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의과대학 졸업식 미스터리…그 진실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의과대학 졸업식 미스터리…그 진실은?

[근대 의료의 풍경·81] 의학교 졸업생 ②

오늘날 우리나라의 초등·중등·대학교의 졸업(식) 시즌은 2월이다. 1962년부터 3월 초에 새 학년이 시작하여 2월 말에 학년이 끝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1961년까지는 일본식으로 4월에 새 학년이 시작하는 학사 일정을 채택했기 때문에 졸업식은 대개 3월에 가졌다. (그런가 하면 8·15 해방 직후 미 군정 시기에는 미국식으로 10월 새 학년 제도를 실시하여 졸업식이 9월 또는 그 이전 달에 있었다.)

의학교의 졸업식은 언제였을까? 제1회는 1903년 1월 9일, 제2회는 1904년 7월 2일, 제3회는 1907년 1월 29일, 제4회(대한의원 제1회)는 1908년 1월 21일, 제5회(대한의원 제2회)는 1909년 11월 16일로 1월이 세 번, 7월과 11월이 각각 한 번이었다. 1월에 졸업식을 가진 경우가 가장 많기는 하지만, 졸업식이 1월로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졸업식 날짜를 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개 졸업생 명단이 확정되고 난 며칠 뒤에 졸업식을 갖는다. 법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졸업생 명단의 확정이며, 졸업식은 그러한 사실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형식적 절차이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졸업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졸업시험방(卒業試驗榜)의 형태로 졸업생으로 결정된 명단을 발표했다(<관보> 1902년 7월 12일자, 제78회). 그리고 졸업시험방 발표일 또는 그 며칠 뒤 날짜로 졸업 증서를 발급했다.

▲ 대한의원 교육부 제1회 졸업생 홍대철(洪大喆)의 졸업 증서. 발급 일자가 1907년 7월 30일로 되어 있다. 졸업생 명단 공고일은 7월 9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졸업식은 반년 뒤인 1908년 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홍대철 등 대한의원 교육부 제1회 졸업생들은 의학교 시절인 1904년에 입학하여 대부분의 과정을 의학교 학생으로 이수했으며, 마지막 몇 달 동안만 대한의원 교육부 소속으로 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프레시안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의학교 졸업생의 명단이 확정되고 한참 지나서야 졸업식이 거행되었던 사실이다. 즉 제1회는 6개월 뒤, 제2회는 1년 뒤, 제3회는 1년 1개월 뒤, 제4회는 6개월 뒤, 제5회는 1년 4개월 뒤에야 졸업식을 가졌다. 이렇게 졸업식이 늦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1회의 경우는 재학 시절 하지 못했던 병원 실습을 부속 병원 완공 뒤에 이수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제80회). 그렇다면 의학교가 제도적으로는 3년 과정이었지만 제1회 의학생들이 실제로 수학한 기간은 3년 반이었던 셈이다.

▲ 의학교 졸업 회(回)별 졸업생 명단 공고일, 졸업 증서 발급일과 졸업식 날짜. 의학교 시절에 입학했던 제4회와 제5회는 각각 대한의원 교육부 및 의육부(醫育部)로 졸업했다. ⓒ프레시안

그러면 그 뒤에도 항상 졸업식이 늦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졸업 증서 수여라는 법적 절차 이후 병원 실습이나 "의술 개업"(최국현, 제80회)을 통해 의사로서의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뒤에 졸업식이라는 사회적 공인 행사를 치렀던 것이었을까?

<황성신문> 1908년 7월 10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대한의원 의육부 졸업식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대한의원 의육부 졸업생에게 가졸업장(假卒業狀)을 일전에 반급(頒給)한즉 해(該) 졸업생덜이 불수(不受)하얏다는대 기(其) 이유인즉 졸업식을 설행하고 졸업장을 일제 반급할 것이나 의육부를 방금 건축하는 중인대 해부(該部) 건축하기 전에는 졸업식을 설행할 처소가 무(無)한 고로 건축이 낙성된 후래추간(後來秋間)에 졸업식을 설하고 졸업장을 반급하기로 결정하얏는대 기전(其前)에 해(該) 학도가 졸업을 경(經)하고 공환(空還)의 탄(歎)이 무(無)케한 소이라더라"

