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들 가운데 '공자'라면 우리에겐 소만큼이나 친숙한 존재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악평이든, 평범한 인간으로서 신의 경지를 획득한 성인으로서든 한 마디씩은 비평할 수 있다. 또 '온고지신'이니, '극기복례'니, '내가 하고 싶은 않은 일을 상대방에게 미루지 말라'는 등 '공자님 말씀'은 오늘도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에겐 '낯익은 소'가 저 멀리 용으로 인식되는 세계에서 그려져, '낯선 소'로서 만나는 느낌은 그 자체로 신선하다. 우리가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소의 숨은 근육들이 도리어 돌출되어 부각된 대목들을 접하면 놀랍기도 하다. 이처럼 낯익은 존재가 '낯선 것'으로 드러날 때 드는 색다른 감회는 그 자체로 '문화'를 구성한다. 문화란 새로움에의 추구와 숨어있는 것의 재발견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공자 평전 :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안핑 친 지음, 김기협 옮김, 이광호 감수, 돌베개 펴냄). ⓒ돌베개 |
동아시아의 좋고 나쁜 전통들이 몽땅 공자라는 이름에 덕지덕지 덧붙어있다는 것. 그러니 동양사학자인 저자로서는, "중국에서 있었던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이 쓴 책을 쓴 까닭이다. 나는 공자를 이해하고 싶었고, 이 작업이 그 발견의 과정이 되기 바랐다"(프롤로그)고 저술의 계기를 술회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 "20년 동안 관련된 고전과 주석서를 섭렵하면서 공자의 모습을 구현할 자료들을 연구했노라"고 밝힌다. 상재한 <공자 평전>이 그 결과물인 셈인데, 그렇다면 이 '낯선 소'는 보통 공력이 든 노작이 아니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부제인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라는 표현 속에 함축되어있다. 그러나 공자라는 이름에 덧붙여진 수천 년 묵은 '신화'의 때를 벗기고, 더욱이 최근 중국 정부의 공자 프로젝트에서 보듯 또다시 공자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피하면서 '인간 공자'를 찾아가는 길은 녹록하지 않다. 여기서 저자가 '인간 공자'를 복원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신빙성 있는'(authentic) 자료들에 대한 치밀한 문헌 고증학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술술 읽히는 대중 교양서가 아니다. 번역자가 속내를 토로했듯, "영어권에서 이 책은 학술서에 가까운 고급 교양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보다 넓은 범위 독자들을 위한 대중 교양서에 접근시킬 수 있었다. 공자와 유가 사상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지식과 이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의 나라'에서 고급 독자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소 그림'이 우리에게 쉽고 술술 읽힌다면, 그것은 번역자의 큰 노고 덕분으로 여겨도 좋겠다.
저자가 보기에 공자와 관련된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로서는 <논어>와 함께 춘추 시대 역사서에 주석을 가한 <춘추좌씨전>이다. 덧붙여 전국 시대의 <맹자>와 <장자> 그리고 <순자> 그리고 한당 시대의 다양한 전적들을 적절하게 인용한다. (이 '신빙성 있는 자료들에 기초한 공자 평전'이라는 뜻이 원제목 '오센틱 콘푸시우스(Authentic Confucius)'라는 말 속에 들어있으니, 이 책의 사활은 고증 자료의 적절한 활용과 편집의 적실성에 있음을 엿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는 공자에 대한 다양한 문헌학적 지식과 정보를 들어야겠다. 흥미로운 점은 공자의 삶을 이해하는 1차 자료로서 그동안 의심 없이 활용해온 사마천의 <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안핑 친에게 "사마천은 과거를 복원하는데 상상력을 많이 활용했다.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재현함에 있어서 그는 역사의 무게에도 기록의 빈틈에도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사마천이 가진 전통적 권위와 더불어 주관적이고 문학적이며 고증성에 문제가 많은 서술 방식이 저자의 공자 접근 시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 하기는 <사기> 연구의 전문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역시 "사기의 묘사 중에는 극중의 일막(一幕)에 해당하는 장면을 취해서 그대로 역사적 사실처럼 다룬 곳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문헌과 정보 자료를 활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가령 안핑 친 역시 전통적으로 후대의 위작으로 보아온 <공자세가>와 같은 자료를 자주 활용하며 공자 인생의 결정적인 빈틈을 메우는 점들이 그렇다. 물론 이점은 모든 평전 저술의 운명적 요소다. 사료 선택 자체가 이미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의 시각(주관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곳은 오히려 공자의 적통으로서 순자를 맹자보다 앞세우는 데서 드러난다. <맹자>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 계통에서다. 반면 <순자>를 중시하는 것은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 동부 지역의 유교 연구의 전통이다.
