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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이 日 의대 교수 쫓아낸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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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이 日 의대 교수 쫓아낸 진짜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79] 후루시로

1899년 3월 24일자로 반포된 <의학교 관제>는 제10조에 "교관은 혹 외국인을 고용하야 충(充)함도 득(得)하나 기(其) 원수(員數)는 학부대신이 필요한 데 응(應)하야 종의타정(從宜妥定)함이라", 제11조에 "교관을 외국인으로 이(以)하야 충할 시에는 교수(敎授)만 장(掌)함이라"고 규정하여 교장, 교관, 서기 등 한국인 직원 이외에 외국인 교관을 둘 수 있되, 그들의 임무는 학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한정했다. <관제>에는 "교관(敎官)"이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의학교 규칙>과 졸업 증서(제77회) 등 그밖에 다른 기록에는 거의 모두 "교사(敎師)"로 되어 있어 이 글에서는 교사로 표기한다.

의학교가 존속한 1899년부터 1907년까지 8년 동안 외국인 교사는 2명이 있었다. 민간인 의사 후루시로(1899~1900년 재임)와 군의관 고다케(1900~1907년 재임)로, 둘 다 일본인이었다.

1883년 오이타(大分) 현립(縣立) 의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5월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 의사로 조선에 온 후루시로(古城梅溪, 1860~1931년)는 1891년 5월 공사관 의사를 사직한 뒤 진고개(지금의 명동 세종호텔 부근)에 찬화병원(贊化病院)을 설립하는 한편 일본인 거류지 공의(公醫)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1897년(또는 1896년) 찬화병원 부설로 종두의 양성소를 설치하여 81명의 한국인 종두 의사를 양성했다(제48회).

후루시로가 의학교 교사로 임명된 데에는 오랜 기간 한국에서 의사로 활동한 것과 더불어 종두의 양성소를 운영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루시로는 10년이 넘는 한국 생활과 한국인 학생 교육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의학교 강의도 통역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점은 후임자 고다케도 마찬가지였다.

▲ 1899년 5월 16일 대한제국 정부와 후루시로 사이에 체결된 의학교 교사 계약서. 주요한 내용은 (1)고용 기간은 1899년 5월 16일부터 3개년, (2)만기 후 재고용에 관해서는 학부와 해당 교사가 미리 상의, (3)월급(薪金)은 130원, (4)학교 과정 및 교수에 관한 일은 학무국장과 교장의 지휘에 따른다는 것 등이었다. ⓒ프레시안

계약서에 후루시로의 실제 근무 조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없지만, 그가 찬화병원을 계속 운영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일제(全日制) 교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자신이 설립한 종두의 양성소에서는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과 달리 의학교에서는 봉급을 받으며 교사 생활을 했다.

원래 후루시로의 고용 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독립신문> 1899년 5월 11일자에 중의원에서 논의 끝에 계약 기간을 1년으로 결정했다고 보도된 것은 잘못으로 생각된다. 위의 5월 16일자 계약서에 고용 기간이 3년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의학교 학생들이 후루시로의 해부학 강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의 수업을 보이콧했을 뿐만 아니라 퇴학을 청원한 것이었다. 한국 근대 의학 역사에서 첫 의학생 스트라이크였다.

<황성신문>은 1900년 4월 17일자와 18일자에 잇달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의학교 교사 고성매계(古城梅溪) 씨가 학도 교과 중 해부 상에 무삼 차오(差誤) 함이 유(有)하던지 제 학도 등이 일제 퇴학한다고 학부에 청원하얏더라."

"작일(昨日) 학부에셔 의학도 40명을 초치하야 해(該) 교사의 차오한 이유를 상문(詳問)한즉 학도들이 답왈(答曰) 해부과 중 골학(骨學)을 교수하는대 좌경(左脛)을 우경(右脛)이라 하야 교과서를 개사(改寫)까지 하얏고 두골(頭骨)의 凹凸을 미분(未分)하얏스니 대저 골학은 수마목도(手摩目覩)하는 건이니 교사가 오수(誤授)하야도 학도가 해득고정(解得攷正)하얏거니와 근학(筋學)과 내부학(內部學)에 우여차(又如此)하면 인민을 위생함은 고사하고 반위(反爲) 상해하리니 생등(生等)이 퇴거하야 군출(窘絀)한 국고금을 허비치 안캣노라 하니 해부(該部) 대신이 효유왈(曉諭曰) 왕우(往于) 학교하야 지령을 대(待)할 건이오 또 교사의 해고 여부는 본 대신이 상량처결(商量處决)하리니 제대하회(第待下回)하라 하더라."

