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석영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과 반대로 김익남은 그 이름이나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지석영도 주로 종두술 보급과 관련해서 언급될 뿐이지 그가 근대 의학 수용 과정에서 더욱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 의학교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 최초로, 그것도 자주적으로 근대식 의사들을 양성, 배출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일제의 식민사관,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적 시선, "엽전 의식"과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 등 여러 요인이 관여할 것이다. 아니,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 스스로 의학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자성과 자책을 해야 할 것이다.
▲ <만세보> 1906년 11월 2일자. 당시 대표적인 여성단체인 "여자교육회"의 임원을 선임했는데, 지석영과 김익남의 부인이 위생소(衛生所) 이사직을 맡게 되었다는 기사이다. 남편들의 명망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자교육회는 1908년 10월, 내부대신으로 대한의원 초대 원장을 겸했던 을사 5적 이지용(李址鎔, 제55회)의 부인인 이옥경(李鈺卿)이 총재를 맡으면서 완연하게 친일 단체가 되었다. ⓒ프레시안 |
이전에 언급했듯이 김익남은 1895년 관비 일본 유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학업 과정을 보면 150여 명 유학생 중에서도 단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김익남은 1895년 12월 게이오 의숙 보통과를 처음으로 졸업한 8명 가운데 한 명, 그것도 우등생이었으며 최초로 전문직 고등 교육 기관인 도쿄 지케이(慈惠) 의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에 졸업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정규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것이었다. 아마도 김익남은 도일 유학생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기대를(제67회) 가장 잘 충족시켰을 법하다.
김익남이 일본 유학 전에 의원(醫員) 생활을 했다는 언급도 있지만, 집(家塾)에서 한의학을 공부했을 뿐 과거 시험 의과(醫科)에 합격한 기록은 없다. (청풍(淸風) 김 씨인 김익남의 집안은 명문 세도가는 아니었지만 양반으로, 주로 중인들의 몫인 의원 직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김익남의 일가 중 대표적인 근대 인물로는 외아문 독판으로 제중원 초기의 책임자였던 김윤식과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이 있다.) 김익남이 일본 유학에서 의학을 선택한 연유와 과정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든 김익남의 유학 생활은 상대적으로 순조로웠던 것 같다. 유학 전에 일본어학교를 다녀 유학생 누구보다도 언어에 문제가 적었고, 게이오 의숙을 졸업하자마자 상급 학교인 지케이 의학교에 진학했다. 유학생 친목회 활동은 1896년 9월 12일 친목회 통상회에서 "위생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것 외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조용히 학업에만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랬기 때문에 수많은 도일 유학생 관련 사건에서 김익남이 자유로웠던 것인지 모른다.
<도쿄 지케이카이(慈惠會) 의과대학/의학전문학교 일람>(1922년)에 따르면 김익남이 재학하던 1890년 후반 지케이 의원 의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이었지만 김익남의 실제 수학 기간은 3년 반가량이었다. 김익남은 1896년 1월부터 1899년 7월까지 재학했다. (지케이 의학교는 그 당시에도 전문학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는데, 정식으로 의학전문학교가 된 것은 김익남이 졸업하고 4년이 지난 1903년이었다.)
김익남이 수학할 당시 학과목은 영어, 물리학, 화학, 실제화학, 해부학, 실제해부, 실제조직학, 생리학, 병적(病的)조직학, 미균학(微菌學), 약물학, 내과학, 내과병리학, 외과학, 실제외과, 외과병리학, 외과수술학연습, 산과학, 부인과학, 위생학, 단송의학(斷訟醫學), 이비인후과학, 정신병학, 피부병학, 진단학, 진(단)법실습, 안과학, 임상강의, 폴리클리닉 등으로 오늘날과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소아병학은 김익남이 졸업한 뒤인 1901년에야 정식 과목이 되었으며, 단송의학은 오늘날의 법의학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익남이 이런 과정을 거쳐 1899년 7월 30일 지케이 의원 의학교를 졸업하자 정부는 김익남에게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하겠다며 귀국을 독촉했다. 1898년 11월 지석영의 의학교 설립 건의 편지에 대해 학부대신 이도재가 지체 없이 건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회신한 데에는 당시의 정국이 크게 작용했다(제64회). 그와 더불어 김익남이 곧 지케이 의학교를 졸업할 것이므로 교수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정부의 신속한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도쿄 지케이카이(慈惠會) 의과대학/의학전문학교 일람>(1922년) 중의 역대 졸업생 명단. 김익남(조선)은 1899년(明治 32년) 7월에 졸업했다. 이 <일람>에 의하면 1899년 제15회 졸업생은 모두 30명이었다. 1921년까지 졸업생 2040명 가운데 조선인은 김익남과 안상호 등 4명, 중국인 8명, 대만인 1명, 필리핀인 2명이 있었다. 또 김익남이 한국인(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정식 의사가 된 1899년,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일본인 의사는 이미 2만 명에 달했다. 100여 년 전 일본과 한국의 "근대 의료의 풍경"은 이렇게 차이가 났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김익남의 이력서(1907년 9월 30일 작성)를 통해 수학 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력서 작성 당시 김익남은 군부 군무국 위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품계는 정3품, 계급은 육군 2등 군의장(중령 격)이었다. (1907년 한국군 강제 해산 당시 자결로 항거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년)의 계급은 참령(소령)이었다.)
