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와 4·3 사건 당시 토벌군 사령관이었던 박진경의 양자인 박익주, 서울 한 교회의 목사인 이선교 등은 공식적인 진실 규명이 완료되고 1만8000명의 무고한 민간인 대다수가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 보고서 배포 금지', '희생자 결정 무효', '4·3 특별법 일부 조항 위헌' 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들은 헌법소원 2건, 행정 소송 2건, 국가 소송 등 6건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되었다.
4·3 사건 당시 초토화 작전과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지금까지 한 평생을 고통을 안고 살아왔으며, 남은 가족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후 변변한 직장조차 갖지 못했고 이웃의 따돌림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런데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에 투입되어 좌익 무장대 토벌한다면서 중산간 지역에 거주했던 수많은 민간인을 빨치산 동조자라고 무참하게 학살했던 군 지휘관이나 병사들 중 누구도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고백하지 않았으며, 현장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부대의 그 어떤 지휘관도 처벌된 적이 없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역시 다르지 않다. 아직도 병상에서 그날의 상처로 신음하는 사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가족들, 생활고와 트라우마로 가정이 풍비박산된 사람도 부지지수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35명의 신군부 지휘관들이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로 기소, 수감되었으나 2년도 안 되어 석방되었으며, 곧바로 사면, 복권되었다.
전두환은 그 이후 자금까지도 공공연하게 공적 활동은 해왔으며, 그의 고향에서는 그의 호를 딴 일해공원까지 설립되었고, 급기여 한나라당의 소장 개혁파의 대표 선수이자 과거 전두환 정권에 맞서 투쟁을 했던 국회의원 원희룡은 세배까지 가서 그에게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한편,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시위대와 민간인들을 향해 무자비한 살육이 발생했을 때, 이 사건을 간첩에 의한 소요로 몰고,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류 언론들은 이에 대해 한번 도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이 두 큰 사건의 발생과 우리 사회가 그것을 다루어온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국가가 저지른 범죄는 처벌되지 않고, 그 범죄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반성은커녕 승승장구해왔고, 그 사건의 피해자들은 극히 형식적인 사과와 알량한 보상 금액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으며, 망가진 인생과 깊은 상처를 한탄하며 파괴된 영혼을 어루만지며 살아가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각종 인권 침해 사건의 진실 규명을 결정하고, 법원이 사건을 재심하여 애초의 사법부의 판결이 번복된 일부 사건 관련자들은 어느 정도 명예도 회복했고, 보상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 수백 명의 군사 정권 하 납북 어부와 그 가족들, 수천 명을 넘어설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반공법 관련 피의자나 수감자들은 여전히 빨갱이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군 의문사 유족들은 사랑하는 아들을 국가에 보냈다가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들은 후 자식의 시체조차 자기 손으로 수습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자식을 가슴에 묻고서 살아가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부정의, 불법, 반인륜, 부도덕한 일이 이 땅에서 6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데도 그 고상한 법 기술과 논리로 먹고사는 대다수의 검사, 판사, 변호사, 법학자들은 이 문제를 거의 모른 체 했을 뿐더러 오히려 국가 범죄의 가담자, 협력자가 되어 법의 이름으로 폭력 질서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살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왔다.
▲ <국가 범죄>(이재승 지음, 앨피 펴냄). ⓒ앨피 |
이재승의 <국가 범죄>는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과거 청산 과정에서 제기된 거의 모든 법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다.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도 독자들을 압도하지만, 저자의 법철학적 식견, 과거 '법률적 불법'에 불과했던 여러 실정법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비판, 독일 등 외국 사례와 국제적 표준에 대한 충실한 해설, 조용수 사건 등 국내의 재심 사건 재판부의 판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풍부한 사례 제시 등이 돋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동안 이 문제에 앞장서온 재야 변호사들의 논리나 외국의 사례에 대해 무지한 채 오직 자연법적인 논리로만 정치 재판에 대해 비판을 해온 사법 피해자들, 인권운동 진영의 논리를 확실하게 넘어서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더구나 국내외 각종의 사례가 중간에 엄청나게 많이 삽입되어 있고, 또 풍부한 각주까지 달려 있어서 가히 이 분야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재승이 시, 소설, 영화의 예를 들어서 관련 사안의 성격을 부연한 것은 다른 딱딱한 법학 서적이나 비평서에서 거의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장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단순히 과거 법률과 사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유사한 경험을 겪은 나치 하의 독일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통일 이후의 우리가 맞이할 법적인 쟁점까지 거론하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다.
