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1일
조선 지식 계급에게 訴함
10月 31日 오후 9時 본당 수석총무 宋鎭禹 氏는 하지 중장을 관저로 방문하고 약 1시간에 亘하여 회담하였는데 중장은 대략 如左한 담화를 하고 이 뜻을 조선 지식 계급에게 전해 달라고 언명하였다.
"우리는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일하러 왔다. 우리는 영토적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요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다. (…) 조선 지식 계급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정치적 고담준론만 하지 말고 실천적 행동을 하라. 세상은 무뢰한, 허무주의자, 친일파의 손에 농락되고 있지 않느냐.
(…) 나는 첫 번 왔을 때 조선인이 전부 반민주주의화한 줄 알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진상을 알고 보니 전 민중은 모두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찬성하더라. 이것을 무뢰한, 허무주의, 파괴주의자, 친일파, 일본인들의 跳梁에 맡겨서 노동자는 일을 않고 농민들은 수확을 하지 않도록 선동하고 있지 않느냐.
(…) 일본인 재산의 매매는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허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결속하고 불매하면 그들은 그대로 두고 가지 않을 것인가. 조선인 친일파가 일본인에게 쫓아다니며 사니까 그들은 배를 퉁기고 있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돈 1000원 이상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물품도 하나도 못 가져가게 하는데 조선인은 이것을 사러 다니느라고 주머니가 비고 옷은 추레하게 입고 있다.
(…) 다시 강조하거니와 조선의 지식 계급이 정치 공론만 하지 말고 대중 속에 뛰어 들어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여 친일파, 무뢰한, 파괴자, 일본인들에게 우롱되지 말기를 바란다."
단기 4278年 11月 1日
韓國民主黨宣傳部(전단)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군정 출범 두 달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하지가 송진우에게 자기 뜻을 조선 지식층에게 전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부탁을 받은 것은 군정청 고문단의 대표 자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파는 한민당의 삐라를 통해 이뤄졌고, 그 삐라에서 송진우의 신분은 '한민당 수석총무'였다. 고문단을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이 군정청과의 특수 관계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이 삐라에 나타나 있다.
이 삐라에서 하지의 상황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도착 당시 "조선인이 전부 반민주주의화한 줄 알고" 당황했었다고 한다. '반민주주의화'란 '좌경'을 뜻한 것 같다. 당시 한국의 좌익이 우익의 '민족주의'에 대항해 표방하던 '민주주의'보다 매우 좁은 뜻의 '민주주의'를 하지는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진상을 알고 보니 전 민중이 모두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찬성하는데, "무뢰한, 허무주의, 파괴주의자, 친일파, 일본인들"이 날뛰는 바람에 상황이 엉망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뢰한, 허무주의, 파괴주의자는 좌익을 가리킨 것 같은데, 친일파와 일본인은 왜 나오나?
남한에서 일본인들은 미군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다. 북한에서 문서 파기와 시설 파괴 등 일본인의 사보타지가 심했던 것은 점령군이 자기네를 적대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일본인들은 미군에게 최선의 협조를 했다. 미군이 자기네 편이고 자기네 통치 기구와 자원을 미군이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빈 말이라도 하지가 일본인들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친일파' 얘기를 했는지는 분명하다. 여운형-건준-인공을 가리킨 것이고, 이것은 한민당의 선전 결과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한 쪽에선 '좌파'라고, 또 한 쪽에선 '신자유주의자'라고 몰아대니까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인 모양이요" 한 일이 있는데, 한민당이 여운형에게 '좌익'과 '친일파'를 동시에 뒤집어씌운 것은 정말 심했다. 아이큐가 두 자리만 돼도 이런 모순된 비난을 곧이들을 수가 없을 텐데, 하지의 아이큐는 두 자리가 못 되었던 모양이다.
적산(敵産), 즉 일본인 재산과 관련해서도 하지는 일본인에게서 이를 구입하는 한국인을 탓한다. 그의 경제관념은 기막힌 수준이다. 매매를 허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실상 '자본주의'를 뜻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매매를 허가해 놓고는 조선인이 결속해서 불매해야 한단다. 주머니가 비고 옷차림이 추레한 한국인에 대한 경멸을 감출 생각도 않는다.
적산 문제가 갈수록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총독부의 공유 재산이 한국인의 공유 재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개인 재산이었다. 남한 지역의 40~50만 일본인이 갖고 있던 가옥과 토지, 공장과 회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의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재산권을 절대적 보호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한 일본인의 재산 중 원래 일본에서 가져온 것은 거의 없고, 통치 권력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재산을 만드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든, 그 노력을 보상해 준다면 일본 국가가 보상해줘야 할 일로 생각되었다.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와 소련군이 힘을 합쳐 이 기준을 관철했다. 북한에서 건너온 월남민들이 재산을 두고 온 것처럼 북한 거주 일본인들도 재산을 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이 두고 간 재산은 공유 재산으로 인민위원회에 접수되었다.
미군정은 사유 재산의 매매를 허용했는데, 완전한 허용이 아니고 군정의 허가를 거치게 했다. 허가의 기준도 명확히 세우지 않았으므로 엄청난 이권이 군정청에 쌓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재산을 헐값에라도 처분하고 싶었고, 한국인 재산가들은 헐값에 사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허가권은 군정청에 있었다. 유착관계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월 23일에서 30일까지 군정청은 '일본인 재산 처리 방침' 4개조를 연차적으로 발표했다. 제1조는 일반 원칙, 제2조는 생활 필수품, 제3조는 토지와 건물, 제4조는 기업체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모든 정당은 일본인 재산의 매매 금지를 주장해 왔다. 한민당조차 이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군정청은 민심에 역행하는 허가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리고 하지는 매매 허가로 인한 혼란과 협잡 사태를 한국인 '친일파'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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