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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은 '독립운동'의 종착점 아닌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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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은 '독립운동'의 종착점 아닌 출발점

[해방일기] 1945년 11월 17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②

김기협 : 임시정부 요인들이 10여 일 전 중경에서 상해로 나와 비행기만 타면 몇 시간 안에 귀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임정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단결을 주장해 온 선생님의 뜻이 이뤄질 날이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선생님이 임정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존중해 마지않는 여운형 선생은 26년 전 임정 수립에 참여까지 한 분인데도 임정을 선생님처럼 중시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안재홍 : 요 전날 얘기한 것처럼 여 선생은 좌익 입장, 나는 우익 입장에서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이 같아도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여 선생도 임정의 역할을 일체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임정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지적 비판'과 '비판적 지지'의 차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3개월 전에 맞은 '해방'은 해방일 뿐이지, '독립'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 독립운동의 출발점입니다. 일본의 방해가 없어져 독립운동이 제대로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부터의 독립운동을 어떤 기준으로 펼쳐나갈지 막연한 점이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전통 중에서 가장 뚜렷한 흐름을 골라 지금부터의 모색을 위한 표준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길입니다.

임정의 가장 큰 가치는 26년간 '독립'의 깃발을 한결같이 지켜온 데 있습니다. 그 사이에 내부적으로는 대립과 혼란, 침체의 고비들도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 깃발을 접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깃발을 지키며 살아 있어준 것, 그것이 해외의 어느 다른 독립운동도 이루지 못한 임정의 큰 공로입니다.

국내에서도 독립을 위한 여러 형태의 노력과 투쟁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때문에 뚜렷한 형체를 키워올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독립운동을 위한 재료는 해외보다 국내에서 더 풍성하게 발굴되겠지만, 힘 있는 틀로 삼을 것이 없습니다.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요긴한 가치를 임정의 틀이 가졌다는 사실에는 여 선생도 동의할 것입니다.

지금의 임정 구성도 아주 훌륭합니다. 김구 주석의 반공 성향에 좌익에서 의구심을 품는다고 합니다만, 그분 자신의 판단보다 임정이 중국 국민당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상황에 말미암은 것으로 봅니다. 그곳의 국·공 대립기에는 임정이 좌익을 배척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국·공 합작기에는 임정에서도 좌우 합작이 이뤄져 좌익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들도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요.

김기협 : 선생님이 9월 초 건준을 떠날 때는 건준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이 진행되고 있었죠. 선생님은 임정을 이제부터 독립운동의 틀로 삼기 바라는데, 인공이란 틀을 따로 준비한다는 것이 혼란을 불러오는 길로 여겼을 것을 이해합니다. 어쩌다가 건준이 그런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까? 최고 지도자가 여 선생과 선생님이었는데, 여 선생은 선생님보다 임정에 대한 기대가 크게 적었던 것이 아닌가요?

안재홍 : 임정에 대해 여 선생과 나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그렇게 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건준의 실권을 장악한 좌익 인사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고, 끝까지 막으려던 인공 부서 조직까지 해치우는 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직무 집행 거부까지 했죠. 인공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놓고 실제 사업은 건준을 통해 진행하다가 임정이 환국하면 인공을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선까지 여 선생은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 조직을 만들고 현실성도 타당성도 없는 명단으로 보직을 채운 것은 정말 너무했어요. 인공 수립을 주도한 좌익은 인공을 진심으로 받든 것도 아니고 하나의 투쟁 도구로 여긴 것이며, 그 진의는 건준의 좌우 통합 목적을 좌절시킴으로써 정국을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가는 데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9월 10일 내 입장을 밝힌 성명서의 한 대목을 되풀이하겠습니다.

"建準은 정강을 가진 정당도 아니요 그 운영자 자신들 때문에의 조각 본부도 아니요 따라서 다년간 해외에서 해방운동에 진췌하여 오던 혁명 전사들의 지도적 집결체인 해외 정권과 대립되는 存在도 아닌 것이다. 또 그 일시 당면한 임무로써 국내 질서의 자주적 유지와 대중생활의 확보와 및 신국가 건설의 기술적인 주비로서 각 방면의 전문적인 대책과 연구와 자료 자재의 보관 관리에 관한 공작 등등이다. 즉 사상 기술 방면에 걸치어 엄숙과감한 실천을 요하는 것이다. 余는 이 굳은 일념에서 총총 20일간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余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결과로 됨에서 余는 단연히 引責 免退 부위원장의 자리를 떠났다."

