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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필독 도서? 교수님은 몇 권이나 읽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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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필독 도서? 교수님은 몇 권이나 읽었나요?"

[親Book] 클리프턴 패디먼·존 메이저의 <평생 독서 계획>

1971년 1차 사법 파동의 주역이자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던 이범렬이 후배 판사들에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추천하면서 쓴 글을 우연히 본 일이 있다. 그는 젊은 법률가들이 점잖은 고전만 읽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통속소설을 많이 봐야 한다고 권유했다.

오래 전에 읽은 글이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법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는 것인데 일반 사람들의 속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다룬 통속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청할 만한 충고이기는 하지만, 그 전제가 되는 명제-'젊은 법률가들이 (혹은 좀 더 확대하면 젊은 사람들이) 고전을 읽으려고 한다'-가 사실인지는 조금 의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의 목록을 봐도 그렇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책 사는데 돈 아끼지 말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곤 했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책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은 차이가 난다. 다른 건 몰라도 책값은 줄 테니 사고 싶은 책은 사도록 해라'는 말씀이었다. 꼭 그 말씀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장서를 갖추지는 못 해도 이사 다닐 때 골치가 아플 만큼의 책은 가지고 있는데 막상 고전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읽은 책도 많지 않다.

어쩌다 고전 목록을 보면서 그 중 얼마나 읽었는지 세어보면, 차마 '세었다'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적은 숫자인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게 된다.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을 진득하게 잡고 있지 못 하는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이겠지만, 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한창 책을 읽을 시기인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길잡이가 될 만한 안내서를 못 만났다는 말을 하고 싶다.

▲ <평생 독서 계획>(클리프턴 패디먼·존 메이저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 ⓒ연암서가
얼마 전 클리프턴 패디먼과 존 메이저가 지은 <평생 독서 계획>(이종인 옮김, 연암서가)을 읽었다. 수메르에서 구전되던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아프리카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까지 133명의 작가와 그 작품들이 간단한 해설과 함께 실려 있다. 그 외에 고전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20세기 작가들의 작품 100권에 대한 좀 더 짧은 논평도 붙어 있다.

저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고전들을 반복해서 읽은 후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평을 적어놓았다. 책의 서문은 저자들의 안내를 받을 독자들을 "18세부터 81세까지의, (…) 여기에 열거된 작가들의 10퍼센트도 읽지 않은" 사람들로 상정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 부류에 속하는 나로서는 꼭 읽어야 하는 고전들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내용에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에 그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자료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고전에 대한 얘기를 풀어주는 책 전체의 분위기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볼테르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가 1만4000통의 편지와 2000건 이상의 책과 팸플릿을 남긴 대단한 작가였지만 <캉디드>라는 책을 쓰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되어 있다. <캉디드>가 너무나 훌륭한 책이기 때문에 볼테르의 나머지 저작들의 빛을 바래게 했다는 것인데, 이 소개를 보면서 우리는 볼테르의 다른 책은 몰라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농담조로 무자비하게 폭로하는 이야기'라는 <캉디드>는 반드시 읽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미에는 번역자가 친절하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고전들의 국역본을 소개해놓고 있기도 하다.

언젠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한동안 자연과학 서적에 흥미를 갖게 된 일이 있다. 비전공자를 위한 물리학 개설서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 그린의 <엘리건트 유니버스(The Elegant Universe)>, <우주의 구조(The Fabric of the Cosmos)>, 천체 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사이먼 싱의 <빅뱅(Big Bang : The Origin of the Universe)>, 그리고 진화론에 관한 도킨스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헤매다보니 누군가로부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안내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부터 읽어야 하는지, 혹은 개설서를 읽어야 하는지, 만일 <종의 기원>을 읽는다면 어떤 번역본으로 읽어야 할지, 혹은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어서 원서를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할지, 미리 겪은 사람이 길안내를 해준다면 훨씬 편하고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물리학과 대학원 홈페이지에 여름방학 동안 물리학 기초를 공부하고 싶은 법학 전공의 공무원(당시 공무원이었다)에게 개인 교사를 해 줄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기대를 갖고 한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후배를 통해서 물리학과 대학원에 알아봤는데, 법학 전공자가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냥 포기하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쓴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만약 친절한 전공자를 만났다면 무식한 법학도의 인식의 폭을 넓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든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대학별로 고등학생 혹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권하는 권장 도서를 선정해서 목록을 만들어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목록 중에는 작품의 해설과 선정 이유가 붙어 있는 등 상당히 충실한 것도 있지만 아직도 막상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이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에서 선정했다는 고등학생 필독 도서 목록을 보면 첫 다섯 권이 <수이전>, <계원필경>, <파한집>, <역옹패설>, <송강가사>다. 솔직히 서울대학교 교수 중에 이 다섯 권을 다 읽은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하물며 입시 준비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 교육을 몇 차례 칭찬한 것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야단법석을 떨기는 했지만, 막상 시험 성적이나 선행 학습을 제쳐놓고 과연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떤 책을 어떻게 권하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청소년이 아닌 일반인도 흥미가 있는 분야에 어떤 좋은 책들이 있는지 안내를 받을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독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권장 도서 목록이 나와야 한다. 그 전까지는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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