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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우등생들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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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우등생들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80] 의학교 졸업생 ①

의학교의 설립이 우여곡절을 겪었듯이 그 운영도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의학 교육과 진료 경험이 있는 교수(교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의학생 교육이 시작될 1899년 9월까지는 귀국하리라고 기대되었던 김익남은 자신의 졸업 후 연수 훈련을 위해 귀국을 늦추었으며, 게다가 외국인 교사로 임명된 후루시로도 학생들의 배척으로 1900년 5월 의학교를 사직했다(제79회). 그러나 후루시로의 후임으로 고다케가 6월에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고 김익남이 8월에 귀국하여 교관으로 취임하면서 교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교육 내용과 방식이었다. 제1회 졸업생의 경우, 졸업 증서를 받은 1902년 7월까지 의학 교육에 꼭 필요한 임상 실습은 거의 하지 못했다. 부속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학교가 설립될 때부터 교장 지석영 등이 정부에게 부속 병원의 설립을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재정 형편 등으로 계속 미루어지다 1902년 8월에야 겨우 병원이 완공되어 제1회 졸업생들은 뒤늦은 임상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하마터면 선교 의사 알렌처럼 제대로 된 임상 훈련을 받지 못한 채(제16회) 환자를 진료할 뻔했다. 하지만 임상 교육 문제도 제2회 졸업생부터는 별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 <황성신문> 1901년 4월 17일자. 의학교 학도 최규수(崔奎綬) 등이 산수(筭學) 시간을 일본어 시간으로 바꾸어 달라고 청원했다는 기사이다. 학생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직전의 학기 시험에서 우등을 했던 최규수(1900년 입학)는 의학교를 그만 두었고, 나중에 재무직 관리가 되었다. ⓒ프레시안
세 번째로 일본인 교사가 한국어를 하지 못해 통역을 통해서 수업을 하고 교과서도 대부분 일본어로 된 것을 사용한 것도 작지 않은 문제였다. 학생들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학교에 일본어 강좌를 개설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야간 강습소 등에서 일본어를 따로 배워야만 했다. 시간과 노력의 낭비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일본어를 습득함에 따라 일본어로 된 의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네 번째, 의학생들에게 더욱 큰 문제로 다가왔던 것은 졸업 후의 취업 문제였다. 근대 서양 의술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수요는 그 이전에 비해 증가했지만, 실제 의학교 졸업생들이 일할 공간은 여전히 좁았다. 이들이 스스로 병원이나 진찰소를 열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부족했고(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제2회 졸업생 최국현이 졸업 후 1년 동안 "의술 개업"을 한 것이 고작이다), 취업할 의료 기관도 거의 없었다. 국립병원인 광제원은 한의사나 종두 의사들이 선점하고 있었고(제49회), 일본인과 서양인 의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리도 없었다.

▲ 의학교 제2회 졸업생 최국현(崔國鉉)의 관원 이력서. 최국현은 의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03년 8월 18일부터 1년 남짓 "의술 개업(醫術開業)"을 했다. ⓒ프레시안

정부는 의학교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료로 기숙사를 제공하고 교과서와 필기도구 등을 무상으로 임대하거나 제공함으로써 학생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와 더불어 정부는 의학교 졸업생들을 활용할 방안도 함께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없었거나 미흡했던 것이다.

국·공립 의학교와 병원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장밋빛 청사진은 있었지만(<의학교 관제>와 <병원 관제>), 그러한 꿈을 실현할 구체적인 계획과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학부는 궁여지책으로 모든 의학교 졸업생을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했지만 명목에 지나지 않았던 바, 김교준과 유병필 2명만이 실제로 교관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임시위생원 위원이나 유행병 예방위원, 검역위원 자리도 임시직이거나 명예직이었을 뿐 의학교 졸업생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대로 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의학생들의 중도 이탈이 적지 않았다. 1899년 9월, 의학교가 수업을 개시했을 때 50여 명이었던 의학생 수는 점차 줄어들어 입학생의 40%도 안 되는 19명만이 졸업했다. 1900년에 입학한 제2회의 경우, 입학생 수는 알 수 없지만 졸업생이 12명으로 제1회 때보다 사정이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개선되지 않았다. 그리고 1901년에는 아예 입학생을 뽑지 않았으며 1902년 입학생 가운데에는 불과 4명만이 졸업했다(역시 입학 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발전은커녕 날이 갈수록 사정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여러 모로 촉망을 받았을 우등생 중에서도 중도 이탈자가 적지 않았다. 1899년 입학생 가운데 강민(姜民), 송석환(宋錫煥), 유용(劉瑢) 등 3명(우등생 8명 중), 1900년 입학생 가운데 최규수(崔奎綬), 홍종훈(洪鍾熏), 서상설(徐相禼), 김지현(金志鉉) 등 4명(우등생 7명 중)이 중도에 의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 가운데 강민은 사립 적용학교(適用學校)로 전학했고, 최규수는 재무직 관리, 서상설은 교원, 김지현은 혜민원(惠民院) 주사가 되었다.

