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8일
11월 5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나올 때는 미군정이 그들의 귀국을 주선한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고,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을 모두들 기대했다.
김구의 특사 5인이 5일에 이승만을 방문해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7일자 <중앙신문>에 보도되었고, 임정 요인 30여 명의 "10일 내 귀국"을 이승만이 기자단에게 언명했다는 사실이 6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11월 10일 이전이라는 뜻인지 그 시점부터 10일 이내라는 뜻인지는 기사 문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귀국을 앞둔 김구의 담화도 7일자 <자유신문>에 실렸다.
[重慶5日發 中央社國際] 한국 임시정부 주석 金九는 5일 귀국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 및 美, 英, 蘇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긴밀히 할 것과 선거에 의한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 세계 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데 있다. 또 나는 조선의 여하한 분할에 대하여도 허용할 수 없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일자 <중앙신문>에는 임정 환국에 대한 이승만과 송진우, 그리고 이관술의 소감이 실렸다.
◊ 李承晩
"금월 10일 이전에 귀국하기로 된 것만은 사실인데 임시정부가 정식 승인을 받지 않은 관계상 金九 씨도 물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일 것이다. 또 그들이 금후 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도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물론 그 취지에는 찬성할 줄 믿는다."
◊ 韓國民主黨 宋鎭禹
"오래동안 기대하던 임시정부 주석 金九 선생을 위시하여 정부 요인 34인이 중경을 떠나 금일 상해에 도착하여 잠시 체재한 후 불일 내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회가 깊은 바이다. 해외에서 수십 년간 꾸준히 광복의 날을 찾고자 악전고투해 온 위대한 혁명가를 맞이한 우리 태도는 간단히 말하면 허심탄회하게 그이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환국하는 그 분들은 내 생각 같아서는 여러 가지 사정도 있어 정식 정부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격으로 오는 것으로 보는데 결국은 개인이라 할지라도 정부의 수뇌부가 오게 되는 만큼 이를 맞이하는 우리는 정부를 맞이하는 심경이어야 할 것이다. 吾黨으로서는 원래가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있음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 방침에 변화는 없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절대 지지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즉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다. 현재 釀成되고 있는 민족통일전선결성운동은 매우 반가운 일이나 임시정부에 대하여 여하한 형식이건 무엇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 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다. 吾黨의 거취에 대하여서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없는 한 자진하여 해산할 의사는 없다."
◊ 朝鮮共産黨 李觀述
"수십 개 성상을 두고 해외에서 조국해방전선에 투쟁해 나온 선배제씨의 귀국에 제하여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6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공산당의 이관술이 임정 요인들에 대한 개인 차원의 경의를 표하면서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은 좌익의 일반적 입장이었다. 사회주의 원리를 중시하는 좌익으로서는 김구가 좌익을 적대해 온 경력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해외의 독립운동보다 국내의 노농운동이 더 존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승만이 짤막한 논평에서 임정 요인들의 "개인 자격"을 강조한 것은 그의 상투 수법이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권위는 임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임정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더 확실한 근거를 임정에 두고 있던 김구 등 요인들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 자격을 강조함으로써 임정 권위로부터의 혜택을 자신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없도록 애쓴 것이었다.
송진우의 '절대 지지' 논평은 한민당의 기존 노선 그대로다. 그런데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 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라는 한 마디가 그 속셈을 드러내는 것 같다. 임정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 예상되던 '민족통일전선'을 한민당은 드러내 반대하지는 못하면서도 실제로는 반대하던 속셈이다. 송진우는 한민당이 어떤 수단으로든 임정에 영향을 끼쳐 민족통일전선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이다.
임박한 임정의 귀국에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정의 지도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임정이 과연 어떤 역량과 노선을 가지고 나타날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0일자 <자유신문>의 아래 기사는 긴장감을 크게 증폭시켰을 것이다.
大韓民國臨時政府特派事務局 發表
1) 重慶에 外交辨事處 設置
우리 임시정부는 金九 主席을 수반으로 목하 환국의 도정에 있는 바 중경에는 정부 환국 후에 사무 처리를 위하여 특히 大韓民國臨時政府 外交辨事處를 설치하고 朴贊翊(南坡)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2) 광복군의 확대 편성
제국주의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세계대전에 당당히 싸워 그 위훈을 세계에 알려 금번 우리 민족해방독립에 길을 열은 우리 광복군이 불원 환국하게 되었다. 환국을 앞두고 우리 정부에서는 李靑天將軍의 지휘 하에 다음의 확대 편성과 맹훈련이 진행 중에 있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은 그 규모를 확장하여 대륙방면, 南洋비루마方面 等 태평양전에 被迫 출전한 학병, 지원병, 징병 등 韓籍軍人들을 흡수하기로 되어 특히 蔣介石將軍은 일본총사령부에 대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동시에 전부 광복군으로 편입하라는 명령을 쫓아 한적군인은 전부 이미 광복군편입을 완료하였다. 이리하여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은 다음과 같다.
第1支隊(重慶) 支隊長 李集中
第2支隊(西安) 支隊長 李範奭
第3支隊(開封) 支隊長 金學奎
第4支隊(南京) 編成中
國內支隊(京城) 司令 吳光成
그리고 우리 광복군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南京, 上海, 西安, 開封 4개처에 광복군훈련소를 설치하고 목하 귀국을 앞두고 주야 맹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이란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미·소 양군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병력을 임정이 몰고 들어온단다!
그런데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24일 기자회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 光復軍은 언제 귀국하나?
(답) 시기가 상조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日軍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규합하여 조직과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총사령부도 중경에 있다. 총세는 약 1만이 된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일자 보도에서 "이미 대전에 출전"했다는 것은 일본군으로 출전했다는 말인가?
임정이 5일 상해로 나올 때 미군정은 이미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 후 보름 남짓 귀국이 늦어진 것이 정부 자격의 귀국을 주장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정부 자격이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임정의 누구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통할 수 없는 주장에 매달려 귀국을 늦춘 것은 임정 쪽 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이 광복군의 확장 시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후원과 지지를 받아 온 임정은 마지막 큰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전역(대만 포함)과 동남아 상당 지역에서 일본군 항복 접수를 맡은 장개석 군대가 조선인 포로들을 임정에 넘겨주기를 바란 것이다. 조선인 포로의 수가 20만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 이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11월 5일 상해 도착 후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새로 편성된 '광복군' 병력을 시찰하기 바빴다. 그러나 포로를 그렇게 대거 빼돌리는 것은 장개석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를 면하기 위해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광복군에 접선한 일부 장병(박정희도 그런 경우로 보인다)이 형식적으로라도 편입되었을 뿐, 부대를 따라 정식으로 항복한 포로들은 건드릴 수 없었다. 장개석은 장래 한국과의 관계와 관련해 임정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래서 3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20만 포로를 빼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정은 이청천, 이범석 등 광복군 요인들에게 포로 획득 사업을 맡겨 중국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26년간 지키고 쌓아온 임정의 권위와 가치는 민족주의의 깃발로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종전에 따른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도덕적 권위를 넘는 현실적 힘을 확보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했다. 그 도덕적 권위에 손상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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