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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약사, 의사 자격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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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약사, 의사 자격증까지?

[근대 의료의 풍경·76] 유세환·최규익·장도

유세환(劉世煥, 1876~?)은, 이력서에 따르면, 1893년 2월 17일 관립 일어학교에 입학했고, 1897년 6월 24일 유학을 위해 일본에 갔다. 여기에서 관립 일어학교란 1895년 6월 11일 <외국어학교 관제> 공포 이전인 1891년 6월에 설립된 "관립 일어학당"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익남도 도일 전에 이곳에서 일본어를 공부했을 것이다.

유세환은 일본에 도착한 지 두 달도 채 안 되는 1897년 8월 20일에 보통과(게이오 의숙?)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어 실력이 대단했다고 여겨진다. (이때는 여름방학 철이었으므로 유세환은 사실상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은 채 중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 <도쿄 제학교 규칙집(東京諸學校規則集)>(1890년). 이 <규칙집>에는 도쿄 약학교의 수학 기간이 2년으로 되어 있는데, 유세환이 재학할 시절에는 기간이 조금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그리고 유세환은 9월 10일 도쿄 약학교에 입학하여 2년 7개월 뒤인 1900년 4월 25일 졸업했다. 그가 도쿄 약학교에서 공부한 과목은 수학, 영어, 독일학(獨逸學), 식물학, 물리학, 무기화학, 유기화학, 제약화학, 조제학 및 실지조제, 정성분석, 생약학, 정량분석, 약품감정, 약국법사용법, 실지제련, 생약학실지연습 등이었다.

바로 이어서 1900년 5월 5일 도쿄 제국대학 의과대학 선과(選科)에 입학하여 1902년 11월 25일에 졸업한 유세환은 그 해 12월 20일 귀국했다. 5년 반 동안 한 치의 공백도 없는 유학 생활이었다. 유세환이 도쿄 제국대학에서 공부한 내용은 이력서에 적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약학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유세환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전문학교 및 대학 과정에서 정식으로 약학을 공부한 신식 약사였다.

유세환은 이름이 몇 차례의 관비 유학생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사비로 일본에 유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에서 돌아온 유세환은 1903년 3월 광제원 위원을 시작으로 1904년 7월 철도원 주사를 거쳐 10월 10일에 의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1905년 12월 육군 2등 약제관, 1906년 7월 1등 약제관으로 임명받았는데, 의학교 교관과 겸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세환은 의학교가 대한의원으로 흡수 통합된 뒤에도 교관과 교수(1908년부터 교관이라는 명칭 대신 사용) 및 의원(醫員)으로 활동했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8월 10일자. 유세환에게 8월 4일자로 의술개업인허장(제99호)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두의양성소 출신의 피병준의 인허장 번호는 제98호였다. ⓒ프레시안
유세환은 한국인 최초의 정규 약사이지만,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윤식은 "양약국 의사" 유세환에게서 계속 치료를 받았으며(<속음청사(續陰晴史)>, 1908년 일본인 의사들이 계림의학회(鷄林醫學會)를 조직할 때에 유세환을 회원으로 촉탁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도 1911년 8월 4일 유세환에게 의술개업인허장(제99호)을 수여했다. 의사와 약사의 경계가 오늘날처럼 엄격하지 않았던 것일까?

한편, 최규익(崔奎翼, 1878~?)은 1895년 도일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1896년 7월 25일 게이오 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9월 10일 도쿄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최규익은 3년 만인 1899년 7월 8일 화학공예부 염직과를 졸업했다. 이어서 1년 동안 제융소(製絨所)와 마사방직회사(麻絲紡織會社)에서 현장 견습을 마치고 1900년 7월 17일 귀국했다.