의학 공부의 시작은 해부학이며, 그 중에서도 골학(骨學) 즉 뼈부터 공부하는 것은 10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의학생들의 주장에 의하면 후루시로가 정강이뼈(脛骨)의 좌우를 혼동하여 교과서를 잘못 고쳐 적기까지 했고 머리뼈(頭骨)의 요철(凹凸)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뼈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단순한) 것이라서 교사가 잘못 가르쳐도 학생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근육과 내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교육을 받는 경우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엉터리 교육을 받아 국고를 낭비하기보다는 이참에 학교를 그만 두는 것이 낫겠다는 게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학생들이 퇴학하겠다고 학부에 통고하고(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대신 김규홍(金奎弘)이 학생 모두를 학부 청사로 불러 직접 그 연유를 알아 본 것은 이 일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당시 유일한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이자 최고 학부로 출발한 의학교가 이 일로 인해 자칫 좌초할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교사가 관련된 외교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학부대신은 학생들의 주장을 경청한 뒤 자신이 교사의 해고 여부를 결정할 터이니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결정을 기다리라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 후루시로는 다음과 같이 학부에 해명했다. 먼저 그는 머리뼈(구체적으로는 눈구멍(眼窩)의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의 요철 문제에 대해서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학생들의 이해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만 "본래 인체의 골격 조립은 좌우가 반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가르칠 때 그 골격 조립이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책과 뼈의 위치를 대조해 보지 않았는데, 이들 뼈에 대해 다시 보니 완연히 좌우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를 학생들에게 알렸고 골격 조립도 다시 고쳤다"라며 정강이뼈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 후루시로가 학부에 제출한 해명서. 4월 18일과 20일 사이에 제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루시로는 이 해명서에서 정강이뼈에 대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정강이뼈(脛骨)의 좌우 내외도 분별 못한다 하면 이는 커다란 무언(誣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프레시안

양쪽의 주장을 파악한 학부대신 김규홍은 4월 21일자로 교장 지석영에게 "학원(學員)들의 청원이 괴이할 것도 없겠으나 그 교사의 2건의 실수는 잠시 살피지 못한 작은 과실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큰 잘못이 아니고 보면, 사제지간의 정의(情誼)에 경솔하게 논박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경골의 내외와 안와(眼窩)의 요철을 이미 정정했으니 사제 간에 이렇게 변론하여 정당점을 찾는 것이 수업 상 더욱 유익한 일이거늘 귀 교장이 어찌 학업이 중단되지 않게 하지 않고 이토록 번거롭게 보고했는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이에 지령하니 제원(諸員)에게 포유(佈諭)하여 즉시 등교하게 하고 등교한 상황을 보고하기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보냈다.

▲ 1900년 4월 24일 의학교 학생들이 교장 지석영에게 제출한 청원서. "정교치 못한 학문은 도리어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기에 이제 일제히 퇴학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퇴학을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후루시로의 사퇴를 요구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학생들의 주장도 인정하지만, 후루시로의 잘못도 단순한 과실에 불과하고 또 그것을 시정했으므로 곧 수업을 재개하라는 통보였다. 또한 공문은 오히려 교장이 초기에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점에 대해 비판했다. 이에 지석영은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학생들은 강경하게 반응하여 4월 24일 지석영에게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거듭 제출했다.