▲ 의학교 학기 시험 우등생.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중도에 의학교를 그만 두었다. 홍종훈(洪鍾熏)은 의학교 2회 졸업생 홍종욱(洪鍾旭)의 오기이거나 개명 전 이름일지 모른다. ⓒ프레시안

통감부와 일본인 의사들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서양인 의사들도 의학교와 그 졸업생들의 존재를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하려 했다.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한 의학교의 설립, 운영과 그를 통한 최초의 근대식 의사 배출의 의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그런 태도에는 한국인들의 자주적 노력을 폄하하고 무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성가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의학교와 그 졸업생들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

의학교 졸업생 가운데 제2회의 홍종욱과 같이 졸업 뒤 아예 진로를 바꾼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의사로 활동했다.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은 한국인 의사가 극히 적었던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 초기, 근대 의료에 대한 한국인(조선인) 환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은 바로 이들 의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를 확인시켜 주는 자료가 1917년 <신문계(新文界)> 제5권 2호에 게재된 <경성유람기(京城遊覽記)>이다. 이 글은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당시 경성에 실존했던 "고명한 의사의 병원"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글에서 저자(碧鍾居士)는 총독부병원, 세브란스병원과 더불어 강원영(의학교 제2회)의 경성병원(京城病院), 유병필(의학교 제1회)의 보생의원(普生醫院), 안상호 진찰소, 박용남(의학교에서 수학)의 공애당(共愛堂), 김수현(의학교 제2회) 진찰소, 나영환(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졸업)의 순천병원(順天病院), 박계양(의학교 제4회)의 한양병원(漢陽醫院), 오상현의 한성병원(漢城病院), 원덕상(일본 치바의학전문학교 졸업)의 덕제병원(德濟病院)을 경성의 대표적인 병의원으로 꼽았다.

강원영, 유병필, 김수현, 박계양과 같이 이름을 날린 사람들 외에도 의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 의술로 환자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었다. 의학교와 그 졸업생들의 의의를 이것 외에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1917년 <신문계(新文界)> 제5권 2호(15-52쪽)에 게재된 <경성유람기(京城遊覽記)>. ⓒ프레시안

▲ 의학교 제4회 졸업생 정윤해(鄭潤海)가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에 개설한 호남병원(湖南病院). <일본의적록> 1928년 판에서. 의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도 크고 작은 병의원을 개설하여 환자를 진료하는 등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프레시안

의학교 졸업생들은 또한 출신 학교와 소속을 떠나 다른 한국인 의사들과 더불어 콜레라 방역 사업을 벌이는 등 질병 퇴치와 국민 건강 증진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황성신문> 1909년 9월 30일자는 "의사 안상호, 김필순, 김희영, 이석준, 박용남, 박서양,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 9씨가 목하 창궐하는 호환(虎患, 콜레라)을 방관키 불인(不忍)하다 하야 방역에 관한 방법을 구(具)하야 헌신적 검역 사무에 종사하겟노라 내부에 청원 득인(得認)하야 방역집행위원과 보조원 등과 공동하야 검역예 종사하는 고로 제씨의 미거(美擧)를 인개찬지(人皆讚之)한다더라"고 보도했는데, 의학교 출신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가 세브란스병원의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과 협동하여 방역 사업을 벌인 것이었다.

▲ <황성신문> 1909년 9월 30일자. 의학교 출신 의사들과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이 협력하여 콜레라 방역 사업을 벌이는 "미거(美擧)"를 보도했다. ⓒ프레시안

졸업 직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의학교 1회 졸업생들은 대개 1904년경부터야 군대에서 군의로 장병들의 건강을 돌보았으며, 1907년 한국군 해산 뒤에는 의원이나 진찰소를 열든지, 아니면 다른 자본주들이 개설한 의원이나 약국에서 고용 의사로 일했다. 그리고 이들은 차차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가면서는 스스로 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이규영, 김봉관, 유병필 등은 여러 계몽운동 단체 잡지에 위생과 의학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는 등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 <황성신문> 1906년 10월 31일자. 의학교 1회 졸업생 이규영의 기고문 "위생 교육이 의(宜)평등진보"가 실렸다. 이규영은 의학교 졸업생 가운데에서도 위생계몽 운동에 가장 열심이었다. 이규영은 1907년부터 일본에서 고학으로 유학을 했지만, 별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레시안

▲ 의학교 제1회 졸업생(우등 5명, 급제 14명)의 경력. 졸업 당시의 기록에 따라 "성적순"으로 배열했다. 출생 연도가 확인되는 13명의 입학 시 나이는 평균 24.7세이고,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평균 27.7세이다. 일제시대의 개업 상황은 그 시점에 새로 개업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렵에 개업하고 있었음을 <총독부관보>, <일본의적록> 등에서 확인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박용남(의학교 수학)이 저술하고, 김상건(의학교 1회 졸업)이 교열하여 1909년에 출간한 <정선 가정구급법>(장서각 소장). 외국서적들을 편역한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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