요컨대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졸업식은 나중에 의육부 건물이 완공된 뒤에 가질 것이며, 또 그때 졸업장을 수여하기 전에 임시로 가(假)졸업장을 발급했는데 학생들이 수령을 거부했다는 내용이다. 졸업식을 뒤로 미룬 이유가 장소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은 매우 궁색해 보인다. 바로 전 회 졸업생들도 사정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6개월 정도 뒤에는 졸업식을 가졌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로 졸업식이 6개월 내지 1년 4개월이나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소 문제와 같은 사소한 이유 때문에 늦어졌다고 볼 수는 없고, 그 기간 동안 병원 수련 등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의학교 제2회 졸업생은 우등 3명, 급제 10명 등 모두 13명이었다. 이 가운데 출생 연도가 확인되는 7명의 입학 시 나이는 평균 19.6세이고,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평균 22.6세로 제1회 졸업생에 비해 5살이나 적어졌다. 숫자가 얼마 안 되어 통계적 의미를 찾기는 어렵지만, 만학자가 줄어든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 일람> 1914년 판. 지성연과 강원영이 1910년 11월 의과(醫科)를 수료했다고 나와 있다. 두 사람은 1906년부터 일본에 유학했는데,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한 기간은 확인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제2회 졸업생 역시 제1회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두 군의관으로 관직 생활을 했고, 군대 해산 뒤에는 의원을 개업하거나 다른 사람의 진찰소 등에서 일했다. 이들이 1회 졸업생에 비해 특징적인 것은 지성연, 최국현, 강원영, 홍종욱 등 4명이나 졸업 후에 일본에 유학을 했다는 사실이다. (1회 졸업생 중에서는 이규영 한 명만이 일본에 유학했으며 성과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최국현은 1905년부터 2년 동안 가네자와(金澤)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했고(이는 그의 관원 이력서에 의거한 것이며, 가네자와 의전 기록에는 최국현의 수학 사실이 나와 있지 않다), 지성연과 강원영은 오카아먀(岡山) 의학전문학교를 수료하고 의학사가 되었다(수료자에게도 의학사 학위를 수여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총독부의원 제1회 연보>(1911년)에 의학사로 기록되어 있다).

▲ 홍종욱이 1908년에 펴낸 <신찬 산술통의(算術通義)>(독립기념관 소장). 남순희의 <정선산학(精選算學)>과 더불어 대한제국 말기의 베스트셀러 수학 책이었다. ⓒ프레시안
지성연과 강원영은 일본 유학 경력 때문인지 귀국 직후인 1910년부터 1913년까지 각각 조선총독부의원의 내과와 외과에서 조수로 근무했다. 이들보다 일찍 귀국했던 최국현은 지성연과 강원영보다 유학 경력은 떨어지지만 대한의원에서 의원, 의관, 교수로 일했다.

한편, 1904년부터 2년 동안 관비로 일본에 유학한 홍종욱은 일본에서 의학이 아니라 재정과 회계에 관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귀국 후인 1906년부터 주로 탁지부에서 번역 일을 했으며, 일본 유학 때의 수학 경험을 살려 1908년에는 <신찬(新撰) 산술통의(算術通義)>를 펴내었다. 홍종욱은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토지조사국에서 기사로 근무했다.

최국현, 김수현, 강원영, 지성연 등 의학교 제2회 졸업생들은 망국을 전후하여 설립되었던 사설 의학 강습소 중 하나인 조선의사연찬회 신구(新舊) 의학 강습소의 신의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이들의 활동은 대한제국 시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위생 계몽운동을 의료인이 되려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보다 심화시킨 것이었다.

▲ <매일신보> 1911년 9월 19일자. 조선의사연찬회 신구(新舊) 의학 강습소를 소개하는 광고 기사이다. 이 강습소의 신의학 강사 8명 중 의학교 출신이 5명으로, 그 가운데 최국현, 박용남, 김수현은 "의학득업사"로, 일본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수료한 강원영과 지성연은 "의학사"로 학위가 표시되어 있다. 대한의원 의육부를 졸업한(의학교 제4회에 해당) 박계양은 "의학진사"로 되어 있으며(1910년 2월 1일 제정된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규칙>에 의학과 졸업자에게 의학진사 칭호를 부여하기로 규정했다), 당시 총독부의원 의학 강습소 3학년 학생인 강창오에게는 "의학수험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프레시안

▲ 의학교 제2회 졸업생(우등 3명, 급제 10명)의 경력. 졸업 당시의 "성적순" 기록에 따라 배열했다. 출생 연도가 확인되는 7명의 입학 시 나이는 평균 19.6세이고,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평균 22.6세이며. 가장 만학인 차현성의 졸업시 나이는 30세였다. 위 표에서의 개업 상황은 그 시점에 새로 개업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렵에 개업하고 있었음을 <총독부관보>, <일본의적록> 등에서 확인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