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4일
오후 1시에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 회견이 있었고, 거의 같은 시간에 군정청을 예방한 김구가 군정청 출입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임정의 공식 대변인인 엄항섭의 회견 내용은 임정이 귀국 전에 준비해 온 공식 입장을 정식으로 밝힌 것인데, 김구 주석의 기자 회견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그 시점에서 그의 소감을 얼마간 드러낸 것이다.
엄항섭은 임정 법통성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9월 13일 발표한 14개조 당면 정책에서도 나타났던 자세다. 그런데 김구의 회견 내용 중에는 그 자세와 맞지 않는 점들이 있다. 엄항섭과 김구의 회견을 보도한 기사를 비교해 본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嚴恒燮은 24일 오후 1시 기자단과 회견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여 임시정부의 환국 후 활동 방향을 표명하였다.
(문)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였는데
(답) 군정청과의 관계도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개인 자격이나 인민에 대한 태도는 좀 다를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임시정부라는 것은 3·1운동 때에 전 인민의 피로 생긴 것이다.
(문) 금후 조선에 완전한 독립 정권이 수립될 터인데 임시정부가 발전적 해체할 의견은 없는가?
(답)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안하는 것은 인민의 결정할 바이다. 그러나 해체를 강제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문) 임시정부는 중국과 프랑스가 승인을 하였다는데.
(답) 국제법상으로는 미비하나 사실상 국제 간의 교섭 대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사실상 승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은 언제인가?
(답) 우리는 3·1운동과 동시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대미전을 개시하자 동년 12월 12일에 우리는 과거의 선전포고를 재확인한 것이다.
(문) 중경에 있는 大韓獨立黨은 임시정부의 유일한 여당이라고 하는데
(답) 大韓獨立黨과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깊다. 金九 씨도 당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부가 전부 당원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문) 大韓獨立黨은 정당으로서 귀국할 예정인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 되나?
(답) 본국 내에도 정당이 많다는 말은 들었는데 외국에서 또 다시 정당을 가져 오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 延安에는 獨立同盟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이제까지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있는가?
(답) 대체로 좋은 상태에서 연락과 협조가 되어 있다. 국가를 독립하자는 동일한 목적에 노력하였으므로 의견이 상위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延安에서도 환국의 도정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하루라도 속히 故土에서 상봉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 국내에는 인민공화국이 정부같이 되어 있는데 이와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나?
(답) 그것은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가르쳐주기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국내에는 우선 미국 군정이 존재해 있고 북방에는 소련의 군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3000만 동포가 굳게 결속함이 급선무다. 나는 신문에 나타나는 정도의 지식밖에는 모를 정당이 많다는 것은 이미 들었으나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대면도 아직 다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것은 지난 9월 13일에 발표한 14개조의 당면 정책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원칙으로 하여 행동하게 될 것이다.
(문) 李承晩 박사가 귀국한 후 정계의 움직임은 여전히 복잡하여서 上海로부터 金九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의 귀국에 인민은 대단 기대하였는데?
(답) 어떻게 해야 할는지 얼떨떨할 뿐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여론을 존중하고 또 여론을 통하여 우리의 뜻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당도 모르고 사람도 모른다. 지금은 다만 환희에 포위되어 있을 뿐이다. 3000만 동포를 일시에 만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차차 방책이 서질 것이다.
(문) 光復軍은 언제 귀국하나?
(답) 시기가 상조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日軍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규합하여 조직과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총사령부도 중경에 있다. 총세는 약 1만이 된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金九, 同副主席 金奎植 이하 요인 4명과 隨員 등 15명은 23일에 귀국하였거니와 고국의 第1夜를 보낸 일행은 24일 역시 허다한 來客으로 바빴다.
