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동굴 안이 궁금했던 호기심 많은 것들이 들어오면 느긋하다가도 날쌔게 가로챈다. 그러고는 범람한다. 침입자의 전존재를 녹여내기 위해 분비물이 서서히, 그러나 가득 흐른다. 다른 혀랑 만나면 관능의 전령사가 된다. 얽히고설키면서, 당기고 미루어내면서 이루어내는 화음은 온몸을 떨리게 한다.
그런 혀이건만, 어느 순간 그 혀를 놀려 내뱉는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사랑과 관능을 불러오는 악기를 부려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판하는 거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혀를 놀려 해야 할 일도 많건만 고작 그런 데나 쓰고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다시, 찾고 싶었다. 혀가 잃어버린 그 그윽한 것들을.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마음산책 펴냄)를 펴고, 책을 어루만지며 그의 글을 소리 내 읽었다. 오랜만에 혀가 불타올랐다. 죽임의 독을 뿜는 혀가 아니라 사랑을 부르는 혀가 되었다. 딱딱하고 굳은 말이 아니라 낭창낭창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모국어의 한자말 그대로 어미의 말들이 부려졌고, 연인의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미끈하다'를 보자.
미끈함은 점액질의 미끄러움이다. 미끄러움은 그저 유동성일 뿐이지만, 미끈함은 찰진 유동성이다. 그것은 찰밥의 유동성이고, 찰떡의 유동성이며, 찰부꾸미의 유동성이고, 찰흙의 유동성이다. 흐름과 움직임의 날램에서 미끈함은 미끄러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성애를 도발하고 갈무리하는 끈끈함에서 미끈함은 미끄러움에 크게 앞선다.
▲ <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고종석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
아니, 어찌 성애가 추할 수 있겠는가. 벌거벗은 이들의 살갗이 마주치면서 일으키는 열기에 그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나는 데 말이다. '미끈하다'를 읽으면 먼저 혀에 불이 붙는다. 그 불에 거짓과 위선은 불타오른다. 그래서 혀는 촉촉해진다. 천천히, 음미하며, 저 깊은 곳에서 약하지만 급하게 올라오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읽게 된다. 다음을 소리 내 읽어보면 금세 느낄진저.
미끈함의 점액질 정도가 미끄러움보다 크다는 것은 그 끈끈함이 /ㄴ/ 소리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일 테다. /ㄹ/은 그저 흐를 뿐이지만(그득 찬 생기에 떠밀려 흐르고 또 흐르는 <청산별곡>의 /ㄹ/을 떠올려보라), /ㄴ/은 끈끈하게 흐른다. 성애의 신호가 왔을 때, 여성의 질은 미끈해지기 시작한다. 바짝 마른 질 속에서 남성은 질식한다. 그 거칠함 속에서 여성도 질색한다. 미끌미끌하기만 한 질 속에서 남성은 허우적거린다. 그 미끄럼 속에서 여성도 허망하다. 남성이, 그러므로 여성이 안온을 느끼는 것은 질이 미끈할 때다. 미끄러운 듯하면서도 끈끈할 때다.
이성과 체면의 꺼풀을 벗기는 말의 연금술이다. 읽으며 침 한번 삼켜야 한다. 촉촉한 혀가, 축축해져 있을지 모르니. 얼마나 행복한가, 혀를 굴렸더니 성애의 환상으로 빠져드니. 이 혀가 세상을 향해 무슨 짓을 했던가 되돌아보니, 혀를 찰 노릇이다.
고종석의 글을 읽으면 혀가 동물성을 되찾는 듯하다. 날름거리며 무엇인가를 확, 낚아채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니, 더 읽어볼 수밖에. 이번에는 '간지럼'.
근지러움은 일종의 불편함이거나 불쾌함이지만, 간지러움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일종의 쾌감이다. (…) 적절한 수준의 간지러움은 육체적 쾌감이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육체적 쾌감인 성적 쾌감과 슬며시 닮았다. 연인들끼리 섹스를 하면서 (전희로서)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거나 핥아줄 때, 그것이 낳는 쾌감의 핵심은 간지럼이다. 간질이기는 성행위의 준비운동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쾌감 만들기이기도 하다.
