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극본의 텔레비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보고자 시도한 부분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성애의 대상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모두 바른 성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아직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유력한 언론 하단에 큼직한 광고가 실렸다. 그 드라마 보고 우리 아들이 게이가 되어 에이즈로 죽게 되면 방송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표 광고주는 '바성연'이었는데,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 연합의 약칭이었다. 이런 견해의 차이는 성문화에 대한 것인가, 성도덕에 대한 것인가? 넓은 의미에서 도덕의 문제인가?
우리 주변에서 가끔 발견하는 구체적 일들을 거론하면, 가끔 진부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흥미롭다. 누구나 끼어들 수 있는 화제다. 그렇다면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옳음과 좋음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무언가 한 차원 높아진 느낌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을 포괄하여 그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든 구체적이며 특별한 이야기가 사례에 해당한다면,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논리적 주장이 이론이다.
옳음은 정의라고 표현해도 좋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 부정의란 말은 있어도, 나쁜 정의란 표현을 보통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좋음은 선, 바른 것이라고 하자.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 허용되는 것이라 이해하면 되겠다.
서울의 25개 구는 재정 형편이 각양각색이어서, 빈부의 차이는 초가을의 일교차보다 더 심하다. 기초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극심한 재정 양극화를 해소하려고, 국회는 구청에서 징수한 지방세 일부를 다른 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자 강남구와 서초구가 나서 우리 세금을 왜 다른 구 살림에 보태느냐면서 헌법재판소에 문제를 제기했다. 부자 구민들이 재산권을 주장하는 일은 허용될 수 있는 '좋음'에는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 '옳음'의 한계를 벗어난다.
▲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한국경제신문 |
인간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알아서 뭘 하려는 것일까? 실천, 다시 말하면 행동하기 위해서다. 정보를 포함한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실천에 옮긴다. 판단의 기준은 무엇으로 하는가? 이런 것들이 바로 철학의 근본 문제다. 그 무엇이 국가 공동체의 정책 방향과 관련돼 있을 때에는, 개인의 판단이든 정부의 선택이든 정치철학이라 부른다. 좋은 정치철학은 흔히 정의 실현에 가까운 수단으로 간주한다.
미국의 기초가 된 정치철학은 공리주의였다. 그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이 등장한 이후 자유주의로 바뀌었다. 자유주의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 중심을 두 기둥이 받치고 있다.
첫째, 개인의 특정한 권리는 공공의 선보다 중요하다. 모든 개인의 권리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개인의 권리는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단, 사회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는 허용한다.
둘째, 개인의 권리로 나타나는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개인은 스스로 자기 목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어떤 종류의 삶을 특정하여 권유해서는 안 되며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런 상황을 전제한 다음, 샌델의 주장 혹은 이론이 뒤따른다. 자유주의 이론에서 중립성의 요구 때문에 결여된 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도덕성과 종교를 완전히 배제하는 정치학은 얼마 못 가 스스로 환멸에 빠진다." (295쪽)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적 삶에 도덕적 에너지를 포함하는 데 너무 인색하다." (296쪽)
그래서 샌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도덕성을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는 중립성을 포기하고 도덕도 법률화해야 시민 정체성을 키우고 연대감을 고취시킬 수 있으며, 마침내 진보적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300쪽).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왜 도덕인가?>이다. 사실 샌델의 주요 저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는 1982년에 펴냈다. 미국의 공공 정치철학에 관한 <민주주의의 불만>은 1996년 작이다. 샌델이 미국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롤스를 물고 늘어지기였다.
롤스는 샌델 스스로 신이라 표현했듯이 거장이었기 때문에, 신참 정치철학자 샌델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 사회에서 폭발한 이유 중의 하나는 샌델이 하버드대학교 교수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론에 관한 기존 이론과 샌델의 이론을 요약하여 흥미로운 몇 가지 사례에 적용한 강의록이다. <왜 도덕인가?>는 샌델 자신의 정치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칼럼 형식의 글과 부연 설명한 글의 모음집이다. 원제목이 <공공 정치철학 : 정치의 도덕성에 관한 에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샌델의 주요 저서를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리는 없다. 그런 면에서 대중용으로 만든 책들이 시민의 정치철학 교과서로 적당하다. 이 책도 그렇게 활용하면 공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효용을 최대화할 수 있다. 도덕성의 필요는 독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샌델의 이론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기발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시큰둥할 수 있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한때 미국의 공화당이 연속으로 집권하다 클린턴의 민주당이 탈환한 사실들의 원인을 도덕 캠페인에서 찾고 있는데, 쉽게 수긍하기도 힘들다. 샌델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로 글을 쓰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유명해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건 사실이다.
어쨌든 샌델은 현역 정치철학자들 중에서는 항상 거론되는 주요 인물이 돼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도덕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샌델을 보수주의자로 분류한다. 그러나 폴 슈메이커는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조효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샌델을 급진 좌파에 앉혔다. 도덕성을 내세워 공공성을 중요시하므로 시민적 공동체주의에 속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소속의 이름표 달기를 좋아하는 습관에서 나오는 이런 혼란을 방지하려면, 따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인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덕 때문이 아니라 도덕의 내용이 항상 인간을 고귀하게 또는 바보로 만든다. 실제로 인간은 도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 도덕에 구애 받지 않고 싶어 한다.
'프레시안 books'가 본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이 계속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샌델에 대한 대중의 열광과는 다르게 지식인 사이에서는 그의 주장을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샌델의 책에 대한 다양한 지식인의 시선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강양구 : "천안함 희생자는 '용병'!"…이 말에 왜 '분노'하는가? 구형민 : '정의'을 외친 샌델, 이제 '윤리'를 논하다 강명신 : 우리 시대의 '도덕', 샌델에게 맡기자고? 하승수 :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김민웅, 정태욱, 김명준 대담 : MB부터 10대까지 '정의' 타령하는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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