入京 제2일인 24일 오전 중에는 정식으로 미주둔군 최고지휘관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을 각각 방문하는 등 多忙한 일정으로 오전과 오후를 보내었는데 특히 오후 1시반에는 군정청 출입기자단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試한 바 당분간 현하정세를 신중히 관망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문) 3000만 동포가 한 가지로 선생과 요인 일행의 귀국을 학수고대했으나 着京하시는 시간을 몰라 비행장에까지 출영도 못해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입경 第1夜를 보내시고 다망하신 제2일을 맞이하셨는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면
(답) 피차에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문) 그간 국내 정세는 자못 다단한 중에도 시급한 것은 정치의 통일전선을 획득하는 것인데 주석 선생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아나 그 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포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오늘은 시간관계로 말을 못하겠다. 李 박사 역시 그에 대한 방침이 계실 줄 알지만 나에게 李 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는 신빙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나는 제군이 아는 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모두 30년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만큼 현하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오늘은 다만 국사를 위해서 노력해 오는 신문기자 제군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이 시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문)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안다.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문)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은가?
(답) 하여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문제인 만큼 경솔히 말할 수는 없겠다. 전민족에게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
(문) 국내정세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시렵니까?
(답) 눈과 귀가 있으니까 이 두 가지 기관을 통하면 될 것이다.
(문) 정계의 요인은 언제 어떻게 만나 보시려는지요?
(답) 그렇게 급히 할 것은 없다.
(문) 맥아더장군과는 어떠한 연락이 있었나요?
(답) 현하 조선에 군정이 있는 이상 완전한 우리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다만 우리의 일행이 온 만큼 해외임시정부도 입국한 것이요, 이것을 외국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문) 인민공화국과 군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
(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해서는
(답) 그 역시 말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니까.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구의 회견 내용 중 두 군데에 밑줄을 쳤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닿기 전까지 김구가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생각과 다른 것이다.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사정에 어둡다"고 했다. 국내에 있지 않았으니 국내 사정 인식에 한계가 물론 있었겠지만, 국내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은 해왔다. 미군 OSS부대와 협조해 광복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키는 노력을 해방 당일까지 하고 있었다. 9월 13일 발표한 14개조 임정 당면 정책은 이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파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석 김구가 도착 이튿날 임정의 상황 파악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겸손이나 신중 차원의 이야기일 수 없다. 임정의 기능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이야기였다.
불량분자 배제를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임정, 특히 김구의 도덕적 권위는 '항일정신'에 있었다. 친일파 제재는 해방 당시 한국인의 가장 큰 합의점이었지만, 그 범위와 방법을 결정해 나가는 데 많은 현실적 문제를 앞두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임정과 김구의 도덕적 권위였고, 그것이 김구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친일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넓게 잡고 그 제재를 극단적으로 가혹하게 하는 것도, 반대로 너무 좁게 잡고 너무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었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합리적인 범위에서 적당한 기준을 임정과 김구가 정해주는 것이 국민적 합의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일은 우선 엄격한 태도를 보이다가 서서히 적정선까지 풀어주는 것이 상식이다. 권위의 존재를 일단 분명히 한 다음 권위의 실현 과정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도착하자마자 그 권위를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연말 이후의 극단적 반탁 운동을 김구의 정치적 자살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그의 정치적 자살이 귀국 직후부터 시작된 사실을 이 대목에서 읽는다. 친일파 처단은 좌익의 구호가 되는데, 임정과 김구가 친일파 문제에 '합리적 범위에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면 좌익이 그 구호를 써먹을 여지가 없었다. 김구는 친일파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줌으로써 임정의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좌우 대립의 극단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친일파 처단을 건국 후로 미룬다는 것은 이승만의 지론이었다. 그 지론에 따라 건국 후에 반민특위를 만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안다. 그런 결과가 나올 조건은 건국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형성되어 갈 상황에 김구는 귀국 이튿날 동의한 것이다.
김구가 도착한 날 저녁 이승만과 만났을 때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승만이 주로 떠들고 김구가 듣고 있었으리라는 사실과 함께 몇 가지 내용은 짐작이 간다. 좌익의 의도가 나쁘고 힘이 세니 이제 일본 대신 좌익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그러니 미군과 대결하면 안 되고, 자기가 미군과의 좋은 사이를 주선해줄 수 있다는 권유. 그리고 좌익과의 대결을 앞둔 상황에서 친일파 처단을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의견.
김구는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30여 년만의 귀국이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그 귀에 매우 크게 들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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