이재승이 서문에서 언급하듯이 그가 지난 10년 동안 관련 위원회나 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그가 이러한 문제의식과 식견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그의 개인의 작업을 넘어서서 한국의 20년 과거 청산 작업에 진력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의 고민과 고뇌의 결집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그 작업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 보고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이재승이 여러 가지 중요 과거사와 관련 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도 읽어볼 만하지만, 역시 그가 가장 많은 비중을 둔 분야는 국가 범죄에 협력한 과거의 사법부와 사법부 과저 청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분야를 서술할 때는 논리적인 비판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인상도 있다. "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자들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는 비판이나 특별 재판부의 판결을 완전히 무효화시키지 않은 채 조용수를 무죄 선고한 법원을 "사악한 의지가 충만한 법을 아무리 쓰다듬어도 손에 독만 묻어난다"고 공격한 것이나 그것을 "편의적인 곡예", "수공예 작업"을 한다고 지적한 것들이 그 예이다.
이재승은 이 책을 통해 재심 사건을 제대로 판결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면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법부를 향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즉 과거의 폭력적 법, '법률의 탈을 쓴 불법'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은 채 국가 테러 기구의 일부였던 자신의 과오를 윤리적인 수사로 무마하거나 자신도 피해자라는 식으로 강변하는 사법부는 오히려 법적인 심판을 받아야할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청산이 단순히 재심과 결정 번복으로 완료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재승은 겉으로는 과거 청산 작업을 지지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수공예 작업'에 매몰되어 있는 오늘날의 '법 관료'들의 한계를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사법부는 비판 세력에게 가혹하고 아군에게는 한량없이 따뜻하다는 점에서 과거나 현재나 정치 재판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용산 재판의 사례 등에서 나타나듯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 정치 재판은 더욱더 심각한 양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그가 강조하듯이 정치 재판이나 계급 재판은 법의 중립성은 물론 사법부의 존립 근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제켜두고는 결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나타난 이재승의 강한 주장에 대해 논란이 될 여지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국가 안보의 긴급성을 또다시 거론하면서 과거 국가 기관이 저지른 인권 침해나 잘못된 판결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불기피한 것이었으며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주장하는 통상의 반론들도 계속 제기될 것이다. 그가 지적하는 4·3 사건 당시 군사 재판의 불법성 역시 한국 사회를 뒤흔들 뇌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집단 보상보다는 개인 보상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도 광주 5·18 보상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과거 청산 운동을 해온 시민사회 일각의 입장과는 충동할 여지가 있다.
특히 과거 국가 범죄의 제기와 해결 과정을 정치·사회적 맥락과 사회운동, 피해자의 요구와 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하기보다는 주로 법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분석한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의 법학이 사회과학의 한 분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이전까지 법 중심주의는 극복되기는 어려운 과제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 역시 학술적인 쟁점과 외국 사례, 국내 판례 등이 혼란스럽게 섞여있어서 이 문제에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좀 난해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와 장점은 이러한 약간의 문제점을 충분히 상쇄하도고 남는다. 이 책은 법률가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모든 청년들이 읽어야 하고 계급 재판의 예비 후보생 양성소가 될지도 모르는 오늘의 로스쿨의 정규 과정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사법부나 법학계가 이 책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한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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