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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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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생물학!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어머니의 탄생>

몇 해 전, 일주일 간격으로 세계조류학회와 세계영장류학회를 모두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조류 행동 생태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세계조류학회에 갔다가 며칠 뒤면 같은 장소에서 평소 사랑해 마지않던 영장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거 모인다는 소식을 접하고 없는 돈을 털어 눌러앉았던 것이다.

200년을 훌쩍 넘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류학의 명성에 걸맞게 조류학회는 아카데믹한 분위기에다 왠지 보수적인 냄새를 풍겼다. 금방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휘두를 것만 같은 인디애나 존스풍의 남자들로 빼곡한 학회장에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테스토스테론의 파도에 한순간 어지럼증이 느껴지기까지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이제 막 반세기에 접어들려는 젊은 학문답게 영장류학회는 분위기가 훨씬 밝고 경쾌했다. 청바지와 면 티셔츠를 대충 아무렇게나 입은 듯한 가벼운 옷차림에 남녀 구성원의 비율도 거의 비슷했으며, 게다가 태동 단계에서부터 독자적 학문 영역을 구축하며 서구 영장류학과 양대 산맥을 이뤄 온 일본에다 최근 들어 자국 내 영장류들에 급격한 관심을 보이는 중국까지 가세해 동양인 여자인 내가 끼어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영장류 하면, 침팬지들의 대모인 제인 구달을 필두로 세계적인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의 후원을 받은 세 여성(일명 "루이스의 앤젤"인 제인 구달/침팬지, 다이앤 포시/고릴라, 비루테 골디카스/오랑우탄)이 제일 먼저 거론되었던 터라 영장류학계가 다른 동물 분과 학계보다 여성이 많겠거니 했지만, 직접 비교 체험해 보고 나니 그 차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책이나 관련 자료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제인 구달뿐만이 아니라 영장류학계에서 맹활약하는, 그럼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드높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여성 학자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어머니의 탄생>(세라 블래퍼 하디 지음, 황희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어머니의 탄생(Mother Nature)>의 저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도 그중 한 명이다. 제인 구달이 바나나를 좋아하는 귀여운 인간의 친구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침팬지가 사실은 집단 사냥을 통해 때때로 원숭이를 잡아먹으며 도구를 (심지어 만들어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인류(humankind)를 재정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면, 세라 블래퍼 허디는 그동안 여성(암컷)을 능동적인 행위자가 아닌 하나의 '자원', 즉 단일한 계층으로 무더기 취급해 버림으로써 절반만을 이해한 바탕으로 구축된 (남성)인류(Mankind)를 종 전체를 담은 온전한 호모 사피엔스로 복원하려는 시도들을 해 왔다.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부유한 기업가(세계 최대 석유 판매 회사인 텍사코(texaco))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난 허디는 인류학을 공부하다 당시 막 날개를 펴던 영장류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어빈 드보어의 학부 수업을 듣던 중 인도의 랑구르원숭이들이 보이는 엽기적인 행동(영아 살해 행동(infanticidal behavior))을 접하고 영장류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때까지 랑구르원숭이 수컷에 의한 영아 살해(다른 수컷의 어린 자식들을 살해하는 행동)는 개체 수 과밀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인 개체들에서만 나타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 아부로 날아가 오랜 시간 랑구르원숭이들을 관찰한 허디는 영아 살해가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높이기 위해 수컷들이 벌이는 생존 전략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암컷들은 부성을 교란하기 위한 다양한 대응 전략들을 진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허디가 랑구르원숭이들의 행동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1970년대 초 무렵만 해도 하버드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연구 기관이었다. 과학계는 그중에서도 특히 배타적이어서 여성 과학자들이 동료들로부터 인정받고 학계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투쟁이 필요했다.

허디에게 학문적으로 자양분을 제공한 진화생물학 또한 현실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에드워드 윌슨을 중심으로 진화생물학에서 가지를 뻗어 나온 사회생물학이 막 떠오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찰스 다윈의 성 선택 이론을 적극 계승해 능동적인 남성(수컷) 대 수동적이고 성적으로 수줍은 여성(암컷)이라는 편향된 시각으로 자연 세계를 넘어 인간 세계까지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디가 직접 야외에서 관찰한 랑구르원숭이 암컷들의 행동 생태와, 다양한 문화권의 인류 집단과 동물 사회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재검토한 결과들은 여성과 모성에 대해 기존 생물학이 지니고 있던 관념들과 전혀 다른 지점을 지시하고 있었다. 다윈이 틀렸던 것이다.

다윈은 성적으로 수줍고 정숙한 여성과 자기희생적인 모성이라는, 빅토리아 시대에 만연해 있던 가부장제적 편견과 도덕주의자들의 바람을 자신의 성 선택 이론에 포함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다윈의 계승자들 또한 남성 편향적 관점이 드리워진 다윈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진화생물학은 한 세기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옛 도덕주의자들의 충고를 따라 동물과 자연계를 잘못 '보고' 있었다. 허디는 이렇듯 부주의하게 생물학에 덧씌워진 마초주의를 교정하고 그간 누락되어 왔던 여성(암컷)의 시각으로 다시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모성과 여성의 참모습을 밝혀내는 작업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15년에 이르는 그 장대한 여정의 결과물이 바로 <어머니의 탄생>이다.

<어머니의 탄생>은 여성이자 한 남자의 아내, 세 아이의 엄마인 허디가 과학자라는 직업 세계와 가정이라는 두 개의 울타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은 실존적 고민에 답을 구하고자 떠난 순례길이다. 아무런 제약 없이 일터로 나가는 남편과 달리 왜 나는 혼자 남아 집안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내가 직업적 야망을 택하고 아이들 양육을 포기한다면 비정하다는(비자연적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인가? 진정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는 어미 거미만이 모성을 대변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게는 모성이 없는 것인가?

허디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욕망과 현실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 그리고 자신이 배워 온 생물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자연적인 여성(수동적인 여성과 자기희생적인 모성) 관념이 괴리되는 이유를 찾고자 생물학적 진실을 파헤치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 진화생물학자로 진화한다. <어머니의 탄생>은 그런 점에서 남성 중심적 지배 질서를 두둔한다는 이유로 다윈에게서 등을 돌리고 여성의 생물학적 본성을 외면한 페미니즘과 다윈주의의 간극을 좁히고 화해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허디 세대 이후로 영장류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의 영역들에 여성들의 참여가 늘면서 과학계의 젠더 지형은 크게 변했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점차 남성 과학자들도 진화 역사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능동적인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허디가 선도한 페미니스트 진화생물학 또한 인류학과 영장류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을 흡수하며 영역을 넓혀 왔다.

아직까지 다윈주의를 비롯한 제반 학문들이 오래전에 구비해 둔 낡은 색안경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지닌 훌륭한 점은, (종교와 같은) 지식을 탐구하는 다른 수단들과는 달리 잘못되고 편향된 가정을 바로잡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라는 허디의 말처럼 과학계 내부에 드리워진 편향된 시각은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의해 앞으로도 계속 교정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로 얻은 양성 모두를 포함한 확장된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인간 본성의 참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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