최규익은 1902년 8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의학교에서 제약원(製藥員)으로 일한 뒤(제약원은 <의학교 관제>에는 없었던 직책으로, 1902년 8월 의학교 부속병원이 개원하면서 새로 생긴 자리로 여겨진다) 1906년 1월 15일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했다. 학력으로 보아 최규익은 의학교에서 동물, 식물,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과목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규익은 유세환과 마찬가지로 대한의원에서도 경술국치 때까지 교관과 교수 및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유세환과는 달리 의술개업인허장은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독립기념관 소장 <조선에 유명한 교육가 제씨>에 수록된 청년학관 교사 시절(1913~1917년)의 최규익. ⓒ프레시안
일제강점기에 최규익은 어떤 일을 했을까? 최규익은 1913년 9월부터 1917년 1월까지 신문계(新文界)에 청년학관(靑年學館) 교사 또는 강사의 명의로 "전뢰(電雷)의 원인 및 방어법", "국어(일본어) 신화(新話)", "형화(螢火, 반딧불)의 신화(新話)", "신년에 필지(必知)할 염색법" 등 6편의 글을 남겼다. 즉 최규익은 일제 초기, 청년학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교육가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경찰부 치안개요"(1917년 3월 5일)에 의하면,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교원양성소 내의 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稧)가 주식(1주당 20원) 모집을 통해 전국의 중등학교 교사를 주주로 포섭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다 발각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된 조직 사건이 1917년 초에 발생했다. 이 장려계의 계장(稧長)은 중앙학교 교사 최규익, 총무는 윤창식(尹昶植), 회계는 최남선(崔南善)이며, 김성수(金性洙), 백남규(白南奎), 안재홍(安在鴻), 유근(柳瑾), 신석우(申錫雨), 남형유(南亨裕), 김두봉(金枓奉), 박중화(朴重華) 등 당대의 대표적인 교육계 인사 130명이 계원으로 참여했다.

▲ <신문계> 제46호(1917년 1월)에 실린 청년학관 교사 최규익의 글 "신년에 필지할 염색법." 제1차 세계 대전이 확대되어 외국상품 수입이 끊기고 물가가 앙등하는 터에 집에서 쉽게 옷감 등을 염색하는 방법을 설명한 글이다. ⓒ프레시안
산직장려계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서북지방 지식 청년들이 타격을 받은 뒤,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지식인들이 결성한 계몽주의 우파 성향의 조직으로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익은 그런 반일 조직의 대표를 맡았던 것이며, 이 기록을 통해 그가 청년학관 외에 중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음도 알 수 있다.

최규익이 이 사건으로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최규익은 얼마 뒤인 1920년에는 (주)동양염직의 상무이사 겸 대주주, 1923년에는 철물류 매매 및 위탁판매 업체인 동지사(東志司) 사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변신했다.

김익남, 최규익과 함께 일본 유학을 한 장도(張燾, 1876~1936년)는 법학자와 변호사로 크게 이름을 날렸지만(제70회), 1901년 11월 30일부터 1904년 10월 14일까지 3년 동안은 의학교 교관을 지냈다.

▲ <매일신보> 1936년 9월 5일자 기사 "법조계의 장로 장도 씨 장서(長逝)"에 실린 장도의 사진. ⓒ프레시안
<황성신문> 1901년 12월 4일자 기사 "의학교 교관 리주환이 서임 다일(多日)에 전불사진(全不仕進)하야 통변(通辯)이 무인(無人)하야 경사학도(竟使學徒)로 궐과지경(闕課之境)에 지(至)하얏다고 의학교장이 학부에 보(報)한 고로 기대(其代)에 장도 씨로 서임하얏더라"에 의하면 장도는 일본인 교사의 강의를 통역하기 위해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사를 보면 당시 교관으로 근무했던 김익남은 통역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의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학생 교육에 공이 있다 하여 의례적인 포상을 세 차례 받은 것 외에 장도의 뚜렷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법학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로 법률가로 활동할 준비를 하며 지냈을지 모른다.

심영섭(沈瑛燮), 이병선(李炳善), 박승원(朴承源)도 근무 기간이 짧아서인지 의학교 교관으로서 별다른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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