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11일
사십년이란 긴 동안 우리 농민의 피를 빼앗고 살을 깎아 오던 동양척식회사도 해방과 함께 착취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명칭도 新朝鮮會社라고 변경하여 조선 농촌의 재건과 조선을 복리시키는 기관으로 새 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회사의 전 재산은 군정청관리로 되어 일본인 직원 967명도 전부 파면하고 조선 사람의 손으로 강력하고 자유로운 독립 신조선을 건설하는데 전력을 경주할 터이라고 한다.
(<중앙신문>, <매일신보> 1945년 11월 11일, 1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식민 지배의 '첨병'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은 첨병보다 '주체'로 볼 측면이 많다. 총독부에 버금가는 대지주로서 동척의 경제적 역할도 엄청난 것이었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사회 구조 변화에 대한 동척의 영향력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조금 줄어들기는 했어도 농업은 해방 때까지 조선의 산업에서 압도적 비중을 지키고 있었다. 주민 대다수는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고 있었다. 왕조 시대부터 계속된 일이지만, 식민 통치는 그 실제 양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식민지 시대 농업과 농촌의 변화에 관해 많은 연구가 쌓여 왔고, 이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 나로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으나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착취'의 양적 고찰보다 '소유' 개념의 질적 변화가 더 부각되기 바란다는 점이다. 근대적 '사유권' 도입이 일으킨 변화를 매우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사유권은 확장되고 있었다. '중세 사회 해체' 현상의 핵심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권의 대상이 아무리 늘어나도 농지의 '왕토(王土)' 관념만은 사유권의 적용을 거부하며 전통적 농업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 버티고 있었다.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 대지주라 할지라도 그 땅을 경작하는 '소민(小民)'의 권익을 묵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작인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고, 관행 이상으로 지대율을 높일 수도 없었다.
지주의 소유권은 소작인의 경작권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유권과 경작권이 이렇게 어울리는 관계를 통해 지주 역시 '농업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동척을 앞세운 식민 통치는 농업 공동체를 깨뜨리고 농지 소유권을 절대화했다.
동척 출범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1만7000여 정보의 농지를 출자했는데,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난 1920년대에는 전국 경작지의 3분의 1인 9만7000여 정보로 늘어났다. 이 증가의 대부분은 매입으로 이뤄진 것이지만 여기에도 소유권 개념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절대적 소유권이 전통적 지주 소유권보다 더 높은 수익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농지의 경제적 가치를 높임으로써 종래의 지주들이 동척에 땅을 파는 추세를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1931년 생으로 익산 농촌에서 살던 윤성남의 회고는 이런 추세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를 했지 일본 사람에게는 안 팔았어요. 그러니까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경우보다 가격을 더 쳐줬어요. 어떤 경우에는 30%까지 더 줬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그 논을 사서 일본 농장에 합친 다음에도 원래 주인이 필요할 때까지 농사를 그냥 지어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주들은 조선 사람한테 논을 팔면 제값도 못 받는 반면 일본 사람한테 팔면 돈을 더 받고 나서도 2, 3년이고 무료로 지어먹으니까 일본 사람들한테 팔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들 일본 놈들한테 논을 팔다보니까 어느 정도 자기들 계획한 양이 찼어요. 그 다음부터는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금액보다도 더 낮은 가격에 땅을 사들였어요. 파는 사람도 낮게 팔았어요. 왜? 그냥 지어먹을 수 있으니까.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09~210쪽)
절대적 소유권은 어떻게 수익성을 높일 수 있었나? 경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소작인을 마음대로 잘라 가며 지대율을 마음껏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 원리가 도입된 것이다.
왕조 시대 지주의 횡포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지만, 이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경작권이 존중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주의 '이윤 극대화'에 적합한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소작인들이 경작권에 매달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자유시장 원리를 도입하니 노동력 공급이 넘칠 수밖에 없고, 수확의 절반을 마지노선으로 지키고 있던 지대율은 7할을 넘어 8할까지 치솟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수 소작인들이 경작권을 잃고 유랑의 길에 올랐다.
1921년 생으로 김제 동진농장 소작인으로 있었던 최재순은 '근대화'된 농장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소작료가 얼마라고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모심을 때부터, 가꾸고 베어서 타작할 때까지 전부 공동 작업을 했기 때문에 수확을 끝내고 똑같이 나눴어요. 거기서 소작료 빼고, 농사짓는 동안에 생활용품이나 비료니 사다 쓴 빚을 모두 제하고, 또 '수세'라는 물값도 걷어갔어요. 그렇게 딱딱 계산하고 나면 논 한 자락에서 나는 쌀만치도 남는 게 없이 다 가져갔지요.
그럼 농민들은 뭘 먹고 살겠어요? 죽어라고 농사지어봤자 한 가마도 가져오지 못하는데. 그러니까 이제 모두 다 같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니까, 타작할 때 슬슬 돌아다니면서 땅을 흩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위를 지푸라기로 살짝 덮어놓았다가 타작을 끝내고 다 거둬간 뒤에 바닥에 있는 낟알들을 쓸어 담아 말려서 1년 내내 두고 먹었어요. 물론 감독하는 사람들도 농사짓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다 굶어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모른 척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같은 책, 216쪽)
해방 후 신조선회사로 개편될 때(몇 달 후 '신한공사'로 이름을 바꾼다) 동척의 소유 경지는 전체 농지의 12.3%에 달했으며 이를 경작하는 농가는 58만7974호로 전체농가 217만 2435호의 27.1%였다고 한다(<위키백과> "동양척식"조). 1920년대 이후 불하를 통해 소유 경지를 줄여 왔는데, 불하받은 개인과 회사들은 이를 절대적 소유권에 입각한 농장 형태로 경영했다. 뿐만 아니라 김성수 집안 같은 기존 지주들도 농장 형태를 채용해 부를 늘렸으니 해방 당시 한국 농지의 대충 절반은 동척 스타일 농장으로 경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작권을 묵살하는 자유시장 원리는 그 밖의 지주들에게도 많이 파급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대다수 한국인이 사회주의 원리의 도입을 바라고, 그중에서도 토지 소유 제도의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넓고 깊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인구의 근 80%가 농촌에 거주하는 상황에서 도시 중산층이라도 농촌에 배경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농촌에 배경을 가진 것은 자본가 집단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당시 한국인 자본의 대부분이 지주 자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상공업 분야 자본가들도 지주 자본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형태의 토지 개혁이든 해방과 토지 개혁을 직결시키는 일반 민심이 그들에게는 자본가 위상에 대한 위협이었다. 구체적 친일 경력에 관계없이 구체제에 집착하는 반동적 경향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고, 이 경향이 한민당의 배경이 되었다.
'동양척식회사'를 '신조선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 직원들을 파면한 것은 간판과 외장을 바꾼 것일 뿐이다. 동척의 구조와 기능은 그대로 남긴 것이다. 한민당조차 민심을 외면하지 못해 9월 6일의 발기회에서 정책 8개조의 하나로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세웠던 것인데, 미군정은 민심을 직시할 뜻을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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