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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한국인 의사 서재필은 왜 개업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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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초 한국인 의사 서재필은 왜 개업하지 않았나?

[근대 의료의 풍경·71] 서재필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온건파 민족주의자 조만식(曹晩植, 1882~1950년)은 <개벽> 제31호(1923년 1월 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방의 연고자가 그 지방을 버린다면 그 지방을 위하야 일할 다른 사람은 누구이며 또 일하는 그 사람으로 볼지라도 비교적 지정(地井)이 닥기어진 자기의 지방을 버린다면 그보다 일하기에 편할 지방은 어느 지방이겟습니까. (…) 제각기 자기의 향토를 지키기로 합시다. 죽기로써 지켜봅시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라는 우리가 제각기 의거(依據)하야써 존립할 근기(根基)를 지어봅시다.

국가든 지역이든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조선(한국)에서 근대 의학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선(한국)인 의사를 배출해야만 했다. 제중원의 경험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정부가 김익남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 의학을 배워 오게 하고, 1899년에 "의학교"를 세운 데에는 그러한 경험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1900년 1월 2일 내부령 제27호로 <의사 규칙(醫士規則)>, <약제사 규칙>, <약종상 규칙> 등 의료인의 자격을 규율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제65회). 점차 (근대) 의료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신문에 광고를 내는 등 의료인을 자임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 법령 제정의 한 가지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 법률이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기사들로 익히 입증된다.

(제생의원) 본원 의사 박일근(朴逸根) 씨가 10년 전에 외국에 유학할새 의학에 전문하야 8년을 근공(勤工)타가 2년 전에 환국하매 제생의 심(心)을 발하야 작년에 의원을 중서 수진동 제1통 9호에 설하고 대방(大方), 부인, 소아, 내외과, 안과를 수증치지(隨症治之)하는데 신효를 입견(立見)하오니 구치(求治)하실 첨군자는 본 의원으로 왕문하시오. (<황성신문> 1899년 3월 7일자)

(의약사의 소청) 근일 내부 위생국에셔 각 의사와 약제사를 초집(招集)하야 시험한 후에 3원식 징수하고 준허장(准許狀)을 수여하야 시술 행판(行販)케 하얏더니 작일에 5서내 의사들이 동현(銅峴) 등지에 회동하야 내부에 호소한다는 개의(槪意)에 장정(章程)을 의(依)하야 금차에 3원만 납(納)하면 경(更)히 책납함이 무(無)할터인지 확정한 명문(明文)을 수취(受置)한다더라. (<황성신문> 1900년 3월 10일자)

(장연병원)장연거(長淵居) 박병규(朴秉珪) 씨가 내부에 청원하되 본이(本以) 의업자생(醫業資生)이 이경(已經) 20여 년이라 방금 한성에 이유(已有) 위생병원(衞生病院)하니 본인도 안변(安邊) 최달빈(崔達斌) 덕원(德源) 최용환(崔龍煥)의 예를 의하야 본 군에 사립병원을 설하고 제중케 하겟다 하얏더라. (<황성신문> 1900년 7월 11일자)

(유치병원) 최홍섭(崔弘燮) 씨가 유치병원(幼穉病院)을 설치하기로 내부에 청원하얏더니 지령하되 소관이 지중(至重)하니 의사 약품을 선택하며 본부 시험을 경(經)한 후에 준행(準行)이라 하얏더라. (<황성신문> 1901년 2월 12일자)

▲ <황성신문> 1900년 3월 10일자. 내부 위생국에서 의사와 약제사들을 소집하여 시험을 치렀다는 기사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장연병원과 유치병원 기사를 보면, 의료인뿐만 아니라 사립 병원의 설립도 내부의 허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프레시안

그러면 대한제국 시기 내부령 제27호에 따라 정부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은 의사와 약제사, 약종상은 얼마나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에 관한 한국 정부 기록이나 신문 기사 등은 발견된 바가 없다. 하지만 관련된 정보를 조선총독부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1910년판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1912년 12월 발행)는 1910년 12월말 현재 조선인 의사는 1344명, 조선인 약제사와 약종상은 각각 44명과 2551명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요람>(1911년 11월 발행)에는 1909년 12월말 조선인 의사는 2659명, 약제사는 143명, 1910년 9월 1일 현재 조선인 의사 1806명, 약제사 207명으로 나와 있다.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12월 발행)에는 의사 193명, 간호부 88명, 산파 59명, 약제사 32명, 약상(藥商) 130명, 제약자 1명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일본인 의료인 수만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통감부는 1906년 4월 한국 내에서 개업할 일본인 의사들을 통감부의 의적(醫籍)에 등록시키고 개업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의규(醫規)를 제정했다. 일본 동인회(同仁會)가 한국에 의사를 파견한 것도 이 의규에 의한 것이었다.