안핑 친은 미국 보스턴 강 유역 동부 대학들의 연구 환경이 몸에 익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순자>를 중시하고 <맹자>를 내치는 태도는 실용주의(프래그매티즘)적 관점에서 유교를 대하는 미국 동부 대학들의 학문적 시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 삶의 실천 축으로서 유교를 대할 때는 <맹자>가 중시되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맹자가 중시된 데는 인간의 성선을 믿고, 요순의 평화 시대를 신뢰하며 이를 재현하려는 실천적 맥락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핑 친의 <공자 평전>은 '현대-미국 동부 대학'의 시공간에서 제출된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저술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은 공자를 묘사하는 데서도 언뜻언뜻 느껴진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가슴에 닿는 부분은 학자 또는 교사로서 공자를 묘사한 대목들이었다. 공자는 대화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논어>라는 제목 자체가 '공자가 주제를 논하고(論),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語)'는 뜻이니까, 대화록이라는 의미가 돌출되어있다.) 다만 저자에 의하면 "그 대화는 서양식의 철학적 주제가 아니었다. 공자의 대화를 통한 가르침은 평범하고 일상적 삶의 지혜에 관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공자 가르침의 특징을 훈고학적으로 접근한다. 몹시 계발적이게도, 그는 '가르침'을 뜻하는 한자어 교(敎)와 훈(訓) 그리고 회(誨) 셋을 비교한다. 이 가운데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교습을 의미하는 '교'나, 교수자의 대중 강연의 뜻을 함축한 '훈'이 아닌, 유독 '회'자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지적한 <논어>의 용례와 그 까닭을 추적한다. <설문해자>라는 고대 사전을 통해 '회'가 "빛을 비춰줌으로써 가르친다는 뜻"임을 확인한 저자는 공자 사상의 핵심을 이렇게 연결 짓는다.
"공자는 주어진 스승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은 내용을 가르침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런 식의 교육이 하찮은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어떤 사람이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지는 스스로 판단하는 편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자기 역할에 대한 그의 중요한 생각이었다. 가르침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빛을 통해 각자가 더 잘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그 빛을 제대로 이용하는지 여부는 각자에게 달린 일이었다." (198~199쪽)
여기 공자가 말했다는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은 원문으로는 '거일우(擧一隅)'라, 곧 "한 모퉁이를 들어주다"로 주로 번역되는 부분이다. 이 구절이 든 문장은 공자의 교수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참고로 전모를 살피면, 공자가 학생을 가르칠 때 "책상의 한 모퉁이를 들어주었는데, 그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아채지 못하면 다시는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를 ,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논어>, 7:8) 대개 공자의 교수법이 가진 엄격한 면모를 드러내는 예화로써 드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거일우'를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틀린 것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외부의 빛-내부의 깨우침'이라는 구도 속에 깔린 연면한 서양의 학문적 전통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핑 친의 공자는, 내게는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 대학의 대학원에 소속된 서양 고전 명예교수를 연상케 한다.
역설적으로 안핑 친의 서양적 사고 방법과 서술 방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이 책의 구성은 공자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질문들로 이뤄져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소크라테스식의 변증적 질문 과정이 관철되면서 <공자 평전>은 이전의 평전 유들과 구별된다. 저자는 자신의 시각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공자를 발견하기 위해 그가 통과했던 다양한 질문들을 게시함으로써 그의 공자상을 독자들과 공유, 또는 소통하고자 한다. 공자의 롤 모델이었던 주공(周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면 이렇다.
"그런데 주공 자신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 시점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과 천하를 위한 걱정 사이에 어떤 저울질이 있었을까? 그의 모든 행동이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을까? 그가 아들을 제후로 내보내기 직전에 베푼 훈계 내용에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64쪽)
이 책 전편을 통해 서술의 결정적인 전환의 고비마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자문과 자답의 행렬, 그리고 핵심적 질문 뒤에 합당하게 준비된 '신빙성 있는' 예화들은 이 책에서 묘사된 공자상의 신뢰성을 높여주고 또 독자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힘이다. 요컨대 이 책의 힘은, 적절한 질문들로 이뤄진 서술 방식과 그 답변으로서 제시되는 다양한 고증 자료들에서 나온다.
달리 보자면 공자가 자기 학교에서 관철했던, 아니 인생 내내 주변에서 시도했던 대화의 삶을 저자는 저술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공자의 삶의 현재적 실천이기도 하다. (공자는 스스로를 두고 '호학(好學)'이라,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배움을 좋아함'이란 기필코 낯익은 삶과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개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끝으로 공자를 오늘날로 모셔온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또 무슨 말을 할까? 저자는 제목 '평전'에 값하려는 듯, 최근 중국 땅에서 빈번하게 개최되는 '공자 학술 대회'에 참석한 공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중국 정부가 돈을 대고, 고위 관료들이 개막 연설을 하고, 군인과 공무원들이 청중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속물학자(예학자)들의 내용 없는 발표문들이 이어지는 관제 학술 대회 말이다.
"공자가 만약 이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 정치적 성격을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관료들이 연설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았을 것이다. 제복 입은 군인들과 술잔은 나눴겠지만 '예학자'들은 철저히 피해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수 옆에 앉아 편안한 기분으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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