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6일
李承晩을 중심으로 민족 통일 전선을 목표로 하고 결성된 獨立促成中央協議會는 月餘를 두고 자체의 조직 확대와 기능 강화를 위하여 예의 노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정돈 상태에 있는 듯하더니 임시정부 영수들의 환국을 계기로 하여 다시금 활발한 동향이 전개되었다.
李承晩은 동회 중앙위원 선거의 제일 전제로서 전형위원 선정을 전 대회에서 위촉받은 후 신중히 인선 중이던 바 마침내 呂運亨(人民黨), 安在鴻(國民黨), 許政, 金東元, 白南薰, 元世勳, 宋鎭禹(이상 5씨 韓國民主黨)등 7명을 선정하고 11월 18일에 제1회 전형위원회를 소집하였으나 동위원의 인적 구성은 1당1파에 편중되었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동회가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李承晩은 재차 신중한 인선에 착수하여 제2차로 金志雄, 金錫璜, 安在鴻, 金縔洙, 孫在基, 白南薰, 鄭魯湜 등을 선정한 후 5·6 양일 중에 걸쳐 시내 敦岩莊에서 극비리에 李承晩을 중심으로 무엇인지 신중히 토의 중이며 특히 6일에는 오전부터 회의를 진행 중 李承晩은 급히 하지, 아놀드 양 장군과 회담한 후 다시 회의에 임하여 오후 늦도록 회의는 계속되었다.
물론 토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집행부 구성과 금후 민족 통일에 대한 구체적 대상이 중심 의제가 아닌가 하여 극히 주목되며 특히 종래 민족 통일 전선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독특한 위치에 비추어 그 동향은 현 단계의 정국에 중대한 관련성을 갖지 않는가 하여 극히 주시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두 명씩 200여 명이 조선호텔에 모인 자리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만들 것을 결정하면서 회의 소집권을 회장 이승만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승만은 이틀 후 한민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10여 명을 모아 독촉의 조직과 성격을 의논한 다음 주요 세력의 참여를 청하기 위해 10월 31일 박헌영을 만나고 11월 1일 여운형을 만났다. 그리하여 11월 2일 72개 정당·단체 대표 수백 명이 참석한 회의를 천도교 강당에서 열었다.
11월 2일 회의의 중요한 결정은 두 가지였다. 독촉 명의로 연합국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그 하나인데, 이승만이 기초한 결의문 내용에 일부의 불만이 있어서 몇 사람의 수정위원을 위촉, 수정을 가한 뒤 보내기로 했다. 또 하나의 결정은 조직 구성을 회장 이승만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 기사에 보이는 것처럼 한 달 넘게 지난 이제까지 전형위원회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과 박헌영은 11월 2일 회의에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민당 사람들을 엉터리 단체들을 내세워 대거 참석시키면서 좌익 대표들의 참석을 극도로 제한해 놓고 다수결로 결정했으니 우익의 주장만을 대표한 회의라는 것이었다. 결의문 수정위원을 위촉한 것은 중도적 인사들도 이 비판에 많이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1월 28일 소집된(기사 중의 "18일"은 착오인 듯) 전형위원회는 한민당 인사들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하면서 여운형과 안재홍을 들러리 세운 것이었다. 여와 안은 10월 27일 만나 "국내 통일 전선 통일은 이 박사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최고조인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합의하고 이승만에 대한 전폭적 지지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69쪽) 한민당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승만과 결탁한 것과 달리 두 사람은 대국적 입장에서 이승만과 독촉 지지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들러리 역할이 너무 분명한 한민당 5인에 국민당과 인민당 각 1인의 전형위원회 구성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재홍은 불참했고 여운형은 참석했다가 항의하고 퇴장했다.
11월 2일 회의에서 이승만에게 조직 구성을 "일임"한다고 했지만, 엿장수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일 수는 없었다. 웬만큼 원칙과 상식에 따라 처리했다면 다소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따라갔을 텐데, 이승만의 편의주의적 태도가 너무 심하니까 불신이 계속 쌓이게 되었다.
