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장사를 나가시면 그 물건을 다 팔 때까지 며칠씩 못 들어 오실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없는 집은 어린 나에게 너무 막막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나는 장사 다니는 어머니가 창피했고, 자존심이 상했다. 갑자기 학교에서 어머니를 찾을 때에는 외갓집에 가셨다는 영리한 거짓말도 곧잘 꾸며대면서 어머니가 장사 다니는 것을 숨겼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주신 멸치 냄새 묻은 돈을 받아먹고 자랐지만, 그 냄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된 지금이 돼서야 생각해보면 그 냄새야말로 나를 키운 희생과 헌신의 냄새였음을 깨닫게 된다. 가난한 부모님이 얼마나 큰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삶의 진실은 쉽게 깨닫기 어려운 법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 <지붕 낮은 집>(임정진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
어린 시절은 지나고 보면 참 까마득해진다. 때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많다. 그 당시의 삶은 지금의 풍부한 먹을거리와 편리한 아파트 생활과 비교해보면 말할 수 없이 궁색했고 불편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과거는 항상 삶의 일부로서 과거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에게 남아있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에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이웃과 친구들 가족들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만든 일부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은 현실을 더욱 아끼고 가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임정진의 <지붕 낮은 집>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막 중학생이 된 열네 살 먹은 혜진이의 눈을 통해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쓴 글이다.
장마철 홍수가 났을 때 자신의 살림보다 말을 먼저 챙겨야 했던 '경마장에 사는 경미' 이야기, '뺨맞고 나타난 브리사댁', '새우젓 파는 만수 엄마', '가난한 친구 명철이 이야기' '부잣집 딸 송미' 등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막토막 잘도 기억해서 재미있게 들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신이 느낀 정서적 만남과 충격으로 연결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강희 언니는 또 계단에 앉아 오래도록 울었다. 그 여름이 다 지나도록 강희 언니는 밤마다 그렇게 울었다. 그 울음이 조용한 낮에도 가끔씩 들려왔다. 나가보면 정작 강희 언니는 없었다. 울음이 이명처럼 내 귀에 달라붙어 버린 것이었다.
친절했지만 첫사랑에 실패하고 늘 골목 끝에 앉아 울던 강희 언니는 삶의 쓸쓸함과 연결되어 있다. 전도사를 만나 시골 개척 교회를 열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남편이 죽고 결국 산동네로 돌아와 교회에 빠져 방언 기도를 하며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강희 언니는 절대적 운명 앞에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슬픔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온 마을의 계주 노릇을 하며 미제 물건을 팔던 희숙이 엄마는 곗돈을 떼먹고 줄행랑을 쳐서 단짝친구 희숙이는 평생 도둑년의 딸로 기억된다. 삶의 놀라움이다. 오랫동안 절친한 사람들과 느닷없이 원수가 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 앞에 인간은 얼마나 약해지기도 하는가!
새우젓을 팔며 악착같이 살아가던 만수 엄마는 죽고 나서야 사장인 남편에게 버림받은 부잣집 마나님이었음이 밝혀진다. 잘생긴 남편 위세를 톡톡히 하던 효선 엄마도 남편이 동료 직원과 브라질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하고 나서야 남편의 배신을 알고 무너져 내린다. 인생은 때로 예기치 않는 회오리바람과 만나게 되고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춘기 소녀에게 한없는 설렘에 빠지게 한 민재 오빠! 잘생기고 반듯한 외모로 성탄절 예뱃날 멋진 기획력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감미로움을 선물했던 민재 오빠가 사실은 산속 월봉암의 주지 스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우며 혜진이는 나이를 먹고 자라난다.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고 공중 화장실을 함께 써야하는 달동네를 지겨워하던 혜진이는 달동네를 벗어난다.
'안녕. 잘 있어 이제 만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그 동네를 떠났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 곳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흩뿌린 채 그냥 떠나왔다. 귀한 줄 몰랐다. 찾아올 생각도 안 했다. 오래도록 그 곳을 잊고 살았다. 나는 그 동네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거기 가서 맞닥뜨릴 가난이 지겨웠고 거기서 만날 눈초리들이 무서웠다. 그런데 이제서 가끔 그 동네가 그립다.
내가 어머니의 멸치 냄새를 부끄러워했듯이 혜진이도 달동네의 가난한 냄새를 지겨워했고 창피스러워했다. 그래서 소중한 추억과 친구들과 이별하면서 그 이별을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헌신이 깃든 멸치 냄새의 진실을 이해하듯 이 글의 주인공 또한 달동네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자신을 만든 소중한 추억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진실함이 깃들어야 그리움의 자리가 생겨나는 법이니까.
이야기는 삶을 담는다. 삶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다. 자신과 삶을 나누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 또한 소중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추억을 안고 산다. 올 한해가 다른 해보다 유독 힘겹게 느껴졌지만, 올해 역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지나고 나면 올해도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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