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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드디어 움직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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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드디어 움직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해방일기] 1945년 11월 2일

1945년 11월 2일

獨立促成中央協議會 결성에 관한 각 정당 대표 회동은 2일 오후 2시 천도교대강당에서 李承晩 사회와 각 정당 각 단체 대표 수백 명 참집 하에 거행되었다.

1) 조선의 즉시 독립
2) 38도선 철거
3) 신탁 통치 절대 반대

의 결의문 낭독이 있은 다음 이 결의문에 대한 토의로 들어가서 (…) 조선공산당 朴憲永으로부터 결의문 중에 우리를 해방해 준 연합국에 대하여 불온한 문구 특히 38도 문제에 대하여 미·소 양국의 영토적 야심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구절이 있으니 그것을 빼자는 동의가 있어 이에 대하여 찬성과 불찬성으로 물의가 분분하다가 呂運亨으로부터 그 중간을 취해서 문구를 수정하자는 동의가 있어 만장의 찬성, 그 수정 위원으로 安在鴻, 呂運亨, 朴憲永, 李甲成 5氏를 선정하고 다음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집행위원 총본부 결성에 관한 토의로 들어가면서 협의회 성립 자체에 대한 토의에서 그 구성 인원 중에 민족 반역자를 제거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다음 중앙집행위원회 선정에 관하여 각 정당 대표를 망라하자는 의견과 한편 정당이 다수이니 그것은 불가능하고 정당 외에서라도 대표적 인물을 선출하자는 의견으로 물의가 많았으나 결국 그것은 李承晩에게 일임하기로 가결하여 회의를 종료하고 끝으로 李承晩으로부터 세상에는 자기를 친일파라고 하나 자기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고 이 협의회에서 자기와 같이 협력하여 일할 분이 있다면 자기는 그와 더불어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고 언명하자 만장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同 오후 5時 지나 흥분과 긴장리에 폐회하였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3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승만은 뛰어난 도박사였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약점을 감추면서 강점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길을 교묘하게 헤쳐 나갔다. 그의 강점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의 경력과 미국 정치에 밝다는 점, 특히 맥아더, 하지와의 밀착 관계였다. 약점은 무엇보다도 투쟁 현장을 회피해 온 행적 때문에 지도력과 신뢰성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9월 초순에 출범한 인민공화국(인공)은 그를 주석으로 선출했다. 박헌영은 그에게 조선공산당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이승만의 강점은 누구의 눈에도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그를 끌어들이는 것을 명분 강화 및 미군정과의 좋은 관계를 위한 열쇠로 여긴 것이다.

그의 약점도 모두 알 만큼 알았겠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덜 품었을 것 같다. 잔재주밖에 모르는 선수가 초반전에서나 한 몫 했지, 메인 게임에 들어서면 제풀에 찌그러질 것으로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완용도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려고 마음먹고 달려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 잘하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하필 그런 상황을 만나 만고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만도 마찬가지다. 권력밖에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던 인물들은 한국 정치사에 그 말고도 즐비하다. 유독 이승만은 재주 펼치기에 너무 좋은 상황을 만나 남들이 못한 짓을 많이 하게 된 것뿐이다.

현대 한국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너무 돌리는 것은 안이한 관점이다. 왜 그런 인물에 의해 그토록 많은 일이 결정되도록 상황이 돌아가게 되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이승만은 판세를 잘 읽었고, 그에 맞춰 묘수를 잘 냈다. "묘수 세 번 쓰면 바둑 진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고수는 판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 때문에 기발한 묘수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정치에 비유하면 정치 공학에 너무 의존할 경우 당장은 성공을 거둬도 결국 정치 자체를 망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정치 공학의 달인이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이승만의 첫 묘수였다.

미군정은 임정이건 인공이건 어떤 조직에도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식 방침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방침이었다. 식민 통치를 하더라도 현지인의 체계적 협조를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법인데, 상당한 실력과 의지를 보인 조직들을 일체 무시하고 주민 하나하나를 자연인으로 파악하겠다는 말인가? 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무식한 군인들이 점령군의 역할을 양떼 돌보는 일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뭔가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죽이 잘 맞는 한민당 사람들을 고문단으로 끌어들였는데, 한민당 외의 모든 사람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 참에 이승만이 나타난 것을 보니 자기네랑 말도 잘 통하고 한민당 사람들보다 훨씬 인기가 좋아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게 되었다.