1870년 8월 11일(이력서에 기재된 날짜는 거의 모두 양력으로 여겨지는데, 생일도 양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성에서 태어난 김익남은 이력서에 따르면 1890년 3월부터 3년 동안 집안(家塾)에서 한의학을 공부했다. 이것이 독학을 의미하는 것인지, 경험 있는 의원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을 뜻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전의감과 같은 전통적인 정규 의료 기관에서 학습한 것은 아니었다.
김익남의 본격적인 수학은 1894년 9월 10일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시작된다. 1895년 5월 10일 일본 유학생(제2진)으로 선발된 김익남은 6월 13일 게의오 의숙에 입학했다(제67회). 그리고 반년 뒤인 12월 27일 김익남은 게이오 의숙 보통과를 우등(2등)으로 졸업하고 부상으로 일본 외사(外史) 및 만국지도를 받았다. 1896년 1월 12일 도쿄 지케이 의원 의학교 전기(前期) 과정에 입학한 김익남은 1년 반 뒤인 1897년 7월 30일 "의학 전기 졸업증서"를 받았다. (1895년 가을 학기는 건너뛰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서 9월 12일 의학 후기 과정에 입학하여 2년 뒤인 1899년 7월 30일 "의학 전과(全科) 졸업증서"와 "이비인후과 득업(得業)증서"를 받았다.
말하자면, 김익남은 의학 전기와 후기를 합하여 3년 반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은 동시에 전문 과목으로 이비인후과를 공부하여 수료증을 받은 것이다.
김익남의 수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학교의 개교를 앞두고 학부에서는 귀국을 종용했지만, 김익남은 1899년 8월 10일부터 1년 가까이 지케이 의원의 당직의원(當直醫員)으로 근무하여 1900년 7월 6일 "당직의원 증명서"를 받고 8월 2일 귀국했다. 당직의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인 1900년 4월 2일 학부에서는 김익남을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하여 귀국을 재차 독촉했다.
김익남의 이러한 행동을 국가보다 개인의 성취를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길게 보아서는 1년간의 당직의원 경험은 김익남 자신에게나 한국 의료계를 위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김익남의 이력서(1907년 9월 30일 작성). 친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익남의 수학 과정이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
김익남은 일본 내무성이 발급하는 "의술개업인허장"은 부여받지 않았다. 도쿄 지케이 의원 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은 1908년부터는 내무성이 주관하는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인허장"을 받았지만 그 이전에는 내무성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김익남은 그 시험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으로 처음 일본의 의술개업인허장을 취득한 사람은 김익남의 지케이 의학교 3년 후배인 안상호(安商浩, 1872~1927년)였다.
김익남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않은 것을 마치 큰 결격 사유나 되는 듯이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인허장이 없다고 하여 김익남의 의사 활동에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익남은 모교의 병원에서 1년 동안 당직의원으로 근무하고 그 경력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받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개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허장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굳이 받을 까닭은 없었다. 어쩌면 귀국을 종용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자신의 귀국 의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인허장이 없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인허장을 취득한 안상호는 그 뒤 일본에서 4년 동안 의사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른바 "선부일처(鮮夫日妻)" 집안을 이루었다(제60회).
▲ <도쿄 지케이카이(慈惠會) 의과대학/의학전문학교 일람>(1922년) 중의 "졸업생 종별 인원표." 1907년 졸업생까지는 "전문학교령에 의거한 졸업자"에 해당하여 개업을 하기 위해서는 내무성이 주관하는 시험을 보아 합격해야만 했다. 김익남은 그 시험을 치르지 않아 일본의 "의술개업인허장"이 없다. 지케이 의학교 3년 후배인 안상호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내무성 인허장을 취득했다. ⓒ프레시안 |
이때 김익남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않았던 것은 뒷날 일제 시대에 의사로서의 활동에 어느 정도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도 다시 꼼꼼히 생각해 볼 일이다. 일제는 정규 의학 교육 경력이 전혀 없는 이규선과 피병준에게 인허장을 주었다(제51회). 일제가 김익남이 의학교에서 가르쳐 의사로 배출한 제자들에게, 심지어 이규선과 피병준에게도 의술개업인허장을 주었으면서도 김익남에게는 끝내 주지 않았던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908년부터 일제가(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인에게 부여한 의술개업인허장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사실, 일본에 유학하여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 교육 과정을 마친 김익남은 일제가 가장 크게 이용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는데도 말이다.
▲ 도쿄 지케이(慈惠) 의원 당직의원 시절(1899년 8월~1900년 7월)의 김익남(파란색 원 안). 이 사진에서 유독 김익남의 시선 방향이 다르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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