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3일
중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일반의 긴장과 주의를 환기시켜 오던 민정장관 프레스콧 대좌의 방송은 30일 오후 7시 20분부터 10분 동안 서울 중앙방송국으로부터 방송되었는데 일반이 다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라디오 앞에 귀를 기울였던 우리들에게 결국 들려 온 것은 이 날 부로 발표되는 일반법령 제19호의 설명이었다. 이 법령을 발표하게 된 이유는 조선이 매우 경제상으로 치안상으로 위기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1) 노동자의 보호 (2) 야미물가의 취체 (3) 공중의 안녕 질서 (4) 언론 자유 출판 자유를 위한 각 신문 기관의 등록 등의 조항을 내세운 것이다.
(…) 미국은 조선에 주둔 하자마자 즉시 일본이 전쟁 수행을 위하여 조선이 기근 쇠약해지기까지 조선에서 식량 기타 생활필수품을 고갈시킨 사실을 발견하였다. 조선 안의 소비품생산은 거의 정지되었다. 관청 공금은 전반적으로 私消되어 있다. 통화는 고의적으로 팽창시켰다. 미군은 즉시 치안을 유지하고 조선인의 복리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압수한 재산은 조선을 위하여 보관되어 있고 기근이 있는 지방에는 식량을 운반 보급하였다.
(…) 조선의 재원은 다년간 일본의 착취를 당했고 조선인은 압박을 받아 부유하고 진취적인 민족이 향락하는 행복한 생활을 못해 왔다. 그리고 이 겨울에 당면할 광범위의 영양 부족 질병 기타 고난을 방지할 만한 물품을 조선인의 손으로 산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체에서는 조선인의 부를 독점하자는 생각을 갖고 노동자로 하여금 직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며 학동으로 하여금 복교치 못하게 하며 농부로 하여금 자기네의 소출을 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형편이 조선 안에 비상사태를 재래하게 되었다. 조선인의 복리를 보장하고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국내에 있는 공장과 원료와 노무자를 적당히 이용한다면 이러한 곤란은 극복하리라고 믿는다. 그런고로 대중에게 유해한 모든 조건을 배제하기 위하여 긴급 사태를 선언하고 비상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잠정적 수단으로 이 필요를 느끼지 않는 때는 원상회복을 시키려 한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1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월 30일 '국가적 비상 시기 선언'이 미군정 법령 19호로 나온 것은 군정 당국자들이 군정 시행의 어려움을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인식한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려움을 느끼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의 아이큐를 비롯해 미군정 당국자들의 자질과 태도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느끼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문제로만 볼 일이 아니다. 도쿄의 맥아더는 하지와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교양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극동에서 일으킨 문제는 하지가 한반도에서 일으킨 문제와 근본적으로 같은 틀이었다. 미국 군부의 일반적 특성에서 생각할 점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미국의 군인 정신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구호의 하나가 "하면 된다(Can Do)!"이다. 좀 어설프게나마 한국 군대에서도 배워온 구호다. 맥아더, 하지, 아놀드의 행적 중 기막힌 대목마다 '하면 된다' 정신이 느껴진다. 20세기 초에 맹위를 떨친 테일러리즘, 즉 기술만능주의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에서 번창했는데, 미국에서도 다른 어떤 분야보다 군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냉전이 미국의 군국주의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주장을 본 일이 있다. 마이클 셰리의 <전쟁의 그림자 속에(In the Shadow of War)>에서였다. 1996년에 나온 이 책에서 셰리는 냉전의 종식이 미국의 군비 축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예견했다. 서방 진영 결속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이 퇴화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이 더더욱 군사력 과시의 필요를 느끼게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미국의 국가 성격을 꿰뚫어본 탁견이다.
미국의 군국주의를 꽃피운 것이 원자탄 투하로 절정에 이른 제2차 세계 대전 승리였다. 그 직후의 미국 군부는 국제 관계의 해결 능력에 대해 국무성을 업신여길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전의 다변주의(국제주의)를 지키고 있던 국무성 정책을 이적 행위로 몰아붙이고 국무성 관리들에게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붙인 매카시즘의 동력도 다른 어디보다 군부의 자신감과 일방주의(국가주의)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10~12장(427~576쪽)에서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이승만의 활동을 개관함에 있어서 미국 국무성과 극동 지역 점령군 사이의 정책상의 갈등이 하나의 기조로 제시되어 있다. 이 갈등은 1947년 4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이 다변주의를 공식 폐기하고 냉전 체제를 선포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혀주는 사례로서 한국사만이 아니라 미국사 연구에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난 시점부터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 회담이 열릴 때까지 맥아더-하지 측이 국무성의 신탁 통치안에 대항한 흔적은 그 자체로도 역력하다. 정병준은 회의록과 편지 등 이승만 자신의 발언과 기록을 통해 이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1945년 11월 초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두 달 전 서울에 들어올 때 하지는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의지도 역량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도움만 약간 받으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복종한 것처럼 미군에게 복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일본군보다 더 강한 미군에게 한국인들이 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제국 체제보다 우월한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도 한국인이 불만을 가진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 체제에서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던 집단이 하지 식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에 친연성을 보이면서 한민당이란 이름으로 접근해 온 것이 하지의 구상에는 딱 맞는 호재였다. 이 집단은 물러가는 일본인 통치자들을 대신할 인적 자원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집단을 고문단으로 받아들여 군정청과의 지속적 접점을 만들고 경찰 등 식민 통치 기구들을 이 집단에게 맡겼다.
그런데 한민당의 득세가 곧바로 여러 층위에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은 한민당의 극단적 선전에 군정 당국자들이 말려든 결과였는데, 중도파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문제점을 이 망언에 대한 각계의 논평을 통해서도 바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인민위원회의 협조가 어떤 성과를 이루고 있는지 알려지면서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측면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경제적 측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한민당을 간판으로 한 재산가 집단은 미군정에 대한 영향력을 두 방향으로 활용했다. 하나는 친일파 처단의 압력을 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인이 남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는 것, 특히 재산권을 늘리는 것이었다. '적산' 취득에 매달린 한국인들을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송진우에게 하면서 그들이 송진우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인지 하지가 알고 있었을까?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가 결성되고 있었다. 결성 단계에서 전평은 상향식 조직이었다. 공산당의 지도력이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단계에서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 욕구가 분출된 것이었다. 재산가들의 탐욕을 비호하는 미군정 정책이 조직 욕구의 형성에 크게 작용했다. 많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본인에게서 경영권을 넘겨받아 노동자위원회를 통해 운영하고 있던 것을 미군정이 탄압함으로써 조직 운동의 필요성을 촉발한 것이다.
"어떤 단체에서는 조선인의 부를 독점하자는 생각을 갖고 노동자로 하여금 직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며 학동으로 하여금 복교치 못하게 하며 농부로 하여금 자기네의 소출을 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이것이 이 시점에서 미군정 당국자들의 상황 인식이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