"일전에 학생들이 학부에 나오라는 명을 받고 갑자기 청원한 연유를 아뢰었던바 물러가 조처를 기다리라는 처분을 받고 주야로 기다렸는데 지금 지령을 보니 학생들을 효칙하여 고성매계 씨에게 전처럼 수업을 받도록 하라고 하셔서 교장께서 이처럼 간절히 효유하시니 학생들의 도리로는 즉시 명을 따라야 마땅한 일이나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이 학문이 다른 학문과는 달라 한 치만 틀려도 결과적으로는 천리의 오차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나무는 먹줄에 따라 곧아진다(木從繩則直)"라고 했으니 교사는 먹줄과 같고 학도는 목재와 같은데 먹줄이 바르지 못하면 나무가 무엇을 따라 곧아지겠습니까. 곧지 못한 나무는 버리면 그만이지만 정교치 못한 학문은 도리어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기에 이제 일제히 퇴학하니, 이는 대세가 부득이한 것이지 결코 성의가 부족하여서는 아닙니다. 조량(照亮)하옵소서."

이로써 공은 다시 학부로 넘어갔으며, 학부는 곧 후루시로의 자진 사임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침을 정했다. <제국신문> 4월 27일자 및 28일자에 의하면, 학생들이 청원서를 제출한 바로 다음날인 4월 25일 학부대신과 협판은 학부를 찾아온 후루시로에게 자퇴 청원서를 내도록 권면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통고했다.

<고용 계약서>에는 교사 사퇴에 관해 "교사가 본분을 지키지 않거나 규칙을 위반하면 학부에서는 외부에 알리고 외부에서 일본 공사관에 알려 공사관과 상의 하에 사퇴하도록 하며(敎師倘有不守本分違越規則事應由學部言明外部知照日本公使館會商使之辭退)"(제5관)라고 되어 있다. 이때 일본 공사관 측과 협의한 문서 등은 발견되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큰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국 정부가 절차를 위배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후루시로는 "이번 일에 학도들도 월권한 행위가 잇고 교쟝도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엿스니 소생을 해고할 지경이면 학도도 출학하고 교쟝도 면관하소셔 만일 그럿치 아니하면 공평한 쳐분이 아니니 해고함을 응낙지 못하겟소"(<제국신문> 4월 28일자)라고 하면서 자퇴서 제출을 거부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황성신문>은 4월 27일자에 "의학교의 당연 사리"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논설은 먼저 학도가 정당한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시기와 험담을 하며 제멋대로 교사를 배척한 것이라면 자퇴가 아니라 모두 출학(黜學)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리고 교사는 비록 사소한 일시적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해고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의학교가 거액을 지불하더라도 고명한 의사를 초빙하여 영재를 교육하고 인술을 전수하는 것이 당연하며, 학부도 사태를 파악했으니 즉시 학업을 근실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즉 이 논설의 앞부분에서는 학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후루시로의 자진 사퇴와 학부의 신속한 조치를 촉구하는 글이었다.

▲ <황성신문> 4월 27일자 논설 "의학교의 당연 사리." "당연"과 "사리"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면서 후루시로의 자진 사퇴와 학부의 신속한 조치를 촉구했다. ⓒ프레시안

▲ 학부대신 김규홍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보낸 1900년 5월 23일자 공문(學部來去文). 후루시로가 자기 처(荊妻)의 오랜 병(長病)을 전치(全治)하지 못해 귀국하여 요양하는 데에 동행해야 하므로 사표를 제출한다 하니, 일본 공관에 요청하여 일본인 중에서 의술이 정명(精明)한 사람을 다시 의학교 교사로 천거받아 달라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이렇게 사면초가에 놓인 후루시로였지만 한 달 가까이 사직원을 제출하지 않다가 묘안을 생각해내었던 것 같다. 후루시로는 5월 21일 자신의 과오와는 무관하게 아내의 오랜 병(長病)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로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후루시로는 6월 9일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인 7월에 다시 한국으로 와서 찬화병원에서 진료를 재개했다.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교를 사직한 다고 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한 구실이었음이 재차 확인된 것이었다.

