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3일
金九는 임시정부의 스폭크스맨인 嚴恒燮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스테트멘트를 발표하였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유명 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동맹국 용사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3000만 부모 형제자매와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美·蘇 등 동맹군에게 위로의 뜻을 보냅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과거 2·30년간을 중국의 원조 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왔습니다. 더욱이 금번의 귀국에는 중국의 蔣介石 장군 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미군 당국의 隆重한 성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및 나의 동료는 中·美 양군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 준 소련에 대하여도 同樣의 경의를 표합니다. 금번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상호단결 협조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전공을 세운 미국으로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아니하고 동맹국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同心戮力한 동맹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은 다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각각 일개의 시민 자격으로써 귀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노력한 결국에 이와 같이 여러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해 주시니 감격한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오직 완전히 통일된 독립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 물속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구에는 또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이 날을 기다리십시다. 그리고 완전히 독립자주할 통일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분투합시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비행기는 오후 4시경 김포비행장에 도착했고, 김구 이하 15인 일행은 5시 조금 지나 경교장에 도착했다. 서대문 바로 안쪽,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건물이다. 당시의 도로 사정에 비추어 참 빨리도 들어왔다. 환영 행사도 없었고 인파도 없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이런 기사도 나왔다.
김구 일행의 숙사로 되어있는 죽첨정 최창학 댁은 수일 전부터 말끔히 치워져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였다. 숙사 안팎에는 미리 들어와 있는 광복군의 일 소대 가량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지난 5일 일행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기에 가슴을 조이던 환영준비위원회에서도 23일 오후까지도 전연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 다섯 대의 자동차가 갑자기 최창학 댁 정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순간 이 주위는 조심스러운 가운데도 몹시 바쁘고 당황해졌다. 여섯 시 방송에 뜻하지 않게 하지 중장의 발표에 의한 김구의 귀국을 전하자 서울시민들은 저으기 놀래었고 또 반가웠다.
행인들은 일부러 죽첨정 동양극장 앞을 지나다가 발을 멈추고 숙사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문 앞에는 엠피와 광복군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날 밤은 일체 어떠한 사람도 면회를 시키지 않기로 하고 여로의 피곤한 몸을 쉬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5년 11월 2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교장'은 김구가 나중에 붙인 이름이고, 당시에는 이 저택이 죽첨정(竹添町)에 있다 해서 '죽첨장'이라 흔히 불렀다. '죽첨'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기념한 이름이다. 저택 소유자 최창학(1891~1959년)은 식민지 시대에 많은 금광을 보유, '금광왕'이라 불린 거부로, 돈으로 할 수 있는 친일 행위는 빠트리지 않고 한 사람이다. 경교장 제공뿐 아니라 당시의 우익에 많은 자금을 내놓은 덕분인지, 김구가 죽은 직후인 1949년 8월 반민특위의 불구속 조사를 받고 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정각 6시에 하지 중장의 짧은 성명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6시 조금 지나 이승만이 찾아왔고, 뒤이어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도 기자들과 몇 마디 문답이 있었지만 말을 몹시 아꼈고, 8시에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미군 헌병들과 함께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광복군'은 과연 김구의 명령을 받는 광복군이었을까? "여로의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이 날 중 어떠한 사람의 면회도 (이승만 빼고) 시키지 않기로 한 것은 누구의 결정이었을까? 임정 측 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자들은 몇몇 요인의 소감을 받아 적었지만 모두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무리 '개인 자격'이라지만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시민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상황에 긴장해 있었을 것이다.
◊ 李始榮 談
(略) 3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오직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감상이라든지 의견은 앞으로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터이므로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 金奎植 談
(略) 정치적인 이야기는 이미 주석과 嚴선전부장이 말하였다. 따라서 나로서는 새삼스럽게 할 말이 없고 또 아직은 말할 수도 없다. 고국에 돌아온 감상은 감개무량하지만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여러분들이 알고자 원하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감상이 아니고 좀 더 무게 있는 정치문제일 줄 안다. 나는 우리 민중을 믿는다는 것만 말한다.
◊ 柳東悅 談
정치에 대한 것은 나는 모른다. 또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통일을 가져야 한다는 뜻에서 정치문제는 모두 金奎植博士와 불일간 환국 할 趙素昻씨가 대표로 말하기로 되어 있다. 이번에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온 것은 서울에 이미 미군의 군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은 비록 적은 사람이 모였다고는 하나 무조직 상태로 있을 수 없으므로 만든 것이므로 장차 새로 생길 정부에 우리들은 문서라도 전할 뜻이다.
우리 광복군은 그다지 많은 수효는 못된다. 지금 중국 각지에서 편성하여 훈련하기에 바쁜데 총수는 수천 명 정도이다. 또 延安에 있는 우리 청년들까지도 연락하여 광복군에 편입하게 되었다. 지금 광복군의 辨事處는 상해에 있고 총사령부는 중경에 있다. 그리고 그 훈련에는 李靑天 장군이 당하고 있는 터이다.
끝으로 직접 정치 문제는 아니다. 나는 근본에 있어서는 정치라는 것은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민중이 나쁘면 큰일이고 또 지도자만 좋아도 안 될 것이다. 좋은 민중과 좋은 지도자가 일체가 되어 옳은 정책을 써야 정치는 비로소 성공한다. 이 점을 민중과 정치가는 함께 생각해야할 것이다.
◊ 金尙德 談
감상은 물어주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감상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직은 감상을 말할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이다. 나는 그저 몸을 바쳐 민중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힘쓰겠다는 것뿐이다.
(<서울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군정 당국자들이 설마 임정 요인들을 영구히 격리해서 관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를 꺾어놓으려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러나 하지의 짤막한 성명이 방송을 타자마자 서대문 방면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그들도 놀랐을 것이다.
임정의 실제 모습과 상황을 소상히 아는 사람은 당시 한국에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정의 존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갑자기 펼쳐진 해방의 상황 앞에 이 사회가 어떻게 움직여 갈지, 기쁜 마음의 한편에는 불안감도 있었고 막막함도 있었다. 100일이 지나도록 갈피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 불안감과 막막함을 벗어날 길을 임정이 찾아 주리라고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언제나 끝이 날지, 과연 끝이 나기나 할지, 내다볼 길 없이 살아온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해방과 독립을 바라보며 객고를 견뎌온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 말고 누구에게 독립의 길을 묻는단 말인가?
도착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김구의 방송 연설을 군정청이 허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론에 눌린 셈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단 2분. 주례 방송시간을 갖고 있던 이승만의 대우와 대비된다. 국민은 듣고 싶어 하고 본인은 말하고 싶어 하는데, 방송을 이렇게 운영하는 것이 미군정의 '언론 자유'였다.
200여 자에 불과한 연설이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閣員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6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맨 위에 옮겨놓은 성명서도 이 연설문도 같은 장준하가 기초한 것이다. 하루를 사이에 둔 두 글 사이의 차이에 음미할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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