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이해가 단지 머릿속 추상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생태주의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만남에서 자라나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그런데 평자를 비롯해 우리 대부분은 도시인이다. 지구 위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생명으로서 자연과 만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리고 생태주의가 환기하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이겠지만, 도시인에게는 이러한 만남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도시인의 생태주의는 말만의 생태주의이기 십상이다. 뭔가 도시 바깥에서 비롯되는 충격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최근 나온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메이데이 펴냄, <들꽃 이야기>)는 바로 이런 자괴감에 신선한 틈새를 열어준다. 이 책은 다름 아닌 도시 안에서 도시 바깥의 자연과 조우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도시 '안'의 그 '바깥'. 강우근이 발견한 그 오묘한 만남의 상대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비집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미는 잡초들, 들풀들이다.
도시 '안'에서 만나는 그 '바깥', 들풀들
▲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강우근 지음,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
하지만 별 생각 없이 책장을 쉬 넘길 수 있는 달착지근한 수필 유는 결코 아니다. 우선 이 책이 소개하는 식물들의 이름부터가 너무 생소하다. 진달래나 개나리처럼 아주 익숙한 이름도 있고 쇠비름이나 괭이밥처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도 있지만, 털별꽃아재비, 방가지똥, 선개불알풀 같이 대다수는 낯설기만 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인데 사실은 이것들이 다 주택가나 도로변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그 잡초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꽃 이야기>의 독자들은 "그 풀들에도 저마다 다 이름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어느 정도 공부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뒤늦게나마 그 풀들의 사연과 장기(長技)를 확인하며 그간의 무심함을 보상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저자는 들꽃 이야기를 들꽃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들꽃을 바라보며 자연 전체를 바라보고 또 인간 세상을 바라본다. 장황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문장으로 식물들의 생태에서 인간 세계로, 다시 사람들로부터 들풀들로 자유롭게 시선을 움직인다.
그 시선이 멈추는 사람살이의 구석구석은 주로 춥고 그늘진 곳들이다. 그곳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현장이고, 이주 노동자의 도피처다. 이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잃어 버린 들풀들만큼이나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때로는, 들꽃 이야기에서 갑자기 사람 이야기로 건너뛰어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대목들이 그렇게 눈에 도드라지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자주 저자의 속 깊은 들꽃 철학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귀화 식물들에 대한 접근이 그렇다. <들꽃 이야기>의 독자가 새롭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친근한 들풀들 중 상당수가 귀화 식물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도 아니고 불과 몇 십 년 전에 한반도에 상륙한 식물들.
지은이는, 목청 높은 외래종 박멸론자들과는 달리, 이들 귀화 식물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한반도 생태계에 기여해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우며 너른 품을 가졌음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곁의 이주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적 유추가 아니다. 생태계에 대한 안목이 인간사의 안목으로 이어지는 잡초 철학이자 생활인의 철학이다. 그 안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설픈 자유주의 철학과는 반대로, 얼핏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는 '자립'과 '연대'가 서로 어우러진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들꽃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 들꽃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생존 방식을 터득해 냈다. 또 한편으로 들꽃은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한 가지 식물만 자라는 곳은 사람이 가꾸는 밭뿐이다. 밭작물은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들꽃이 자라는 곳에는 여러 풀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 '스스로 서기'와 '함께 연대하기'. 들꽃들이 터득한 지혜가 우리 삶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210쪽)
생장하고 치유함으로써 승리하는 들꽃들
하지만 이렇게 결론만 떼어내서 이야기 하면 들꽃 철학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들꽃 이야기>를 손에 펴들고 집 근처 동네를 돌며 들꽃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깨워낼 때에만 비로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이 맛에 취해보길 바란다.
다만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은 것은 평자가 마침 이 책을 마주한 것과 비슷한 때에 본 영화 한 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회고전에서 본 데츠카 오사무(<우주 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를 만든 그 사람)의 만년작 <숲의 전설>이다. 이 영화에서 숲은 불도저를 앞세운 인간의 광기로 말살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본의 증식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증식력이 승리를 거둔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난 덩굴 식물들이 기계를 덮치고 인간을 덮친다. 그래서 전체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의 생명 활동을 정지시킨다.
이것은 어떤 '보복'이 아니다. 자연 특유의 '치유'의 힘이 곧 승리하는 힘이 된 것이다. <들꽃 이야기>는 이 진실을 들꽃의 눈높이에서 좀 더 담담하게 밝힌다.
"망가진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데,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처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잡초들이다. 버려진 밭이나 폐허가 된 곳엔 망초 따위 한해살이 잡초 밭이 되었다가 여러해살이 쑥 따위가 들어와 망초를 밀어내고 자라나서 쑥대밭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면 작은 키 나무들이 들어와 자라고 이어 큰 키 나무가 자리 잡으면서 숲으로 되어간다." (293쪽)
이것이 들꽃이, 자연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 들꽃마냥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인간들의 투쟁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만 승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게 아닐까? 봄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 생장하고 치유하는 힘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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