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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도 사장님은 우주인 복장을 하고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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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 때도 사장님은 우주인 복장을 하고 다녔어요!"

[안종주의 '위험사회'] 치명적인 질병의 근본 원인

지난 16일 오후 2시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농협 앞마당에서는 흥겨운 풍물패들의 길잡이 풍물놀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50대와 60대 10여 명의 할머니들로 이루어진 동네 풍물패였지만 그동안 많이 놀아본 듯 장구와 꽹과리, 징 소리 등이 잘 어울렸다. 이들은 '석면을 추방하자'와 '전국 석면 피해자 대회' 등의 글귀가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들이 흥을 돋우는 동안 60대에서 80대에 이르기까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농협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200명 가까운 동네 주민들이 광천읍 상정리, 덕정리 등 일제 때 아시아 최대 백석면 광산으로 유명했던 광천광산 지역 인근 주민은 물론이고 멀리 보령, 청양 등 충남 지역 다른 석면 광산 주변 주민과 국내 최대의 석면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부산 제일화학 석면 피해 노동자 출신과 경상북도 영주시 봉화 석면 광산 석면 피해자, 그리고 경기도 광명, 대전, 경북 김천 등지에서 온 환경성 악성중피종 석면 피해 환자들도 눈에 띄었다.

석면피해구제법 주민 설명회를 곁들여 열린 이날 전국 석면 피해자 대회에서 이들은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경우에 얼마만한 피해 보상금을 주는지를 설명하는 산업의학전문의인 박영만 변호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설명회 후 질문들이 마구 쏟아졌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일제 때부터 석면광산에서 일하다 10~40년 전 이미 숨졌는데 이런 경우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느냐"에서부터 "지난해 순천향대병원 의료진한테서 석면폐증와 흉막반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받으라고 하지만 동네 병원에 가면 감기약과 천식 약만 준다. 어디에 가면 석면 질환 치료를 받을 수 있느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적게는 수백 만 원에서 많게는 3000만 원 가량의 보상금으로 어떻게 치명적인 악성중피종과 석면폐증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돈 3000만 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벼락을 당한 피해자들의 정신적인 고통 피해는 무엇으로 보상해줄 수 있느냐"는 석면폐 환자와 악성중피종 환자들의 불만도 쏟아졌다. "이런 석면피해구제법을 정부가 미리 만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환경부 담당자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날은 우리나라 석면 피해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모여 대규모 집회를 가진 매우 뜻있는 날이다. 특히 석면 산재 피해자와 환경성 피해자들이 한 조직 아래 모였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이날 전국 석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상시적으로 모일 수 있는 사무실을 석면 피해자가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석면 광산이 가장 많았던 충남 지역에 마련해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앞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이들의 요구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날 피해자와 주민들이 한결같이 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석면이 이처럼 위험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삼촌, 당숙, 형, 오빠, 동네 어른이 쉰이나 예순도 채 못 넘기고 죽었을 때 그냥 폐병이나 단순 암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정부의 무관심과 주민들의 무지가 어우러진 비극이었다.

굳이 석면 피해자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는 위험 사회였고 지금도 위험 사회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른 채 작업장에서, 가정에서 직업병과 환경병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 석면 피해자가 공장 노동자와 주변 주민, 석면 광산 노동자와 주변 주민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0~50년 전에 무방비로 석면 먼지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날 모인 사람들이 바로 그 산 증인들이다.

▲ 지금 이 순간도 일상생활 곳곳에 위험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하철 역의 석면 위험을 고발한 한 프로그램. ⓒMBC

현대 사회에서 위험은 피할 수 없다. 어떤 학자(루만)는 이제 위험은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그 위험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위험성을 전혀 모른 채 지내다 발병하고 난 뒤에야 뒤늦게 알고서는 분노를 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로 간접흡연과 대기 오염, 실내 공기 오염 따위를 꼽을 수 있고 후자로는 여러 직업병과 환경병 사례를 들 수 있다.

그 위험성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다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가장 유명한 사례로 1988년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던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이황화탄소라는 신경 독성 물질의 위해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사람은 일부 산업의학자와 노동부 등 몇몇 정부 당국자, 그리고 회사 고위 간부 등 소수였다. 원진레이온에 근무했던 대다수 노동자와 이곳을 지나쳤던 수많은 시민과 주변 주민은 단순히 고약한 냄새가 나며 이 냄새나는 기체가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위험만을 느꼈을 뿐이다.