임정과 인공 양쪽에서 존중받고 군정청의 신뢰를 받는 입장. 정말 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3자 사이의 신뢰감을 키워줘서 해피엔딩으로 끌고 가는 영웅적 역할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런데 이승만은 3자 사이의 적대감을 키워주는 길로 매진했다. 이 강인한 의지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의 맹목적 권력욕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1933년 그를 추방했던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묘수를 너무나 좋아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도박꾼의 생리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23세 때 이래 그의 행동은 꾸준한 노력이 아니라 도박적 선택의 연속이었다.

독촉은 이승만이 임정, 인공과 경쟁할 전국적 조직으로 만든 것이었다. '독립 촉성'이라는 기능적 목표를 내세우는 겸손한 자세였지만, 임정과 인공이 군정청과의 긴장 관계로 발전에 한계를 가진 반면 자신은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독촉의 위상을 키워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는 갖고 있었다. 임정, 인공, 어느 쪽에서도 존중은 받지만 실세를 못 가진 그는 자기 자신의 세력을 키울 근거지로 독촉을 만든 것이었다.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 등 주요 정당 지도자들이 독촉 결성에 적극 협력한 것은 이승만의 역할에 각자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제일 먼저 등을 돌린 것이 박헌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이튿날인 3일 독촉 비판 성명을 냈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금일에 있어 조선 문제를 해결함에는 반드시 아래와 같은 원칙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를 철저히 조선으로부터 구축 숙청할 것, 이것은 조선 민족 전체의 요망이며 절대 명령이다.

둘째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내 걸고 이 원칙 밑에서 모든 민주주의 요소(각 당, 각 파, 각 계급을 물론하고)의 집결로서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선포할 것이다. 셋째는 이 통일 전선을 기초로 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할 것이요, 이 통일 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 기본 과업을 실시할 것이며 특히 조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넷째는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은 통일 정부를 지지하되 이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을 밟아 나가는 가를 항상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것이다. 조선공산당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의미의 원칙적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일에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모인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상과 같은 진실한 의미의 통일 전선과는 퍽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1) 일본 제국주의 잔존 세력 구축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 숙청 문제를 우리가 원칙으로 내 세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묵살 불응한 것(특히 2일회의 중에서).

2) 2일에 모인 소위 각 정당 대표는 엄밀한 심사도 없이 모 당 간부 몇 개인의 독단적 의사로 무질서할 뿐만 아니라 2일 회의 중 다수 투표의 권력 강탈을 목적하고 단체 대표자가 아닌 자기 단체 소속 군중을 회장 안에 끌어들이고 다수를 점령하는 동시에 정말로 참가자격이 있는 여러 단체의 대표자는 접대 위원(모 당원)과 순사 및 미군 헌병의 공동 탄압으로 입장하지 못한 것.

3) 회의 중에 의사 진행이 민주주의적 동포애적 입장에서 서로 의견 발표할 기회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우익 단체의 의사만을 강력히 내 세우고 그들의 주장만으로 전체 문제를 해결한 것.

4) 4대 연합국에 보낸다는 소위 결의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 조선 민족 전체 의사라 볼 수 없는 문제를 취급하여 가지고 연합국의 그릇되지 않은 처치에 대하여서까지 질문 혹 논난하는 성질의 문구를 적어도 3천만 민족의 傳言이라고 보낸다는 것은 경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4일(발췌))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2항의 지적이 눈길을 끈다. 이승만은 주최자와 사회자의 역할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얻도록 회의를 이끌었고, 이것이 회의 진행 방법에 나름 일가견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에게 적발된 것이다. 독촉 같은 성격의 조직을 만들면서 중앙집행위원회 인선을 이승만 일인에게 맡긴다는 희한한 결정만으로도 이 회의의 성격은 가히 알아볼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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