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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땅부자 아들이 '천한' 직업을 선택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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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땅부자 아들이 '천한' 직업을 선택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77] 김교준

학부에서는 의학교를 졸업한 36명(1902년 제1회 19명, 1903년 제2회 13명, 1905년 제3회 4명) 모두를 교관(교수)으로 임명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름뿐인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졸업 후의 진로와 취업에 불안을 느끼는 학생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학교 출신으로 실제로 모교의 교관으로 활동한 사람은 제1회 졸업생인 김교준과 유병필 두 사람뿐이다. 이번 회에서는 그 가운데 김교준에 대해 알아보자.

김교준(金敎準, 1884~1965년)은 1884년 4월 6일 한성 중서(中暑) 박동(礴洞)의 자택(오늘날의 조계사 자리)에서 공조판서와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김창희(金昌熙, 1844~1890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정집(金鼎集, 1808~1859년)도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경주 김 씨인 김교준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이었다. 그 집안은 재산도 많아 박동 대저택 이외에 말죽거리에 수십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회영 일가(제23회)과 마찬가지로 김교준 일가도 일제시대에 가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김교준의 회고에 의하면, "양의가 되려는 의도부터 천하게 여긴 시대였으므로 의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그러한 시대에 더욱이 명문 집안의 김교준이 신식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교에 입학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의학교에서 최연소 학생으로 3년을 공부한 김교준은 1902년 7월 5일 우등(5등)으로 졸업했다.

▲ 김교준의 졸업증서 제5호(<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의학교 교사 고다케(小竹武次郞), 교관 김익남, 교장 지석영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의학교 졸업증서 원본은 발견된 것이 없고, 사본도 지금까지는 이것이 유일하다. ⓒ프레시안

졸업 시험을 거쳐 의학교 제1회 졸업자 19명이 확정된 것은 1902년 7월 5일이었지만, 이들은 뒤늦게 완공된 부속병원에서 8월부터 다섯 달 가량 임상 실습 과정을 거친 뒤 1903년 1월 9일 오후 1시 각 부부대관(府部大官)들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예식을 가졌다. 그리고 김교준은 한달 남짓 뒤인 2월 21일 만 열여덟 살에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1904년 9월 23일까지 1년 7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러니까 김교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교를 졸업하여 역시 최초로 근대식 의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모교의 교수가 된 것이었다. 김교준 개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일이거니와 한국 근대 의학사에서도 길이 기억하고 기념할 일이다.

김교준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판임관(判任官)으로 월급이 20원이었고 스승 김익남은 그보다 상급직인 주임관(奏任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의학교 제4회 학생들에게 약물학과 생리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의학교 제4회 졸업생(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된 뒤인 1907년 7월에 졸업하여 엄밀하게는 대한의원 제1회 졸업생이다)인 권태동(權泰東, 1882년생으로 김교준보다 2년 위이다)도 자신들이 "조교수" 김교준에게서 생리학과 약물학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김교준이 재직할 당시에는 조교수라는 직급이 없었으므로 권태동이 잘못 기억한 것으로 여겨진다.)

1904년 9월 23일, 김교준은 의학교 교관 직을 그만두고 군대에 입대하여 육군 2등 군의(중위)로 임명받았다. 이 무렵 국운이 다해가던 대한제국 정부와 황제는 국가와 황실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김익남을 3등 군의장(소령)으로 임명하고 의학교 출신 다수를 군의로 발령한 것도 그러한 방침의 일환이었다.

▲ 군의관 시절의 김교준. 스승 김익남과 대조적으로 기골이 장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김교준이 입대한 것은 정부 시책에 따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학창 시절부터 존경하던 김익남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한 뜻도 있었을 것이다. 김익남은 김교준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중 한명이다. 3등 군의장까지 승진한 김교준은 1910년 경술국치로 퇴역할 때까지 대체로 군무국 의무과(醫務課)와 친위부(親衛府)에서 김익남과 함께 일했다. (1907년의 한국군 해산 때 군의들도 대부분 전역했지만, 김교준 등 몇 명은 그 뒤에도 군대에 남았으며, 김익남은 1919년 무렵에야 제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제지간으로 시작했지만, 동료와 벗으로 평생지기가 되었다.

김익남 외에 김교준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맏형 김교헌(金敎獻, 1868~1923년)이었다.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김교준에게 열여섯 살 위인 김교헌은 형이자 아버지였을 것이다. 김교준의 호가 내원(萊園)인 것도 김교헌의 호 무원(茂園)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김교헌의 외할아버지는 외관직인 판관(判官)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이고, 김교준의 외할아버지는 규장각의 직각(直閣)을 지낸 이명기(李命棋)이다. 다시 말해 두 형제는 어머니가 달랐지만, 동복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두터웠던 것 같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김교헌은 예조참의, 규장각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또한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04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06년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 김교헌은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되고 있던 일본인들의 경제 침략을 징치(懲治)하다 한때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 뒤로도 김교헌은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관여하는 한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현채(玄采),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도 벌였다.

