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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고 인기 수학책, 저자가 요절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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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고 인기 수학책, 저자가 요절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75] 남순희와 전용규

1899년 3월부터 1907년 3월까지 8년 동안 의학교 교관(교수)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다. 그 가운데 1904년 10월 18일자로 발령을 받은 안상호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아 석 달 뒤인 1905년 1월 16일 해임되었다. 따라서 실제로 교관으로 근무한 사람은 17명인 셈이다.

17명 중에서도 경태협, 홍종덕, 윤태응, 김하영, 이승현, 이주환 등 6명은 재임(在任) 기간이 3일~17일에 불과해서 교관으로 실제 활동한 사람은 11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몇 차례에 걸쳐 이들 교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의학교 교관 가운데 남순희(南舜熙), 김익남(金益南), 장도(張燾), 유세환(劉世煥), 최규익(崔奎翼) 등 5명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며, 김교준(金敎準)과 유병필(劉秉珌)은 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이들의 근무 기간은 모두 1년 이상이었다. 그리고 심영섭(沈瑛燮), 이병선(李炳善), 전용규(田龍圭)는 일반 관료 출신이며, 박승원(朴承源)은 중학교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4년 동안 재임한 전용규를 제외하고는 근무기간이 3~4개월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본 유학생 출신과 의학교 졸업생, 그리고 전용규가 실질적으로 교장 지석영의 지휘를 받아서 의학교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교육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재임 기간이 매우 짧았던 사람들을 보면 의학교 운영과 학생 교육이 대단히 불안정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의학교 교관들은 대부분 당시 대한제국으로서는 최고의 신지식인 엘리트들이었다.

▲ 의학교(1899년~1907년)의 역대 교관. ★ 표시는 1년 이상, ☆ 표시는 3개월 이상 근무했음을 나타냄. ⓒ프레시안

1898년 일본 도쿄 공수학교(工手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한 남순희는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이 교장으로 있던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정교(鄭喬, 1856~1925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동역사(大東歷史)>,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의 저자), 임병구(林炳龜) 등과 함께 교사 생활을 하다 <의학교 관제>가 반포된 닷새 뒤인 1899년 3월 29일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받았다.

교관 남순희는 교장 지석영 및 서기 유홍(劉泓, 1899년 10월 5일 법부 주사로 전임)과 함께 의학교 설립 준비를 도맡았다. 그리고 9월 4일 의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교육, 통역, 번역 등 1인 3역을 해냈다.

▲ <독립신문> 1899년 9월 12일자. 9월 4일("도라간 월요일") 개교한 의학교에 교관은 남순희 한 사람밖에 없어, 혼자서 교육, 통역, 번역 등 1인 3역을 하고 있다는 기사이다. 여기서 통역 일이란 일본인 교사 후루시로의 강의를 통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부에서는 10월 14일 의학 교과서 번역을 위해 일본인 아사카와(麻川松次郞, 제14회)를 고용해서 남순희의 짐을 조금 덜어주었다. ⓒ프레시안
<황성신문> 1899년 10월 16일자의 "의학교에셔 향일(向日)에 개학하얏스나 학과 책자를 준비치 못하야 위선 화학과뿐 교수한다더니"라는 기사를 보면, 개교 초에 남순희와 일본인 교사 후루시로(古城梅溪, 제48회)가 화학을 번갈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순희는 뒤에 동물, 식물, 물리 등 다른 자연과학 과목과 수학도 가르쳤을 것이다.

의학교 초기에 핵심적 역할을 한 남순희는 업무가 지나치게 많았던 탓인지 1901년 8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에 별다른 조짐 없이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보아 과로사가 거의 틀림없었을 것이다. 남순희는 의학교 교관을 하면서 흥화학교에서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광흥학교(光興學校) 특별 영어 야학과에 학생으로 등록하여 우등을 했다(1901년 5월 31일). 그런 한편 그가 1900년 11월에 펴낸 <정선산학(精選算學)>은 대한제국 시절 가장 대표적이고 인기 높은 수학책이었다. 남순희의 요절은 실로 아까운 일이었다.

▲ 남순희의 <정선산학(精選算學)>(1909년 판). 1900년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10년 동안 스테디셀러 수학책이었다. ⓒ프레시안

▲ <대조선협회보> 제1권 제7호(1897년 2월 28일 발행). 남순희의 인문지리에 관한 글 "지리인사지대관(地理人事之大關)"이 실려 있다. 남순희는 이미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프레시안

지석영 다음으로 의학교에 오래 근무한 사람은 전용규로, 그는 1900년 12월부터 1904년 12월까지는 교관으로, 그리고 그 뒤 1907년 3월까지는 서기로 근무했으며 의학교가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될 때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전용규는 그에 앞서 1895년 4월부터 5년 8개월 동안 탁지부 주사로 일했으며, 학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의학교 규칙>의 16개 교과목 중에는 재정 분야 관료 출신인 전용규가 가르칠 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그가 의학교에서 담당한 학과목은 무엇이었을까? 직책은 교관이지만 실제로는 서기의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런데 <황성신문> 1907년 2월 6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에 관한 기사를 실으면서 이 연구회의 연구원 및 서기로 전용규가 선정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문연구회를 거(去) 금요일 하오 7점(点)에 훈동 의학교 내로 임시 개회하고 규칙과 임원을 천정하얏는대 회장은 윤효정(尹孝定) 씨요 총무는 지석영 씨요 연구원은 주시경(周時經) 박은식(朴殷植) 이능화(李能和) 유일선(柳一宣) 이종일(李鍾一) 전용규 정운복(鄭雲復) 심의성(沈宜性) 양기탁(梁起鐸) 유병필 씨 등 10인이 위선 피천되고 편찬원은 지석영 유병필 주시경 3씨요 서기 2인에 전용규 씨 1인만 위선 선정하얏는대 연구원 회는 매 금요일 하오 7점이요 통상회는 매월 제4 일요일 하오 4시에 개회하기로 정하얏더라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한글(운동)단체인 국문연구회는 지석영의 주도로 1907년 2월 1일 창설되었으며, 사무실은 훈동 의학교에 있었다. 국문연구회에는 윤효정(1858~1939년 ; 대한협회 총무), 박은식(1859~1925년 ;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주필,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이종일(1858~1925년 ; <제국신문> 제1대 사장, 3·1운동 33인 중 한 명), 정운복(<제국신문> 초대 주필, 제2대 사장), 양기탁(1871~1938년 ; <대한매일신보> 주필, 임시정부 주석) 등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 다수가 참여했는데, 전용규도 연구원 및 서기로 초기부터 관여했다.

▲ 1908년 지석영과 전용규가 편찬한 <아학편(兒學編)>. 원래 정약용이 교육용으로 만든 2천자문에 주석을 단 것으로 국어학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프레시안
그리고 1908년 전용규는 지석영과 함께 정약용의 저서 <아학편(兒學編)>에 주석을 달아서 해석한 책을 펴내었다. 이 책은 한자 2000자에 대해 그 훈(訓)과 음, 운, 중국어 발음, 사성(四聲), 일문훈(日文訓)과 독음 및 여기에 해당하는 영어 어휘 등을 아울러 적은 것으로, 국어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전용규가 <의학교 규칙>에 열거되지 않은 국어나 한문 등을 가르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학교는 의학생 교육이라는 원래의 목적 외에 지석영, 전용규, 유병필 등에 의해 "국문 연구"도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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