그러면 의학생들은 왜 그렇게 완강하게 후루시로를 배척했을까? 이는 해부학 강의의 과오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후루시로가 학부에 제출한 해명서는 나름대로 타당한 점이 있어 보인다. 정강이뼈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시적 실수"를 인정했으며, 안와(眼窩)의 요철 문제에 대한 해명도 그리 엉뚱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후루시로가 의학생들의 출학과 더불어 지석영의 해임을 요구한 것이 문제 파악에 단서가 될 수 있을까? 1880년대 초부터 종두술 보급에 큰 공적이 있으며 거기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의 종두의 양성소에서는 완전히 소외되었다. 그에 따라 후루시로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지만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

아니면 한국인 학생들을 대하는 후루시로의 태도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이것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점이지만 역시 뚜렷한 근거는 없다. 일본어로 강의하는 후루시로에게서 학생들이 오만하고 강압적인 인상을 받았을 수 있겠지만, 한국어를 거의 못한다는 점은 후임자인 고다케도 마찬가지였다.

후루시로의 학력과 실력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1883년에 현립 의학교를 졸업하고 15년 이상 임상 의사의 경험을 쌓은 후루시로의 학력과 경력은 당시 일본 내에서도 그리 뒤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규 의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은 없었고, 종두의 양성소의 교육 경력이 전부일 뿐이었다. 따라서 해부학과 같은 기초의학 분야의 교육 역량에는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어쨌든 의학생들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를 한껏 과시했다. 후루시로의 후임자인 고다케를 길들이는 효과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학생들의 저항 정신 또는 반골 기질은 그 뒤 대한의원 시절(제56회)과 3·1운동 시기(제1회)에도 거듭 분출되었다.

후루시로가 사직하자 학생들은 5월 28일부터 등교하여 수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의학을 가르칠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김익남은 8월 초에야 귀국했다)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산술을 공부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6월 중순, 일본 공사관에서 학부에 추천한 일본군 1등 군의(대위) 고다케(小竹武次, 1864~?)가 의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고다케는 의학교 교사와 대한의원 교육부장을 지내는 동안 계속 군인 신분을 유지했으며 승진도 했다.)

고다케의 계약 조건은 후루시로와 비슷했지만, 계약 기간이 2년으로 줄어들고, 반면 월급은 1차년도에 150원, 1901년도 1월부터는 200원으로 인상한다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다. 고다케는 6월 12일부터 의학교에 출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다케는 1896년 9월 1등 군의 신분으로 한성에 와서 1910년 대한의원을 그만 둘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장직을 사직하고 군으로 복귀한 뒤 근무한 부대는 확인하지 못했다. 고다케는 의학교와 대한의원에 근무하는 동안 계속 군인 신분이었지만 민간인인 의학교 학생들과의 사이에 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 도쿄 친타이(鎭臺) 병원 군의강습생 시험 성적(1886년 3월 12일자). <일본 육군성 대일기(大日記)>에서. 고다케는 강습생 50명 중 15등이었다. ⓒ프레시안

그런데 고다케는 사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제국대학은커녕 정규 의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1885년 내무성이 주관한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의술개업면장(제450호)을 취득한 고다케는 도쿄 친타이(鎭臺) 병원에서 군의강습생(軍醫講習生)으로 실습을 거친 뒤 1886년 11월 육군 3등 군의(소위)로 임관했다. 고다케는 2등 군의정(軍醫正, 중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30년가량 군대에 재직하는 동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921년경부터는 히로시마 시에서 고다케 의원(小竹醫院)을 개업했다(<일본 의적록(醫籍錄)> 1925년 판).

▲ 일본군 2사단 16연대 소속 1등 군의 고다케가 의학교 교사(이 문서에는 강사로 표현)로 임명받는 데에 대해 육군대신의 허가를 요청하는 1900년 6월 23일자 상신서(왼쪽, 고다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와 그에 대한 결재 문서(오른쪽, 당시 일본 육군성의 결재 라인을 볼 수 있다). 고다케는 이 상신서에서 (한국의) 풍토병 연구도 자신의 역할로 자임했다. 당시 육군대신 가쓰라(桂太郞)는 8월 17일자로 고다케의 요청을 허가했다. 뒤에 총리대신이 된 가쓰라는 1905년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사이좋게 인정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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