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9일
(1) "방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 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出入于世)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61쪽)
(2)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 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 336쪽;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 131쪽에서 재인용)
같은 송진우가 했다는 말이다. (1)은 1944년 가을 안재홍이 찾아가 독립 준비를 위한 활동을 함께 하자고 권했을 때 한 말이고, 그저께도 인용했던 (2)는 1945년 12월 중순 임정과 한민당 사람들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송진우가 일제 말기에도 국내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1)에서 임정의 위세를 부풀려 말한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더구나 (2)에서 임정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과 전혀 맞지 않는다. (1)의 이야기는 활동 권유를 사절하기 위해 당시 흘러 다니던 불확실한 정보의 일부를 과장해서 말한 것 같다.
어쨌든 해방 후 송진우와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 입장에 부합하는 것은 (1)이다. (2)에서처럼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따지는 것은 '절대 지지'와 잘 맞지 않는다.
(2)가 정말 송진우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그대로일까? 술자리에서 나왔다는 말이 들은 사람의 입을 통해 <고하 송진우 평전>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도 전달 과정에 부풀리기가 꽤 있었을 것 같다. 임정 '절대 지지'를 표방하는 입장에서 막 귀국한 임정을 '꼬시기'에 바쁠 때지, '길들이기'에 나설 때가 아니었다. 설령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몇몇 사람에게 속닥거릴 얘기지, 김구 이하 만좌의 청중을 상대로 큰소리칠 내용이 아니었다.
발언의 진위 여부보다 이런 내용이 '평전'에 실리게 되기까지의 상황이 더 흥미롭다. 책을 만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송진우의 생각을 잘 드러낼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면모라 생각해서 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자리에서나 할 말 당당히 하는 사람으로 송진우를 그리고 싶어 한 '평전' 관계자들의 바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임정과의 대립적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이 술자리가 있은 보름 후 송진우가 암살당했고, 그 배후로 임정 측이 구설에 올랐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한민당이 이승만과의 밀착 관계를 강화하면서 김구 측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2)의 일화는 나중에 벌어진 상황에 맞춰 조작 내지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의 내용은 임정이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는 무력한 존재고,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먹고 살았는지도 빤한 부도덕한 존재라고 송진우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 그대로였을지는 확실치 않아도, '평전' 관계자들에게 이르기까지 그 후계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일단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가정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송진우의 후계자들이 그의 발언을 자기네 생각대로 조작해 그를 팔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임정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비판이 (2)에 담겨 있다. (가) 임정은 국내에 발붙일 곳 없는 무력한 존재다. (나) 임정 요인들은 중국에서 아무거나 해먹고 살아온 부도덕한 존재다. 송진우의 꾸짖음에 반박도 못할 만큼 임정이 꿀리는 입장이었을까?
요즘 저질 언론의 '아님 말고' 행태가 떠오른다. 송진우의 비판만 드러나 있고 임정 측 반론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후세의 우리는 (가)의 비판이 사실과 다른 주장임을 알고 있다. 임정은 국민의 큰 여망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도 임정의 권위에 빌붙으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점령군 외에 의지할 데가 없던 것은 한민당 사정이었다.
그러면 (나)는?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임정 요인들의 생활이 그렇게 순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더러 떠돈다. 어떤 여자랑 같이 살았다는 둥, 아편 밀매에 종사했다는 둥, 누구에게 떳떳치 못한 도움을 받았다는 둥. 임정을 이용하고자 하는 한민당 사람들이 그런 흑색선전 자료를 모으는 데 부심했으리라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고, 지금까지 떠도는 말들도 그런 자료에서 퍼져 나온 것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런 말들 중에는 사실인 것도 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임정 요인들이 모두 성인군자라야만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흠집을 내려고 목을 매고 달려드는 꼴 그대로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로 인구에 회자되는 자들의 물귀신 작전. 임정 요인들의 소소한 스캔들에 목매달던 한민당 사람들의 꼴이 그대로 겹쳐진다.
12월 6일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임정 지지 국민운동'을 결의했다. 결의 내용 중 "임시정부에 대한 건의"로 "독립완성을 방해하는 참칭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즉시 해산 명령을 발할 것"이 들어 있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7일자) 송진우는 그 이튿날 김구를 방문해 그 뜻을 직접 전하기까지 했다.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가 어떤 속셈을 품은 것인지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공은 그 중앙부가 극좌파에게 장악되어 독선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하부 조직은 국민의 독립 의지를 가장 널리 수렴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임정과 인공을 동시에 지지하고 있었다. 인공과 임정이 국내와 국외에서 각자 제약된 여건 속에서 자라온 사실을 생각하면 두 기관이 힘을 합치는 것이 독립의 의지와 역량을 최대화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민당은 두 기관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사이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2월 9일 송진우의 기자 회견에 한민당의 이 속셈이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韓國民主黨 수석총무 宋鎭禹와의 문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問) 어떻게 통일되어야 할까요.
(答) 우리가 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함으로써 통일이 된다. 유일이요 또 최고인 임시정부를 전민중이 지지 협력하면 된다.
(問) 임시정부가 유일 최고한 정부가 되고 안 되는 것은 민중 전부가 결정지을 문제이다. 최고의 심판자는 민중이 아닐까요.
(答) 그러나 8·15 이전에 민중은 임시정부 하나만을 믿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부로서 활약하는 것은 임시정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인민공화국이 생기어 임시정부에 대한 역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민중은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깊어 감에 따라 전국민이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객관적으로 존재함으로 통일을 위하여 이와 협력 협조하여야 될 줄 아는데.
(答) 한 사람에 두 머리가 있을 수 없듯이 한 나라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 27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싸운 우리의 정부가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정부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과오를 청산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면 협력할 수 있다. 인민공화국은 일본 세력 밑에서 그의 후원으로 생긴 것이므로 정부가 될 수 없다.
(問) 인민공화국이 日本 軍力이 남아 있는 동안에 생겼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성격은 반 일본적이었고 조선 사람의 독립 의욕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答) 인민공화국이 혁명 세력으로써 日本軍力을 擧破하고 세워진 것이라면 그대로 승인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問) 洪震 (임정 의정원 의장) 말은 인민공화국의 발생 이유를 인정한다고 하는데.
(答) 여러 요인들 가운데는 혹 그런 의견을 가진 분이 있을지 모른다.
(問) 인민공화국의 객관적 실제적 세력이 있는데 그를 무시하고 통일이 될 수 있을까.
(答) 그 힘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임시정부가 환국하였으므로 앞으로 민중은 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의 시정 방침은 어떻게 생각하나
(答) 정책은 별문제다. 문제는 인민공화국의 구성체이다. 적색 정권을 가지고는 우리는 독립할 수 없다. 객관적 정세를 보면 이 이유를 알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민족국가를 만들어야겠다. 자주독립을 먼저 해놓고 볼 일이다. 그런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연전에 뉴라이트 측에서 '광복절'보다 '건국절'의 의미를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요란을 떨며 '민족'보다 '국가'를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이 있다. 민족에는 민족의 의미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하나를 내세워 다른 하나를 내치자는 억지는 해방 직후 임정을 내세워 인공을 내치려 한 한민당과 닮은꼴이다. 극우파의 '이간질 수법'을 나는 이렇게 봤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 계급, 투기 세력에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국가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 작전일 뿐이다. (<뉴라이트 비판>,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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