알겠다. 남의 글을 소리 내 읽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이다. 눈으로 읽는 것은 어루만지는 것일 터. 어루만지다 서서히 열기가 오르면 혀가 간지럽게 되는 법. 그래서 꽈리를 풀고 바닥과 천장을 오가며, 더 깊은 곳과 열린 곳을 들락거리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혀는 고체에서 액체로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이 혀로 누군가를 간질여본 적이 있던가. 냉소로 무장한 마음의 문을 열도록. 아흐. 부끄러워라. 세 치 혀로 누군가를 깊은 상처에 빠트린 기억은 있어도 상처를 핥아주며 포옹을 한 적은 없으니. 바람에 배웠어야 했던 모양이다. 간질이기의 대장은 그이니. 바람이 불면 연애바람 피우는 일이 잦아지는 것도 그래서 그런 듯하다.
(황인숙의 시구들에서) 바람은 화자의 살갗만이 아니라 달을, 나무를, 구름을 간질인다. 바람은 그것들을 간질임으로써 그것들로 하여금 바람이 들게 하고, 바람이 나게 하고, 바람을 피우게 한다. 다시 말해 그 대상에게 유쾌한 활기를 베푼다. 남의 마음을 잘 간질이는 사람을 '간지라기'(그 뉘앙스는 다소 부정적이다)라 하는데, 바람은 삼라만상을 간질이는 최고의 간지라기일 것이다.
살맛난 혀가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읽어나간 구절이 있으니, 바로 '술'이었다. 일찌감치 책은 冊이라 써야 한다는 이가 있었듯, 나는 술이야말로 술이라고 발음해야 마땅하다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고 해왔는데, 이제 답변할 수 있겠다. 자기 책에 버젓이 자기 글을 인용하는 배포에 놀랐지만, 읽으면서 더 좋아하게 된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그 물리적 화학적 성질과 풍속적 규범을 슬그머니 암시하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낸다. 한편 그 첫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마법의 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술이, 예컨대 모음 /ㅓ/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내뱉는 액체가 아니라 들이마시는 액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액체라는 점을 내비친다.
하긴, 술을 술이라 발음해야 제격인 것은 술을 반복해서 말해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술술 또는 술술술 해보면 술이 술일 수밖에 없는, 고여 있는 것을 흐리게 하는 힘을, 그 흐리는 힘이 버티고 있는 그 무엇을 슬슬 무너트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고종석의 글을 읽노라니 혀에 박혀 있던 가시가 뽑혀나간 듯하다. 두텁고 부어 있고 말랐던 혀가 자유로워진 것. 그 혀로 읽으면서 많이 동감하고 감동한 글귀가 있으니, 표제작이 된 '어루만지다'이다.
강제나 거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루만지는 행위는 그 대상에게 주체의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다. 때로 그 사랑의 대상은 "청화백자를 어루만지다"나 "소담한 벼이삭을 어루만지다"에서처럼 사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어루만짐의 대상은 상대의 몸이나 마음일 것이다. 제 연인이 무슨 일로 모욕을 당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그 상처를 어루만진다. 따스한 언어로, 제 연인이 계단을 급히 내려오다가 발목이 접질렸을 때, 우리는 그 발목을 어루만진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길로, 그러니까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에로틱한 것이 애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무나 위안도 에로틱한 것이거늘. 몸을 탐하는 것만이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도 에로틱하다는 말이다. 내 입안에 갇혀 있는 세 치 혀가 제대로 쓰이려면 어찌해야 하나를 이처럼 잘 말해주고 있는 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남의 글로만 한편의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남의 글을 소리 내 읽으며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것도 품어볼만한 꿈인 듯싶다. 벗들이여, <어루만지다>로 시작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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