이 뜻이 꺾인 것은 표면상 좌익 인사들의 극단적 행동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익 인사들의 비협조에 있었습니다. 건준의 실패에는 여 선생보다 내 책임이 더 컸죠. 우익 인사들이 어느 정도 호응만 해줬어도 건준이 그리 쉽게 좌익의 극단 노선에 휩쓸리지는 않았을 텐데.

김기협 : 선생님은 당시 우익에서 가장 큰 존경과 신뢰를 모으는 인물의 하나였죠. 당시 선생님 주장이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호응을 모으기가 힘들었나요?

안재홍 : 존경까지는 몰라도 신뢰라면 과분할 정도로 많이 받았죠. 석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히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건준의 좌익 편향을 막기 위해 우익 문호를 넓히도록 부위원장 권한을 남용하다시피 하고 여 선생도 그것을 용인해 줬는데.

한민당은 건준과 인공 공격을 최대의 사업으로 벌여 왔습니다. 화해와 타협을 주장하는 우리 국민당과 우익 안에서 경쟁하는 입장이죠.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많은 선배, 동지들이 한민당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럴싸한 명분에 일시 현혹될 수는 있어도, 실제 행동을 보면 명확한 판단을 하게 되죠. 한민당이 결성되기도 전인 9월 8일의 발기인 성명서. 건준과 인공을 혹독하게 비난한 이 문서를 보고는 한민당의 본색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야만스럽고 저열한 표현을 보고 이 정당이 과연 정치의 발전을 바라는 정당인지 정치의 파괴를 꾀하는 정당인지 판단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성명서를 보고 발기인에서 빠져나간 분들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꾹 참고 눌러앉아 한민당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리라 이해합니다. 한민당의 주류라 할 만한, 식민지 시대에 괜찮은 위치를 누리던 사람들의 향배가 민족의 장래에 큰 관건이라고 나도 인정합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각종 각급의 경영 경험을 가진 이 사람들이 건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인적자원이에요.

그런데 이 아까운 사람들이 민족 단합을 등지는 방향으로만 자꾸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미군정이 그런 쪽으로 여건을 만들어주고 있죠. 지금 미군정과 한민당이 끌고 가는 방향은 일본 통치 체제를 그대로 되살리고 사람만 일본인 대신 미군과 한국인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로는 식민지 체제의 억압성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민중의 염원에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국가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 지금 상황 속에서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좌익의 인재들은 새 국가의 정신이 되고 우익의 인재들은 그 육체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믿고 어울리지 못할 때,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김기협 :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한민당은 선생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지만 한민당이 '절대 지지'를 부르짖는 데 반해 선생님의 '영입보강론(迎入補强論)'은 '비판적 지지'랄까, 임정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감을 줍니다. 이 차이를 설명해 주시지요.

안재홍 : 나는 지금의 임정이 26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진용과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어느 조직도 완전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지지'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를 '절대 지지'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임정에게는 독립건국의 주체로서 크나큰 역사적 역할이 지워져 있습니다. 임정 밖의 사람들이 그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주체를 세우려 한다면 건국 사업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 됩니다. 임정을 영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임정 구성원만으로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임정은 보강되어야 합니다.

임정이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여부는 임정의 현 요원들 손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념에서는 자신감을 갖되 실력에서는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국 사업의 노선을 명확히 밝혀주면서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임정의 역할에 대한 민족의 기대감을 확인해줌으로써 임정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것이 내 할 일입니다.

그분들이 한민당의 '절대 지지'에 현혹되지 않기 바랍니다. 그 '절대 지지'에는 임정의 자신감을 지나치게 키워 다른 독립운동 세력, 특히 좌익을 경시하는 오만에 이르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이제 본격적 단계의 출발점에 있는 것과 같이 임정의 지금까지 사업도 이제 완결되어 과일을 따먹는 단계가 아니라 지금부터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준비였다는 인식을 그분들도 가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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