회사는 자신들이 가장 아껴야 할 노동자와 돌보아할 그들의 건강에 대해 무관심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매년 정기적으로 하게끔 돼있는 의무적인 안전 보건 교육은 공장 설립 20여 년이 되도록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조심 교육만 1년에 단 한차례 했을 뿐이다. 회사 경영진에게 노동자란 단순히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살기에 바빴다. 그들이 취급하는 물질에 어떤 독성이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이런 것을 묻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 못 배운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다루는 물질의 이름조차 몰랐다. 당시 취재를 하면서 "이황화탄소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처음 듣는다"고 답했던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유해 부서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과 같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줄 법의 관련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다. 회사는 이런 노동자들의 무지가 고마울 뿐이다. 회사는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에 대해 모르는 척 했다.

그러는 사이 신경 독성 물질은 노동자의 온 몸에 퍼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려 1000명에 가까운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가 한 공장에서 양산됐다.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자 세계 최대의 단일 공장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사건으로 기록됐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필자가 신문을 통해 폭로함으로써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들의 질병이 직업병이며 회사가 이를 숨겨왔다는 사실에 분노해 강철 같은 대오를 만들어 투쟁하기 시작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은 수 년간에 걸친 그 치열한 투쟁의 역사로 직업병의 무서움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 사건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치열하게 투쟁이 펼쳐졌던 직업병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불행했던 이 사건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양심적인 젊은 의료인, 열정적인 노동운동가들이 피해자와 그 가족과 하나가 되어 정부와 회사를 상대로 온 몸을 던져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승화시켰다.

위험을 널리 알리고 그 위험에 잘 대처하기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시민의 각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양심적이고 헌신적인 전문가 집단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을 일으켰던 이황화탄소처럼 석면도 최근까지 그 위험성을 시민들은 물론이고 이를 다루었던 노동자조차 잘 몰랐다. 폐암과 악성중피종, 석면폐 등을 일으키는 석면의 치명적인 위험성 또한 그동안 몇몇 산업보건 전문가와 노동부 등 정부 관계자들만 알고 지냈다.

이 때문에 석면 광산과 석면 방직 공장, 석면 브레이크 생산 공장 등에서 석면을 다루었던 많은 노동자와 이들 광산과 공장 주변 주민들은 아무런 보호조치 없이 하얀 죽음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일하거나 생활해왔다. 이들 가운데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1960년대부터 폐질환으로 죽어갔지만 정부와 전문가들조차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른 채 그냥 '돌가루병' '폐병'으로만 알고 죽어갔다. 이들의 가족과 친척,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면 광산이 일제 말기 때부터 가동됐고 옛날 석면 광산에서 일했거나 일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인근에서 수십 년간 살아왔던 주민들에게서 석면폐 등 석면 질환이 무더기로 발생한 사실이 2009년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석면의 위해성이 전 국민에게 각인되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이들 또한 원진레이온 노동자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 국내 최대의 석면 방직 공장이었던 부산 연산동의 제일화학(지금은 부산 인근 경남 양산의 제일E&S)에서 1970~90년대 일했던 석면 피해자들이 한데 모여 피해자와 그 가족 모임을 만들었다. 연락이 닿아 함께 모임을 가지는 회원만 150명이다. 실제 유해 작업 부서에서 일했던 사람은 이보다 몇 배나 많다. 이미 30여 명은 석면 질환으로 숨졌다. 하지만 사망자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원인으로 죽는지를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제일화학에서도 노동자들은 단 한 차례도 석면이 발암 물질이며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교육 받지 못했다. 회사 경영주는 석면의 위험성을 잘 알아 아예 공장 안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가져와 설치한 석면 방직기를 점검하러 온 일본 기술자와 함께 공장 안을 돌아다닐 때 무방비 상태로 일하는 노동자와는 달리 이들은 당시에도 우주인과 같은 복장, 즉 보호의와 방진 마스크를 쓰고 공장을 둘러보았다.

원진레이온과 마찬가지로 제일화학도 아무것도 모르는 석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래도 약간의 양심은 있었던지 임금은 다른 일반 방직 공장보다 약간 후했다. 나중에 노동자들은 이 웃돈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음을 알고 더욱 치를 떨었다. 그리고 "석면이 그렇게 무서운 물질인줄 알았다면 결코 그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후회했다.

석면 질환이나 이황화탄소 중독증과 같은 질환은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방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다른 직업병이나 환경병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많다. 노동자와 시민들이 작업장과 일반 환경이 오염되는 것을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앞으로 원진레이온이나 석면 질환자와 같은 직업병 환자나 공해병 환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유해 작업장 노동자와 유해 물질이 환경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교육하고 홍보하는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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