이전부터 <신단민사> 저술 등 민족사 연구에 뜻을 두었던 김교헌은 1909년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때부터 교인이 되었다. 그는 대종교 역사를 정립하는 한편 종단 간부로 활동하다 1916년에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제2대 교주(都司敎)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7년에는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대종교의 총본사도 길림성 화룡현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과 더불어 독립운동 역량의 강화를 꾀했다. 특히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 선언 시기가 양력으로 1919년 2월이지만 음력으로는 무오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을 주도하여 대중적 항일 독립운동을 촉발했다.

▲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 대종교 교주 김교헌은 이 선언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39명 가운데 가나다 순으로도 맨 먼저이지만 대종교가 주축을 이룬 이 선언에서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특히 만주 지역에 망명하여 활동한 사람들에게 대종교는 거의 절대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프레시안

또한 김교헌은 1919년 4월 대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대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서일(徐一, 1881~1921년)에게 총재를 맡게 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김좌진(金佐鎭, 1889~1930년) 등과 더불어 1920년 9월 청산리 대첩(大捷)을 이끌어내었다. 김교헌은 그 뒤 더욱 거세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구국투쟁을 계속하다 병사했다.

김교준도 1910년 경술국치 뒤에는 형을 따라 주로 대종교 활동을 벌였다. 1911년 지교(知敎)로 임명되어 배천지사(白川支司)에서 3년간 시무했고, 1914년에는 상교(尙敎)가 되었다. 그리고 1917년 총본사가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三道溝)로 이전할 때 김교준도 맏형 김교헌(茂園宗師)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형을 도와 포교와 독립운동에 힘쓰는 한편, 용정(龍井)에서 현지의 동포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도 벌였다. 그러나 만주에 있는 동안 김교준이 벌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김교준은 용정에서 5년 동안 개업했다고 술회했다(<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처음에는 환자가 너무 찾아오지 않아 한방의학을 공부해서 한의로 전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용정에서 개업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김익남이 그곳으로 찾아와 김교준의 면허장으로 둘이 함께 개업했다고도 했다. 지난 번(제74회)에 언급했듯이 김익남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끝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해 1919년 무렵 군대를 그만 둔 뒤에는 조선에서 의료 활동을 할 수 없어 제자이자 20년 지기인 김교준을 찾아 용정으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김교준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정확한 시기와 연유는 알 수 없다. "용정에서의 개업을 편모 슬하의 사정으로 인하여 정리하고 귀국했다"라는 김교준의 술회 등으로 보아, 맏형 김교헌이 사망한 1923년 11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돌아온 김교준은 "내과 전문 만제의원(萬濟醫院)"을 개업했다. 그리고 대종교에서는 1938년 종단의 고위 지도자를 뜻하는 대형호(大兄號) 칭호를 받았다. 몸은 조선에 돌아왔지만, 만주에 있는 대종교 본부와 계속 교류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된 뒤인 1946년 1월 김교준은 서울에서 대종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재건하여 전리(典理)가 되었으며, 총본사가 만주로부터 환국하자 도사교 위리(都司敎委理, 교주 권한대행)가 되었다. 그 뒤 원로원장을 거쳐 1958년 사교(司敎)로 승진함과 동시에 도형호(道兄號)를 받았으며, 1962년 4월에는 마침내 제5대 총전교(總典敎, 교주)로 대종교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대종교 교주가 된 말년에도, 찾아오는 환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진료 활동을 계속했다.

▲ 대종교 총본사 환국 기념 사진(1946년 6월 16일 촬영)으로 <대종교 교보> 기념호(독립기념관 소장)에 수록되어 있다. 앞줄 파란색 원 안이 김교준이다. 앞줄 가운데가 3대 교주인 단애종사(檀崖宗師) 윤세복(尹世復, 1881~1960년)이며, 그 왼쪽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8~1953년, 이회영의 동생)이다. 셋째 줄 파란색 원 안은 한국 의사학계의 태두 김두종(金斗鍾, 1896~1988년)이다. 대종교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해방 초기까지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시안

▲ <대종교 교보> (환국)기념호(1946년 8월 발행)에 게재된 전리(典理) 김준(김교준이 종단 활동시 사용한 이름)의 글 "신족(神族)." 대종교에서는 한민족을 단군의 혈통을 이은 신족이라고 한다. ⓒ프레시안

100여년 전 당시로는 집안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근대식 의사가 된 김교준은 의사와 의학 교육자로서의 꿈을 충분히 펼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의 부족함이라기보다는 세상 정세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시대 초기에 크게 번성했던 대종교도 일제의 잔악한 탄압과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 점차 쇠퇴했다. <대한의학협회지>의 대담자는 인터뷰 당시(1962년) 대종교 교주인 김교준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현재에도 대종교라는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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