▲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요람>(1911년 11월 발행). 1909년 12월말 현재 조선인 의사 2659명, 약제사 143명, 산파 33명, 간호부 32명, 매약업(자) 3265명이었는데, 8개월 뒤인 1910년 9월 1일에는 각각 1806명, 207명, 2명, 11명, 3103명으로 약제사를 제외하고는 크게 줄었다. 일본식 기준에 미달하는 의료인을 축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이 가운데 가장 적은 수치를 택하더라도 1910년 무렵 조선인 의사 수는 1300명을 넘는다. 총독부가 의사 수를 조사, 파악한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아 이들이 모두 한국 정부나 조선총독부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인지는 불명확하지만, 1910년 이후 의사 수는 대폭 줄고 그만큼 의업자(醫業者)나 의생(醫生)이 늘어난 것을 보면(일제의 강제적 조치 때문으로 생각된다) 1910년 무렵에는 의사 자격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일제 강점 초기 의료인 수(각 연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함). 일(日)은 일본인, 조(朝)는 조선인, 외(外)는 외국인, 합(合)은 합계를 가리킨다. ⓒ프레시안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 15일 <의사 규칙>, <치과의사 규칙>, <의생 규칙> 등을 제정하고 1914년 1월 1일부터 시행함으로써 통감부 시기부터 시작된 의료인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1400번대 의생 면허 번호가 부여된 것은 1914년 8월이므로 1913년 통계치는 그 무렵에 조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통계를 보면 <의사 규칙> 등이 제정되기 전에 이미 법적 근거도 없이 조선인 의사들의 자격을 박탈하고 대신 의업자(醫業者)로 등록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감부는 1909년 10월 23일 통감부령 제34호로 <변호사 규칙>을 제정하여 한국인 변호사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의료인에 관해서는 그런 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 미국에서 서재필이 사용하던 의료 도구(<독립운동총서> 제11권,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펴냄, 2002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자격을 인정받았든 아니면 의사로 자임한 것이든 이들 의사의 대부분은 한의사였던 반면 근대식 의사는 그 10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다. 그러면 그 극소수의 신식 의사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의료 활동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국계(韓國系)로서 최초로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사람은 서재필(徐載弼, 1864~1951년)이다. 김옥균의 천거로 일본 육군유년학교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서재필은 갑신 쿠데타에 가담하여 비록 "3일 천하"였지만 불과 20세에 병조참판(국방차관)을 지냈다.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서광범(徐光範, 1859~1897년) 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미국에 홀로 남게 되었다.

망명 생활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낸 서재필은 마침내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Columbian University,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개화파 정부 인사들의 권유로 망명 11년 만인 1895년 12월 25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 고등재판소래거문(來去文, 1896년 7월 11일자). 서재필이 고소한 사건에 관련해 고등재판소 소장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이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공문으로 서재필을 "미국 의사(醫士) 필입 졔손 서재필"로 부르고 있다. ⓒ프레시안
서재필은 조선에서 "미국 의사 서재필" 또는 "닥터 필입 졔손(Philip Jaisohn)"이라고 행세했지만 1897년 4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2년 반 동안 의사로 활동한 적은 전혀 없었다.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 재학 시절인 1890년 6월 10일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는 80 평생 거의 대부분을 의사로 지냈다. 만약 그가 조선에 와서도 의사로 활동했다면, 근대 의학의 보급은 한결 순조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의사로 생활하기에는 서재필의 꿈이 너무 컸던 것일까?

▲ 탁지부대신 조병호(趙秉鎬)가 청의한 "중추원 고문관 서재필 해고비 2만 5800원을 예비금에서 지출하는 건"에 관한 주본(奏本) 제45호(1898년 4월 3일자). ⓒ프레시안
조선 정부의 외부협판(차관) 제의도 거절한 서재필은 월급 300원(외국인 중에서도 많이 받는 편이었다)의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신문> 지면과 강연 등을 통해 근대식 위생 사상 보급을 비롯하여 계몽운동을 활발히 벌였다(독립신문사로부터 받은 봉급은 월 150원이었던 것 같다.)

그 뒤 서재필은 친러파 및 러시아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재필은 원래 중추원 고문으로 10년 계약을 맺었지만 3년도 채 되지 못해 해약하고 본국(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정부의 사정에 의한 해약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머지 7년치 봉급 2만 5200원과 귀국 여비 600원도 지급받았다. (정확하게는 7년 10개월이 남았는데, 10개월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급되지 않았다.)

▲ 조선 주재 일본 변리공사 가토(加藤增雄)가 외무대신 니시(西徳二郎)에게 보낸 기밀 제3호 "독립신문 매수의 건." 서재필이 양도 대금으로 제시한 것은 약 4000원이며 금액의 지불은 1회로 하든 2회로 하든 일본 측의 편의대로 하라고 했다는 등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이 문서에는 독립신문의 자산과 운영 내역도 상세히 적혀 있다. ⓒ프레시안
서재필이 일본과도 불화했다고 하지만 <독립신문>을 일본 측에 팔아넘기려 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일본 변리공사 가토(加藤增雄)가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세 차례 공문을 보면 일본 측과 서재필 사이의 독립신문 매각 협상이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결렬되어 독립신문은 1898년부터 윤치호가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면 한국 땅에서 근대식 의사로 실제 활동한 최초의 인물은 누구일까?

<매일신보>는 1936년 새해를 맞아 "현대 조선 원조 이야기, 그것은 누가 시작하였던가?"를 열두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그 10회째에 "양의(洋醫) 원조"로 소개된 사람이 박일근(朴逸根)이었다.

다음 회에서는 박일근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자.

▲ <매일신보> 1936년 1월 12일자 "양의(洋醫) 원조 박일근 씨" 기사. 189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박일근은 에비슨(魚丕信)에 자극을 받아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설립했다고 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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