12월 5~6일의 전형위원회는 이승만과 독촉의 위축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임정과 공산당을 독촉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대국적 입장에서 독촉을 지지하던 여운형은 돌아섰고, 안재홍은 참여하면서도 기대가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안재홍은 1948년 7월 민정장관을 사임하면서 쓴 "기로에 선 조선 민족"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30수년 만에 서울에 귀착하신 이승만 박사의 정계에 등장은 최대한 기대와 경의로써 전 민중적 熱狂리에 환영되었다. 나는 그분의 거대한 정치 영향력에 말미암아 다시 결합 독립의 길이 열릴 것을 기원하였다. '건준' 이래 일단 分袂하였던 여운형 씨를 그의 양주 鄕第에 방문하여 함께 서울에 귀래한 후 '인공'의 正-副 主席인 이 박사와 여몽양 간의 공작으로 '인공' 문제가 해결되고 民-共은 다시 협동될까 하였다. 그러나 '인공' 문제는 左方의 집요한 고집 있어 심상치 않았다.
10월 23일 조선호텔 회합에서, 각 정당의 해체 및 합동을 단념하는 대신 현존한 그대로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11월 2일 천도교당 회합에서 각 당파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7인 전형위원을 회장 대신 이 박사가 선임하여 左右適正한 협의기관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左와의 절충 익지도 않았고, 전형위원은 한민당의 송진우, 김동원, 백남훈, 원세훈, 허정 등 5씨와 여운형 및 나 兩人을 지명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 박사의 통지하심에 의하여 돈암장에 총총 갔었으나, 沮害하는 자 있어 事態 不明한 중에 退歸하였더니, 추후 비로소 그 始末 알았으나 追及할 수 없었고, 이로써 협동의 기운 더욱 희박하여졌다.
이 일 때문에 당시 한민당의 간부인 정노식, 장덕수 양씨의 협력도 있어 나는 共黨과의 談議 빈번할 새, 박헌영 外 數氏 국민당 본부를 내방하기 3, 4次요, 내가 共黨 본부인 近澤빌딩에 박헌영 씨를 찾기가 兩次이었고, 추후 박 씨의 대신 '서울 콤그룹'파가 아닌, 김철수 씨를 이끌어내어 돈암장 회합이 자못 빈번하였으나, 5대5의 比率 문제로 모두 성립되지 않았다. 이 5대5 比率案은 끝끝내 협동의 암초로 되었다. 김 씨는 자못 양보적이었으나 그의 說, 通치 못한 것이다. (<민세 안세홍 선집 2>(지식산업사 펴냄), 263~264쪽)
6일 전형위원회 회의 중에 이승만이 하지와 아놀드를 만나러 나갔다가 돌아와 밤늦게까지 회의를 계속했다고 한다. 독촉의 구성이 군정 당국자들의 요구에 따른 것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군정 당국자들은 독촉이 모스크바 외상회담 개막 전에 구성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형위원회는 5~6일 회의에 이어 13~14일에 다시 회의를 열어 중앙집행위원 39인을(이승만 빼고) 선정했고, 12월 15일에 중앙집행위원회 첫 회의를 열었으나 이승만 포함 16명만이 참석했다.
독촉을 정당 통합 대신의 정치 통합으로 생각해서 지지하고 추진한 것이 안재홍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정 당국자, 이승만과 한민당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독촉 중앙집행위원회를 '정무위원회'로 만들려 한 것이다. 11월 20일 주한 정치 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전문으로 보낸 '랭던 제안'에서 말한 'Governing Council'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조직이 만들어졌으니 신탁 통치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좌익의 호응을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4일 전형위원회에서 선정된 39인 중 좌익 인사는 인민당 4인, 공산당 4인 등 15인이었지만 전원 참여를 거부했다. 소수파로 끌어들여 놓고 다수결로 묵살해 버리는 이승만의 '들러리 수법'이 이제 들통 나 버린 것이었다. 좌익의 참여가 전혀 없는 조직을 놓고 "한국인의 정치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10월 13~14일 맥아더-하지-애치슨과의 '도쿄 회담' 이래 군정청에서 극도의 존대를 받던 이승만의 위신은 이 실패로 크게 추락했다. 이 무렵 군정장관이 러치로 교체된 것도 남한 군정에서 '맥아더 노선'의 좌절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법학을 전공하고 헌병 병과에서 근무해 온 러치로의 교체는 야전군 출신에게만 남한 군정을 맡겨놓을 수 없다는 워싱턴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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