로), 거기에 관한 기록과 증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의학교는 1907년 3월 15일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된 뒤에도 8개월 동안 원래의 훈동 교사를 계속 사용했다. 대한의원 의육부가 연건동(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의 새 교사로 이전한 것은 1907년 11월 21일이었다. "대한 교육부를 대한의원으로 이설(移設)함은 전보(前報)에 게재하얏거니와 해부(該部)를 재작일에 대한의원으로 이접(移接)하얏는대"라는 <황성신문> 11월 23일자 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면 의학교가 8년 남짓 사용했던 학교 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관립인 덕어학교(德語學校, 독일어학교)가 당분간 쓰기로 하고 11월 23일경 원래의 대안동(지금의 안국동)에서 의학교 자리로 이사해왔다. 학부의 원래 계획은 1907년 말까지 기존의 영어, 일어, 독일어, 프랑스어(法語), 한어(漢語) 학교를 외국어학교로 통합하여 훈동의 전(前) 은언궁(恩彦宮)을 사용토록 하는 것이었다(외국어학교의 통합도 실제로는 일제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은언궁을 교사로 수리, 개건하는 데 시일이 걸려서인지 1908년 4월 11일에야 5개 학교가 은언궁 새 교사로 이전, 통합되었다. 덕어학교는 이때까지 5개월가량 의학교 교사를 사용했으며, 덕어학교가 떠난 뒤에 의학교 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훈동 은언궁", 즉 "훈동 외국어학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1911년에 제작된 "경성부 시가도"를 보면, "훈동 외국어학교"는 현재 종로구 경운동의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와 서울노인복지센터 일대에 걸쳐 있었다. "경운동(慶雲洞)"이라는 지명은 1910년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 초기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운동은 경행방(慶幸彷)과 운현궁(雲峴宮)의 합성이라고 한다.)
경운동에 해당하는 지역을 "조선경성도"(19세기 중엽 제작)는 소천어동(小川魚洞)이라고 표시했으며, 1914년에 만들어진 "경성부 명세(明細) 신지도(新地圖)"에서부터 관훈동과 경운동이 명백히 구별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의학교가 있었던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는 훈동이 지금의 관훈동뿐만 아니라 경운동까지도 포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경성부 시가도"(1911년 제작). 빨간색 네모 표시가 외국어학교, 파란색 네모 표시가 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의 위치이다. 빨간색 (1)과 (2)는 필자가 의학교 자리로 추정하는 곳이다. 1911년에는 고등여학교가 옛 제중원(1885~1886년) 및 광제원(1899~1907년) 자리에 있었다. ⓒ프레시안 |
▲ "경성부 명세(明細) 신지도(新地圖)"(1914년 제작). 1911년의 외국어학교 자리에 고등여학교가 이전해 왔다. 이 지도에는 관훈동과 경운동이 구별되어 있으며, 두 동네의 경계선은 지금과 거의 같다. ⓒ프레시안 |
대한의원 의육부(의학교 제4회에 해당)를 졸업한 권태동(權泰東)은 1962년 6월 6일의 인터뷰에서 "훈동(현재의 관훈동 종로서 자리?)에 있던 순한식 기와집에서 공부를 했"다고 증언했다("한국 의학의 선구자를 찾아서 (2)", <대한의사협회지> 제5권 제8호, 1962년 8월). 즉 권태동은 의학교가 1962년 당시의 종로경찰서 자리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 홈페이지의 "연혁"에 의하면, 종로경찰서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21일 낙원동 58번지(현재 종로세무서)에서 개청(開廳)한 이래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겼다. 종로경찰서는 1948년에 공평동 163번지(현재 제일은행 본점)로, 1957년에 경운동 94번지(현재 SK 재동 주유소)로, 그리고 1982년에 경운동 90-18번지(현 위치)로 이전했다.
따라서 1962년에 권태동이 언급했던 종로서는 지금의 SK 재동 주유소(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의학교가 1962년 당시의 종로서 자리에 있었다는 권태동의 증언이 맞다면 의학교는 지금의 SK 재동 주유소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기사에 물음표 표시가 덧붙여 있는 것은 권태동이 1910년대부터 계속 수원에 거주해서 인터뷰 당시의 관훈동, 경운동의 지리와 건물 배치를 잘 몰라 기사 작성자와 소통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작성한 사람도 관훈동과 경운동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daum.net)' 지도. 종로경찰서는 1982년부터 빨간색 네모로 표시된 곳에 있지만, 권태동이 의학교에 관해 증언한 1962년에는 (1)번 위치에 있었다. 의학교 위치에 관한 권태동의 증언이 맞다면 의학교는 현재의 SK 재동 주유소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지석영이 1929년 <중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녀자고보"가 "훈동"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면, 의학교는 지금의 동덕빌딩 자리(2번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한편, 지석영은 <중외일보> 1929년 10월 23일자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5) 지석영 씨"에서 의학교의 위치가 "지금 재동에 잇는 녀자고보 자리"라고 술회했다(제73회). "재동"이라고 한 것은 지석영의 착각이거나 기사를 작성한 사람의 착오였을 것이다. 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는 1910년에는 재동에 있었으며, 그 뒤 1912년에는 경운동,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재동으로 이전했다. <중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석영은 여학교가 경운동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언급했는데, 기자는 재동에 있는 여학교로 생각하고 기사를 그렇게 작성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석영과 권태동의 증언은 거의 일치하는 셈이다.
아니면 제73회에서 언급했듯이, 지석영이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관훈동(지금의 동덕빌딩 자리)에 있었던 동덕여자고보를 언급했던 것일 수도 있다. 관훈동의 교사는 천도교가 1909년경부터 사범강습소로 사용하다 1910년 말에 동덕여학교에 넘겨준 것이었는데, 천도교가 언제 누구로부터 그 교사를 인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도교가 그 건물을 인수한 과정을 밝혀낸다면 의학교와의 관련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1914년 3월 12일 관훈동 교사에서 거행된 사립 동덕여학교 창립 6주년 기념식 사진(동덕여자대학교 소장). 순한식(純韓式) 기와집인 교사의 규모와 모습은 동덕여학교가 처음 그리로 이전했을 때와 거의 같았다고 한다. ⓒ프레시안 |
의학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 교육 기관으로 처음으로 근대식 의사 36명(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기 이전까지)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관료와 일반인 대상의 보건 교육과 방역 활동, 학생 검진, 그리고 부속병원에서의 진료 활동 등 그 당시 형편에서 나름대로 소임을 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의학교는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와 교과서 출판사인 광학사(廣學社)의 산실이기도 했다.
요컨대 의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소이고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의학교의 사진 한 장 발견하지 못했고 정확한 위치조차 밝히지 못했으니("부동산 폐쇄 등기부 등본" 등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독자 여러분의 "집단 지성"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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